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53화 (753/1,277)

##  753화

프세볼로트 키릴로비치 스체니코프 문화부 장관은 단순히 정치인으로서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명망 또한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 연주회의 결정권자이자 투표권자로서 마지막으로 그가 내리는 판단이라면 달리 이견을 낼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

사실 난 어떻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할 뿐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이 되니 긴장이 된다. 콩쿠르 무대에 올라 심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지 숨도 쉬지 않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프세볼로트 장관이 결론을 냈다.

“듀엣이 2부 무대에 오르도록 하세.”

간결하고 명확한 한마디였다.

동요하는 사람도 없었고 모두 조용히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좌중을 한 번 살피더니 말했다.

“퀸텟도 듀엣도 모두 실력은 출중했네. 내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앞으로가 더더욱 기대된다고밖에 할 말이 없더군.”

“…….”

“때문에 압도적인 실력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구조적으로 보아서 시선이 집중될 듀엣을 2부로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네.”

한 연주회의 프로그램 구성에 정해진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서로의 의견이 상충한다면 실력으로 답을 정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실력차가 없다면 여러 관계자들의 의견을 모아 연주회를 성공으로 이끌 근거에 입각하여 결정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껏 수많은 연주회와 연주자들을 거쳐 오며,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주관해 보았을 프세볼로트 장관은 나와 에르네스트에게 조금 더 무게를 실어 주었다.

동의를 구하듯 그가 물었다.

“어떤가? 알렉산드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렉산드라는 사실상 자신이 누구에게 표를 던졌는지 밝혔고, 그것으로 이 대결의 끝이 완전히 결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라는 우리를 향해 물었다.

“연주자분들, 이 결정에 대해 이견이 있으시다면 듣겠습니다.”

투표 결과도 있는데다가 문화부 장관과 콘서트 디렉터의 의견이 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어지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이견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되레 모두들 시원스레 만족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없습니다.”

“없어요.”

“이렇게 정해졌으니 됐군요.”

결과는 듀엣 쪽으로 기울어지긴 했지만 투표까지만 하더라도 동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실력차가 극명하게 드러나서 갈린 결과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혹자는 아쉽게 갈린 이 상황에서 억울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하고 결과에 승복하기로 한 연주자들은 모두 납득하며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내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도 나지막이 웃더니 날 돌아보았다.

“져버렸네?”

“아니에요, 구조적 차이라 하셨으니까…… 만약 제가 퀸텟이었고 아나스타샤가 듀엣을 이루었어도 똑같았을 거예요.”

실력이 같은 상황이라면 연주자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분명 퀸텟과 듀엣의 순서로 1, 2부가 정해졌으리라. 따라서 아나스타샤가 졌다고 할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안 됐을 거야. 왜냐면 난 에르네스트가 실수했을 때 수습하지 못했을 테니까.”

“…….”

정확하게 상황을 바라본 그 말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판단하는 메타인지가 강한 아나스타샤는 순간적으로 뒤바뀐 파트를 캐치해서 연주하는 일을 해내지 못했으리라 판단했다.

난 무작정 그녀도 순발력을 발휘해서 해낼 수 있었으리라 말해 주고 싶었지만, 즉흥적으로 하더라도 나처럼 악보 그대로 연주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그 상황에서 아무 문제없이 깔끔하게 수습할 수 있었던 건 총보 연주에 익숙한 덕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만약 그녀가 에르네스트와 듀엣을 이루었다면 지금 이 결과가 바뀌었을까? 연주가 중단되었다면 분명 볼 것도 없이 퀸텟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겠지.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실수를 보다 크게 느꼈을 테고.

그런 상상을 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히죽 웃더니 작게 말했다.

“아무튼, 잘되었다고 생각해. 나도 솔직히 퀸텟이 1부에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띄우고 2부에서 집중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

“예?”

“이거 게오르기와 에르네스트가 멋대로 진행한 것이었잖니?”

분명 아나스타샤도 대결엔 진심으로 열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그녀는 결론이 난 지금도 계속해서 그러는 건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쿨한 면모가 있는 아나스타샤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멀찌감치에서 들었는지 게오르기가 다가오더니 아나스타샤의 말을 받았다.

“멋대로 진행하긴 했지만 그만한 확신을 가지고 한 일이지.”

“아핫, 미안해요.”

“미안은 내가 해야겠어. 괜한 대결에 끌어들이고.”

말만 미안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게오르기는 연이어 아나스타샤에게 사과했다. 사실 그가 주도한 일이니까 그가 사과하는 것도 옳긴 했다.

“네 연주를 듣고 연주회 피날레에 욕심이 생겼던 건 사실이야.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만…… 그만큼 대단한 친구들이네.”

“그렇죠?”

“이 정도로 잘 해낸다면 어떤 문제도 없지.”

확인했어야 할 부분을 다시 확인한 것 같은 느낌으로, 게오르기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후련하다는 듯 웃더니 날 돌아보며 말했다.

“멋지게 잘해 보죠. 타티아나.”

“예, 게오르기.”

그렇게 연주회 2부로 듀엣이 들어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고, 다시 회의가 진행되었다.

10분가량 이어진 회의에선 달리 의견이 갈릴 것도 없었다. 이젠 각 연주자들의 프로그램도 결정되었고 수정하기엔 시간도 부족했다.

그대로 빠르게 진행하는 일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윤곽이 잡혀 가는 연주회를 지켜보는 프세볼로트 장관도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하며 기대하는 듯 보였다.

회의를 어느 정도 정리한 알렉산드라는 이때다 싶었는지 살짝 제안했다.

“오늘 각 연주자 분들의 준비 중인 곡들을 확인했는데…… 한 가지 더 듣고 싶은 게 있는데, 가능할까요? 에르네스트.”

우리는 이 상황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사실 지금 가장 확인해야 할 것은 퀸텟이나 듀엣의 연주가 아니라 에르네스트가 새로 작곡하는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다.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곡을 갑자기 큰 무대에 올릴 수는 없는 일. 때문에 알렉산드라는 그가 곡을 작곡해 오면 확인해 보고 마지막으로 컨펌해 주겠다고 했었다.

지금 문화부 장관까지 와 있는 이 자리는 그 결정을 내리기에 아주 적절한 자리였다.

그건 우리 역시 모르는 바가 아니었고,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우리에게 작곡된 부분까지만이라도 준비하길 부탁했다.

당연히 나와 아나스타샤는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지금 바로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연습이 되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하자고 하면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 있게 승낙하는 대신 살짝 주저했다.

“피아노가 두 대뿐이라…….”

“그거야 한 대 더 세팅하면 되는 일이죠.”

“…….”

알렉산드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종용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약간 이상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나온 돌발적인 요구이긴 했지만 이미 충분히 예상하고 연습을 했으니 되레 더 자신만만하게 그럴 줄 알았다고 나서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묘하게 조심스럽게 상황을 대하고 있었다.

혹시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걸까? 평소엔 결코 하지 않던 실수를 하기도 하고. 아마 오늘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건반을 만지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내가 옆에서 괜찮지 않냐고 부추기는 것도 안 될 일이다. 아나스타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지 별말 없이 그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알렉산드라와 에르네스트가 연주를 놓고 상의하던 중, 프세볼로트 장관이 말했다.

“세 피아니스트가 초연하겠다고 했던 신곡 말하는 건가?”

본 기획에 없었던 초연이 연주회 맨 처음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당연히 프세볼로트 장관이 모를 리 없었다. 알렉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고드렸죠?”

“에르네스트 군의 이야기에 대해선 듣고 있었지.”

예리한 눈빛이 에르네스트에게 향한다. 아마 오늘 있었던 그 어떤 연주보다 사실은 그가 작곡한 곡에 대해서 제일 궁금하고 또 염려되었을 것이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지금 당장에라도 곡을 확인하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시선은 잠시뿐, 에르네스트를 거쳐 나와 아나스타샤로 향했다가 거두어졌다.

“상당히 기대되긴 하지만. 무대에서 듣도록 하지. 그쪽이 이 기대를 훨씬 더 만족스럽게 만들어 줄 테니까.”

맛있는 요리는 급하게 입에 넣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겠다는 듯 프세볼로트 장관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공개되어 있는 곡이라면 예상이 가능하니 이렇게 미리 맛을 봐도 괜찮겠지만, 세상에 처음 나오는 곡이라면 그 미지를 보다 완전하게 즐기고픈 것이 당연했다.

앞서 본 두 연주로 이미 어느 정도 만족했고, 우리가 준비할 미지의 요리에서도 어떠한 향이 날지 이미 어느 정도 파악했다.

믿고 본 무대에서 즐겨도 되리란 확신이 그의 뇌리에 새겨진 것이다.

때문에 미완성된 상태에서 살짝 맛을 봐 버린다면 정작 본 무대에서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된다. 감상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미식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고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준비가 잘되고 있다는 것은 잘 보았으니 난 이만 방해하지 않고 가 보겠네. 신경 쓰지 말고 진행하게나. 혹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또 요청하도록 하고.”

프세볼로트 장관은 짧게 이야기하며 몸을 돌렸다. 수행원들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알렉산드라가 급히 인사했다.

“아. 오늘 감사했습니다.”

“나야말로 멋진 곡을 두 곡이나 듣게 되어서 좋았네.”

막 떠나려던 프세볼로트 장관은 연주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연주회도 기대하겠네.”

짧고 강렬한 신뢰가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사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이 연주회의 최종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연주회의 구성이나 프로그램에 이것저것 손을 대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주자들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상황 내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을 테고.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최대한의 자율권을 주면서 연주회의 성공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물론 오늘 연주가 별로였다면 어떤 개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말 까탈스러운 주최자를 만나면 골치 아픈 경우도 많은데, 우린 정말 운이 좋은 편인 것 같았다.

모두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안도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알렉산드라가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우리도 잠시 휴식할까요?”

격렬한 연주와 회의로 약간 지쳐 있는 상황이어서 모두가 그 제안에 찬성했다.

***

담배를 피우거나 촬영 장비를 확인하는 듯 모두 휴식 시간을 보냈다.

에르네스트는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었지만 잠깐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세수라도 할 참이었다.

‘큰일 날 뻔했어.’

그가 오늘 한 실수는 이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듀엣 연주에 있어선 아주 치명적인 실수다.

차라리 자기 손에서 실수가 나서 망치면 상관없다. 책임도 비난도 직접 지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파트너를 당황시켜서 파트너 손에서 실수가 나게 되어 버린다면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실수를 낸 사람에게 책임을 묻게 되어 있었다.

그건 뒤늦게 해명한다 하더라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사람들 앞에서 타티아나를 망신시킬 뻔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애는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책임을 전가하거나 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탓이라 할 애였고.

“…….”

그런 생각을 하니 식은땀이 다 흐른다.

타티아나가 초인적인 실력과 순발력으로 커버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뻔했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을 때 타티아나는 뭐 이런 일로 그렇게까지 하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에르네스트는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기에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에르네스트는 거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근래 육체적으로 고된 건 물론이고 정신도 많이 어지럽혀져 있다는 자각이 있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얽혀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누구 탓할 것 없이 모두 그가 자처한 일이다. 음악가로서의 일이나,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일이나. 그 무엇 하나 그는 후회하거나 대충 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실수를 해서도 안 된다.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들에게 실수란 용납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스스로를 다잡으며 에르네스트는 손을 씻었다.

“힘들었나?”

그때였다. 화장실에 있던 또 한 명의 사람이 에르네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거울 뒤편에 서 있는 건 방금 연습실을 나갔던 프세볼로트 장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