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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48화 (748/1,277)

##  748화

우리는 앉아서 잠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데니스 프로듀서가 이끄는 미술부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고치고 헤어 스타일링을 받기도 했다.

복장도 교복이니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다며 데니스는 최소한의 도움만을 제공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곧 스푸마토 콰르텟의 멤버들도 잇달아 도착했다.

“벌써 다 모여 계셨군요. 많이 늦었네요.”

“어이쿠, 장관께서 벌써.”

약속 시간에 늦은 건 아니지만 문화부 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그들은 인사와 함께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 왔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쓰지 말게. 이쪽 피아니스트들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왔을 테고, 모두 각자 일들이 있었을 테니.”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하, 당연한 것을.”

연주회 무대도 아니고 리허설에 문화부 장관이 와 있는 상황은 흔히 겪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콰르텟 멤버들도 약간 긴장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연주자들의 준비가 끝나고 한 테이블에 둘러앉게 되었다.

직접적인 연주회 관계자가 아닌 프세볼로트 장관은 테이블이 아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무시하고 바로 회의를 시작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해했는지 그는 자연스레 일어나더니 우선 데니스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촬영도 하나? 프로듀서.”

“아, 예.”

“그럼 본론 이야기를 해 볼까.”

15분 정도 될 인터미션 다큐멘터리엔 직접적인 연습 영상이 들어가진 않지만 인터뷰나 회의 장면 등이 편집되어 나온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결 양상이라든가 프세볼로트 장관의 멘트는 딱 좋은 영상감이기도 했다.

지금 이 장면도 방송으로 나갈 것을 의식하는지 프세볼로트 장관은 카메라가 전체적인 뷰를 잘 잡을 수 있도록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오늘 연주회의 순번을 정하기 위한 대결이 있다고 들었네. 때문에 중간 리허설 차 알렉산드라가 날 초빙했고…… 난 원래 본 무대에서 온전히 감동을 느끼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와 있지.”

매년 특정 연주회를 열도록 허가하는 건 장관의 일이겠지만 직접 총괄하여 감독하고 세세하게 기획하는 일은 전문가들의 몫이었다.

때문에 그는 특별한 요청을 받지 않는 이상 리허설 현장엔 잘 오지 않는 것 같았다. 저번 송년 연주회 때도 그렇고.

그래서인지 현장에 있는 지금도 그는 크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신경 쓰지 말게.”

짧게 잘라 말한 프세볼로트 장관은 모두 의아해하자 이어 설명했다.

“난 참관인일세. 참관인은 참관인으로서 평가는 전혀 하지 않고 관계자들에게 맡길 것. 그게 내 입장이지. 다만 이 결과를 보증할 뿐.”

“…….”

“그러니 평소 하던 대로 했으면 좋겠군.”

심사위원이 아닌 참관인으로서의 입장.

물론 문화부 장관으로서 그 역시 예술적 식견이 굉장히 높을 테지만 그럼에도 일선에서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않겠다고 못 박고 있었다.

연주자와 관계자들이 되도록 자유롭게 연주회를 기획하고 성공시킬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원칙적이고도 단순명료한 이야기였다.

짧은 한마디였는데도 그것은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산드라나 데니스 등의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가져다준 듯 보였다.

그렇게 편하게 진행되는 와중, 게오르기가 한마디 얹었다.

“저희는 장관님을 그저 참관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

쓸데없는 소리를 왜 하냐는 듯 알렉산드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게오르기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괜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의 청중이시기도 하죠. 그러니 그만큼 만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게오르기가 연주자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정중하게 다시 한번 인사하는 자리라 할 수 있었다.

프세볼로트 장관도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 주었다.

“청중으로서의 내 입장도 고려해 줘서 고맙군.”

“지켜보시죠. 장관님.”

“알겠네.”

긴장도 불안도 없이 모두의 열의만이 가득한 상태로 테이블 위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보통 회의가 진행되면 그간의 진척 상황 등을 서로 공유하고 합동 리허설이나 평가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런 서론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오르기는 기다리지 않고 느닷없이 제안했다.

“그럼…… 연주부터 시작할까요?”

“그러죠.”

에르네스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차 안에서 잠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 역시 그렇고.

“누가 먼저?”

“먼저 하시죠?”

“음…… 아니, 공정하게 동전 던지기로 하죠.”

게오르기는 어떤 상황에서든 공정하게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어 앞뒤를 보였다.

“위를 보고 있는 쪽이 먼저 하는 겁니다? 어느 쪽 하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그럼 제가 앞면으로 하죠.”

그렇게 자연스레 에르네스트는 뒷면으로 정해졌고, 게오르기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른 동전은 다시 정확하게 손등 위로 떨어졌다.

손등을 탁 덮은 게오르기는 잠시 좌중을 둘러보며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천천히 결과를 공개했다. 손등 위 동전은 머리가 두 개 달린 새의 양각을 보이고 있었다.

“앞이네…….”

“아, 이럴 줄 알았어. 꼭 먼저 이야기 꺼내면 먼저 하게 된다니까?”

“게오르기, 어디 가서 동전 던지기 하자고 하지 좀 마요.”

기다렸다는 듯 콰르텟 멤버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먼저 하는 쪽이 불리하다는 생각은 모두에게 있는 것 같았다.

게오르기는 나약한 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듯 일갈했다.

“시끄러워. 무슨 상관이야? 연주만 잘 하면 되는 거지.”

“……당신 지금 우리가 뭘 걸고 있는 건지 까먹고 있지?”

“…….”

다리아가 예리하게 꼬집자 게오르기가 입을 다물었다.

연주회 무대 순서를 놓고 대결하자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순서의 무의미를 논해 봐야 자가당착이 될 뿐이었다.

닦달당하는 게오르기가 불쌍했는지 아나스타샤가 얼른 나서며 상황을 수습했다.

“먼저 하죠. 괜찮잖아요?”

아나스타샤의 말에 멤버들의 비난이 뚝 멎었다.

콰르텟에 있어 그녀는 단발성 합주자이자 아직 어린 학생이기에 발언력이 거의 없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지만, 그녀는 확실하게 콰르텟을 퀸텟으로 변화시킨 피아노 연주자로서 분명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멤버들이 그녀를 충분히 존중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다섯 명의 연주자들은 모여서 곧바로 연주에 들어서기 전 짧은 확인을 거쳤다. 이미 많은 것들이 충분히 정해져 있어서 길게 논의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스타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우리끼리 있을 때 보여 주었던 그 장난기 많은 아나스타샤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강렬하게 승부욕에 불타고 있는 피아노 연주자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 다 내 퀸텟 리허설은 못 봤지?”

난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그간 우린 함께 연습도 많이 하면서 서로의 피아노 실력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퀸텟 연습은 따로 다른 현악기 연주자들과 만나서 했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언젠가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오늘 첫 기회가 될 것 같다.

아나스타샤의 예리한 눈빛에 일순 웃음기가 감돌았다.

“잘 보고 있어. 이따 감상 물어볼 거야.”

농담처럼 가볍게 시작하는 리허설이지만 실제 무대만큼이나 진중한 엄격함으로, 아나스타샤는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

알렉산드라가 이 상황을 주도한 것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방송으로 송출되는 연주회에서 종종 필요로 하는 인터미션 다큐멘터리 내용은 늘 진부한 편이다.

연주자들이 연주회를 준비하는 방식은 다들 비슷비슷하고, 심심하다고 해서 없던 트러블을 일부러 만들고 연출해 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열의가 넘치는 연주자들과 함께 하다 보면 그런 특정한 연출 같은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좋은 장면이 잡히곤 한다.

무엇보다 연주회의 성공을 우선으로 여기는 알렉산드라도 이 특정한 상황 자체가 전체적인 성공에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을 지녔고, 때문에 게오르기와 에르네스트를 지원하며 프세볼로트 장관까지 초빙해 제대로 대결 양상 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

그런데 알렉산드라가 한 가지 착각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노련한 연주자들은 몰라도 에르네스트를 비롯한 세 학생 연주자들은 긴장하고 어려워할지도 몰라 어떻게 케어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특히 아나스타샤의 경우엔 예민한 부분이 있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들은 모두 기우에 그쳤다. 세 피아니스트는 다른 어른들보다도 훨씬 더 능숙하게 대처하며 연주자로서 당당했다.

그중 아나스타샤는 아예 콰르텟의 네 명을 거의 휘어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피아노 협주곡의 작은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피아노 콰르텟이니만큼 피아니스트를 배려하며 의견을 많이 참고해 주는 편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그런 음악적 부분뿐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아나스타샤의 존재감은 크게 비춰졌다.

‘거의 완성은 되었다고 들었는데 과연…….’

다섯 사람이 모여서 어떤 연습을 해 왔는지 그간 몇 번 확인한 바 있었지만 오늘 연주할 곡은 콘서트 디렉터인 그녀로서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대결에서 처음 보여 주겠다면서 따로 연습한 곡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확인하지 못한 곡이 지금 처음, 그것도 문화부 장관 앞에서 시연된다.

만약 잘못된다면 그 책임은 저 다섯 명뿐이 아닌 그녀에게도 분명하게 돌아간다.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알렉산드라는 불안감이나 기도보다는 흥미진진한 기대를 먼저 느끼고 있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자세를 정돈하고 준비를 마친 아나스타샤가 뒤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한마디만으로 수십 명의 인기척으로 북적이던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모두들 음악계에 종사하며 청중으로서의 자세가 몸에 밴 사람들이라 그러한 준비는 일순간에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나스타샤가 생긋 웃었다.

“저희 퀸텟이 연주할 곡은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퀸텟. 사단조. 오푸스 49입니다. 아마 들어 보신 분도 계시고, 처음인 분도 계실 텐데요.”

가장 어린 아나스타샤가 곡을 소개하는데도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나이도 많고 콰르텟의 리더인 게오르기는 조용히 활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곡을 소개하는 건 그녀가 제격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한 번 머뭇거리거나 말을 더듬지도 않고 매끄럽게 곡을 소개하고는 미소와 함께 작게 묵례했다.

“그리 길지 않고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도록 제가 골라보았으니, 모쪼록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유도한 것도 아닌데 박수가 터져 나왔다. 프세볼로트 장관도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박수 소리가 거의 동시에 흩어졌을 때, 그 소리에 보답하겠다는 듯 다섯 연주자의 퀸텟 연주가 시작되었다.

‘……와우.’

사단조의 알레그로. 강렬하고 정열적인 악센트인 마르카토marcato로 다섯 악기가 동시에 음악을 펼쳐 냈다.

눈앞이 일렁이고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 그사이에 갑자기 집어던져진 기분을 느끼며 알렉산드라는 팔짱을 끼었다. 삐딱하게 보려는 것이 아닌 스스로를 지키려는 태도였다.

소리의 파동은 몸속 곳곳을 울리며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다. 노련한 연주자들의 음악은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고 혈관에 파고든다.

한 명씩 놓고 보아도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는 다섯 명이 모여서 시너지를 일으키자 손에 악기가 없는 무방비한 사람으로선 도저히 견뎌 낼 수 없는 압력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알렉산드라는 양팔에 소름이 가득 돋는 것을 느끼며 음악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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