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52화 (752/1,277)

##  752화

20명 정도 되는 인원들의 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환호가 우리를 덮쳤다.

“브라바!”

“이걸 무대에 올린다니,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네.”

좋은 반응이라 다행이었다. 난 작게 한숨을 쉬며 온몸을 늘어뜨렸다.

집중력을 끌어내며 곤두서 있던 신경들이 풀어지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돈다. 단 10분이었지만 충분히 그만한 에너지를 쏟아낸 까닭이다.

기분 좋은 탈력감과 저편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이대로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건너편의 에르네스트도 똑같은 타이밍에 일어서서 나와 피아노 앞에 섰다.

그간 피아노 듀엣 연습은 몇십 번이나 하면서도 이렇게 인사 연습을 한 적은 없었지만, 우린 아무 문제없이 정확하게 이 연습실 안의 청중들에게 인사를 보낼 수 있었다.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고, 살짝 옆을 돌아보았다.

에르네스트는 분명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난 그가 속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연주 중에 실수한 것 때문인 걸까…….

“…….”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가만 바라보고 있자 에르네스트도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살았어. 타티아나.”

단지 그렇게만 말해도 무엇을 말하는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연주 중 있었던 일을 유야무야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나간 연주라 해도 반성하는 건 좋은 태도였지만, 난 되도록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싶었다.

“아하하, 별말씀을.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다 보면 헷갈려서 중간 구간을 건너뛰거나 반복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특히 우리처럼 음형 자체를 손으로 외우는 일이 잦은 연주자들에겐 더더욱.

거기에 에르네스트는 많은 곡들을 작곡가로서 해체해 온 사람이고, 그만큼 단기간에 많은 선율을 머리에 입력하다 보면 아무리 천재인 그라도 실수하는 순간이 온다.

그래도 연습 땐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 없다가 중요한 순간에 와서 헷갈리는 걸 보면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난 사람으로서의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걸 새삼 확인한 것 같아서 솔직히 난 지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친구의 모자람에 기분 좋아하는 성격 나쁜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한 일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할 정도로 작은 실수가 아니라는 건 너도 알잖아. 네가 수습해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연주 중지였어.”

“중지되더라도 제 손에서 중지되었겠죠. 전 그걸 이어 나갔을 뿐인…….”

“그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려고 하니 에르네스트가 딱 잘라 말했다. 정말 화가 난 걸까?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에르네스트는 지금 화를 내고 혼을 내야 할 사람이 서로 뒤바뀌었다는 걸 느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착 가라앉은 미안함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러지…… 아무튼, 정말 고마워. 하나 달아 둬.”

“무슨 말씀이신가요?”

“소원 들어 달라 하면 뭐든 들어줄게.”

여전히 시끌시끌한 사람들 사이에서 에르네스트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난 그가 이렇게 말할 때면 확실히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소원이란 말을 들으니 계산적인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열여섯 살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면 잘 해봐야 햄버거를 산다거나 우스운 분장을 하고 놀아주는 것 정도겠지만, 에르네스트는 연주자로서는 물론이고 작곡가로서도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내가 이 애에게 무엇을 부탁할 수 있지? 평소에도 들어줄 만한 부탁 말고 조금 특수한…….

“…….”

그렇게 그에게 버거울 만한 일을 생각하고 있던 난 순간 든 죄책감에 얼른 모든 생각을 지워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며 올려다보자 그는 진심이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심인 건 알겠지만, 절 시험에 들게 하진 말아주시겠어요? 난 에르네스트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백지수표를 너무 남발하시는 것 아닌가요? 제가 나쁜 맘 먹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나요?”

“죽으라고 하면 죽을게.”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세요!”

난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런 말은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죽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건 그가 아니라 내가 대신해야 할 일이었다.

오늘 그의 실수를 수습해 준 것과 같은 책임감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지만, 내겐 분명히 그러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에게만 말했던 생각이기에 다른 친구들에겐 한 번도 말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이렇게 과민반응하면 안 된다.

내 반응에 에르네스트도 또다시 실수했다는 듯 표정이 굳어졌다. 난 급히 그의 팔을 잡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쉽게 넘어갈 생각 마세요. 정말 어려운 요구를 하고야 말 테니까.”

“……죽는 것보다 어려운 게 있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 있겠죠.”

내가 할 수 없고, 또 다른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세기의 천재로 주목받는 에르네스트만이 가능할 일을 시킬 생각이다.

그때 가서 난색을 표해도 소용없다는 뜻으로 눈을 부라리자 에르네스트는 멀뚱히 날 내려다보다니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알았어. 기대하고 있을게.”

“무서워해 주세요!”

“그래, 무서워하고 있을게.”

그는 이제 되었다는 듯 대충대충 답했다. 난 조금 더 흘겨보는 척을 했지만, 방금 있었던 내 반응을 그가 잊어 준 것 같아서 속으론 안도했다.

우리가 방금 한 연주의 감상으로 주고받은 말은 그 정도였다.

연주 중에 그가 내 파트로 자연스레 넘어올 정도로, 그리고 내가 자연스레 그의 파트를 붙잡아 수습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린 일체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이상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대신 다른 사람들과는 많은 말을 해야만 했다.

“헝가리 광시곡 2번의 빨라지는 구간에서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싱크로나이즈드되어 있는 건 처음 들어 본 것 같아. 정말 최고였어.”

“감사해요.”

콰르텟 멤버들은 물론이고 현장에 있던 거의 모든 관계자들이 모두 우릴 둘러싸고 말을 걸어왔다. 아까 전 그라나도스의 퀸텟 연주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너희가 이 곡을 선곡했을 때만 하더라도 너무 어렵게 가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잘 해낼 줄 알았어.”

아나스타샤도 내 곁에 다가오더니 웃으며 칭찬해 주었다. 그녀는 우리 듀엣 연습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어떤 곡인지는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칭찬만 하는 것 같던 그녀는 갑자기 앞으로 고개를 슥 숙이더니 다른 사람들은 못 듣게 속삭였다.

“있잖아, 그런데 연습하던 때랑은 조금 다르던데?”

최대한 위화감 없게 잘 수습해서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는데, 아나스타샤는 약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역시 그녀도 귀가 밝은 피아노 연주자로서 예민한 부분이 있었다.

난 미소와 함께 인정했다.

“맞아요. 서로 파트가 살짝 뒤바뀌기도 했죠.”

“서로 합의하에 그렇게 하기로 한 거야?”

“아뇨, 연주 중에.”

자신이 들은 것이 틀리지 않은 걸 확인한 아나스타샤는 놀란 눈을 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직접 듣고도 믿기지가 않네. 어떻게 연주 중에 말도 없이 혼동이 왔는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가 있니?”

“괜찮았죠?”

“당연하지!”

아나스타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에르네스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나스타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연주 중에 있었던 작은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에게 찬사를 보내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날 바라본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누가 먼저 헷갈렸던 거야?”

그녀도 중간에 알아차렸을 뿐이지 악보 전체를 외우고 연주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어느 시점에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알진 못하는 것 같았다.

난 굳이 에르네스트였다고 콕 집어 이야기하기 싫었다.

“글쎄요?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평생 실수 한 번 안 할 것 같은 사람 두 명이 모였는데 실수가 나왔으니까, 궁금하잖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요…….”

아나스타샤는 우릴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나 역시 에르네스트를 약간 그렇게 봤던 게 사실이었으므로 할 말이 없긴 했다.

일단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충 웃어넘기려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잠시 생각에 잠겨 귀를 만지작거리며 날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알았으니까.”

“……예?”

“네가 먼저 잘못한 거면 분명 있는 그대로 말했겠지. 안 그러니?”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미 확신을 지닌 그녀를 이제 와서 속여 보려 해 봐야 소용없을 게 분명했다. 난 혹시 이대로 그녀가 에르네스트에게 가진 않을까 걱정이 들어 미리 선수를 쳤다.

“그, 놀리거나 하진 마세요.”

“걱정 마. 내가 이렇게 알아차렸단 걸 말해 준 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단 뜻이잖니?”

“…….”

선수를 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나보다 아나스타샤가 이미 몇 수는 더 앞에 나가 있는 것 같았다.

바보가 된 기분으로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어떻게 되려나? 투표 같은 거라도 하나?”

그제야 난 그녀와 내가 연주회 순서를 두고 경쟁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변을 보니 한창 우릴 칭찬하던 분위기는 곧 엄중한 심사의 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 중앙엔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가 위치했다.

그녀는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듯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 준비해 온 분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주회 당일이 기대되는 중간 점검이었네요.”

퀸텟과 듀엣 모두에게 만족스런 칭찬을 전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결론을 내야 할 건 내야 하겠죠.”

그녀는 어떠한 허락을 구하듯 프세볼로트 장관을 돌아보았고,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좌중을 향해 알렉산드라가 말했다.

“여기 계신 관계자 여러분들과 상의를 할지 아니면 투표를 할지 생각해 봤는데…… 확실하게 하기 위해 투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것 없이 그냥 거수로 해도 괜찮겠지만, 그러면 연주자들이 각 투표 현황을 보게 되어 버린다.

물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한 연주자들은 그 어떤 결과라도 납득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특정 관계자가 어떻게 편을 들었는지에 대해선 굳이 알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알렉산드라는 혹시라도 모를 일들은 애초에 차단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곧 작은 종이들이 연주자들과 프세볼로트 장관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 심지어 촬영팀이나 장관의 수행원들에게도.

연주회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청중이라 할 수 있을 사람들의 의견까지 모두 취합하려는 듯 보였다. 우린 거기에 불만이 없었다.

“다 되었으면 제가 걷겠습니다.”

다 합쳐 열 명 남짓한 인원인지라 투표는 금방 끝났다. 집계 역시 알렉산드라가 혼자 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를 낸 알렉산드라는 난처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다시 한번 투표용지들을 확인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고 있는데,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6:6. 동표입니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네요.”

“진짜요?”

“동표라고요?”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곧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6:6이란 결과는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나와 에르네스트가 잘 해냈던 만큼 퀸텟 역시 굉장히 멋진 연주를 해냈으니까.

거기에 절대적인 실력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개의 취향이나 연주회 전체의 구성을 고려하는 등 여러 요소가 평가에 들어갔다면, 이렇게 표가 나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뉘는 건 재미있는 일이긴 했다.

저마다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 갔다. 자신의 투표에 확신이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이러다간 거수로 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될 것같이 느껴졌는지 알렉산드라가 빠르게 나섰다.

“투표하지 않으신 분들 중 중립에 있으실 분은 한 분뿐이군요.”

연주자들은 투표에 참가할 수 없다. 실력차가 극명하다면 연주를 듣자마자 바로 승복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장관님?”

“참관인으로 구경만 하긴 글렀군.”

프세볼로트 장관은 난감해하는 듯했으나 이런 상황에서 의견을 내지 않고 끝까지 회피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연주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받아들이리란 걸 느낀 그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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