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4화
서둘러 물기를 털어 낸 에르네스트가 뒤로 돌아섰다.
머리는 희끗하게 세었지만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노년의 남성. 프세볼로트 장관은 자신의 나이의 4분의 1도 안 될 에르네스트를 보며 뭔가 재밌어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나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도 위축되거나 하지 않았지만 장관쯤 되는 사람을 화장실에서 혼자 마주하니 약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들 담배가 우선인지 화장실엔 아무도 오지 않아서 난감했다.
그나저나 힘들었냐고 안부를 물어올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짤막히 대답했다.
“아니오…… 괜찮습니다.”
“연주가 워낙에 화려해서. 아무리 자네라도 힘들지 않았나 싶더군.”
타티아나와 연주한 헝가리 광시곡 2번은 비단 프란츠 리스트의 곡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아노 곡들 중에서 따져 보더라도 최상위에 드는 난이도로 이름이 높았다.
피아니스트로서 신경 써야 하는 섬세한 디테일링뿐만이 아니라 과격한 도약과 빠른 패시지가 많아서 옆에서 보기에도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는 곡이었다.
덕분에 연주했을 때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쉽고.
프세볼로트 장관은 다시 한번 연주를 떠올리는지 감탄하며 말했다.
“다시 칭찬하겠네. 정말 인상적인 연주였네. 무대에도 똑같이 올릴 건가?”
“아뇨.”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젓고는 보다 확실하게 대답했다.
“더 완벽하게 하겠습니다.”
“하하하, 좋은 대답일세.”
프세볼로트 장관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에르네스트는 오늘 있었던 실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프세볼로트 장관은 모든 것이 흡족한 듯 보였다. 기쁜 목소리로 그가 이어 말했다.
“작곡도 정말 기대 중이고…… 자네를 타티아나 양과 함께 추천하길 정말 잘한 것 같군.”
“……그건 들었습니다. 장관님께서 추천해 주셨다고.”
“그래, 지난겨울 이후로 계속 두 사람을 주역으로 세운 연주회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었거든.”
에르네스트가 두각을 막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부터 프세볼로트 장관은 여러모로 많은 도움과 기회를 주곤 했다. 그가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타티아나와 했었던 듀엣이 눈에 확 들어온 모양이다.
그때 타티아나는 확실히 에르네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의 예술적 기반 전반을 눈여겨보고 그 진흥을 목표로 하는 문화부 장관으로서 이 두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구세프와 처음 이 연주회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는 프세볼로트 장관이 그리는 그림이 바로 자신과 타티아나를 맨 앞에 내세우는 것임을 알았다.
다만 에르네스트에겐 그가 그리는 또 다른 그림이 있었을 뿐이다. 그는 조용히 노년의 권력자를 바라보았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가볍게 웃었다.
“아, 혹시 오해하진 말게. 아까 내린 결정은 이전 내 기획을 그대로 하겠다는 고집이 아니라 오늘 연주만을 보고 내린 것이었으니까.”
프세볼로트 장관은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 두 사람을 편애해서 밀어주려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다 분명히 하고 싶어 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과 포텐셜을 기반으로 연주회에 추천한 것과, 대결 결과를 놓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그 구분에 대해 이견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해가 빨라서 좋다는 듯 웃던 프세볼로트 장관은 잠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더니, 다른 한 피아니스트도 언급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양 말일세.”
칭찬을 하지 않을까?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예상했다.
오늘 아나스타샤가 보여준 피아노 연주는 정말 엄청난 음악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더라도 네 명의 다른 현악 주자들은 아나스타샤를 주역으로 밀고 있었다. 그 정도로 그녀의 연주엔 가치와 힘이 있었다.
프세볼로트 장관 역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때문에 지금 나올 것은 칭찬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예상과는 약간 달랐다.
“역시 자네가 추천한 인물답더군.”
“?”
에르네스트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굳어 있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보다 확실하게 아나스타샤에 대한 감상을 전했다.
“자네 세대에서 돋보일 만한 피아니스트로는 타티아나 양뿐이라 생각했었는데, 한 명이 더 있었어. 오늘 확실히 내게 인식되었네. 앞으론 그녀도 신경 쓰도록 하지.”
마치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그런 원석을 캐내어 보여 준 에르네스트에게도 공이 있다고 생각하며 칭찬하는 어투였다.
에르네스트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그게 아니라…….”
“뭐지?”
“제가 추천했다니, 무슨 말씀이시죠?”
직접적으로 아나스타샤를 연주회에 추천한 건 구세프였다. 그 과정에서 분명 구세프는 중앙음악학교 선생의 입장에서 아나스타샤의 이름을 거론했을 것이다.
거기에 에르네스트의 이야기가 나올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모르쇠로 물어보았으나, 프세볼로트 장관에겐 노련한 통찰력이 있었다.
“아닌가? 난 자네가 추천했다고 생각했는데. 에르네스트 군.”
“구세프 선생님께서 추천하셨을 겁니다.”
“물론 그가 말했지. 선생은 자네 이름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고. 하지만 처음 추천한 건 자네 아닌가?”
에르네스트는 당황한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재차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이 안 되니까.”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어투였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에르네스트의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천천히 설명했다.
“난 구세프 선생이 자네에게 얼마나 걸고 있는 게 많은지 잘 아네. 그리고 거기에 한 명 더한다면 타티아나 양뿐이겠지. 그 부분에 있어서 나와 선생은 의견이 같은 듯해.”
때문에 프세볼로트 장관은 이 연주회의 주역을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로 추천했다. 에르네스트는 그 구도에 찬성하지 않았고 시간을 더 필요로 했기에 구세프에게 부탁하여 아나스타샤를 추천할 수 있게 하였고.
그 과정을 프세볼로트 장관이 알 수는 없겠지만, 오래 전부터 구세프라는 사람을 알아온 그는 의아함을 느낀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아이의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 뭔가? 나중에 알아봐도 이렇다 할 특별함은 없는 것 같았고……. 그럼 올해 포트워스 콩쿠르 우승자라는 이력 때문에 구세프의 눈에 띈 걸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분명한 어조로 프세볼로트 장관이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친구들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았거든. 자네 아니면 타티아나 양. 그리고 오늘 본 바로는 둘 중 한 명이라면 바로 자네뿐이야.”
“…….”
“심지어 피아니스트 세 명이 다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있게 특별한 곡을 작곡하는 중이기도 하고 말이지.”
할 만한 변명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외통수였다. 이렇게 듣고 보니 에르네스트는 정말 바보 같은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프세볼로트는 친구를 추천한 일에 대해서 그리 질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만일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평범하거나 수준 이하였다면 아마 이 자리에서 에르네스트가 책임을 져야 했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실력으로 좌중을 틀어쥐었던 것 덕분에 프세볼로트는 그 추천이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연주자는 어디서든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인정받는 법이다.
“그런데 말일세, 에르네스트 군.”
하지만 프세볼로트는 아나스타샤가 합당한 실력으로 여기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무언가 걱정하는 듯 보였다.
한동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며 말을 고르던 프세볼로트 장관은 이윽고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말씀하시죠.”
“…….”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꿋꿋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프세볼로트 장관은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연주 중에 아나스타샤 양을 본 적이 있나?”
만약 혼자 연주 중이었다면 청중들을 잠깐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와 함께 연주하느라 소리에 집중을 더 기울여야만 했다. 한 번도 그쪽엔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못 봤습니다. 집중하느라.”
“……알겠네.”
“그 애가…… 어땠습니까?”
듣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반드시 들어야 할 것 같단 직감도 동시에 들었다. 뭔가 어지러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프세볼로트 장관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듯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아닐세. 그건 내가 할 말이 아니지.”
자세한 건 직접 이야기하라는 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답답함을 느꼈지만 지금까지 아나스타샤와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자신의 등을 떠미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자 프세볼로트 장관은 짧게 말했다.
“아무튼, 한 가지만 조언하자면 연주회에 이런저런 사사로운 이유를 넣는 건 피하는 게 좋네.”
너무 당연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말.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 말이 오랜 시간 세상을 봐 오며 얻어 낸 지혜의 일부임을 느꼈다.
그리고 이 한마디로 타티아나와 함께 추천된 것 또한 사사로운 이유가 아니라 보다 큰 대의를 위한 일임을 깨달았다.
프세볼로트 장관이 손을 털며 쓰게 웃었다.
“잘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봐 온 바로는 그랬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도 경력이 꽤 있는 피아니스트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진 알겠지.”
알고 있다고 해서 올곧게 그리하긴 어려운 일이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이 연주회에 사사로운 이유를 너무 많이 집어넣고 있었다.
그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프세볼로트 장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연주자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만이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흠…… 다음엔 홀에서 보세. 에르네스트 군.”
“알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프세볼로트 장관은 먼저 밖으로 나갔고, 에르네스트는 잠시 그 뒤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몇 번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늘 칭찬만 받고 넘어가서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때문에 한편으론 약간 쉽게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프세볼로트 장관은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연주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지만 만약 그것이 지나쳐 연주회에 문제가 가거나 예술계에 흠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날카롭게 짚고 넘어갈 사람이었다.
그 연륜으로부터 비롯되는 듯한 통찰력과 판단력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부분이 있었다.
“…….”
무언가 시험당한 기분에 한숨을 내쉰 에르네스트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일단 아나스타샤를 끌어들인 것도 문제없이 잘 넘어간 것 같으니 이젠 정말 연주회만 잘 준비하면 될 일이다. 물론 앞으로 할 일이 많겠지만, 늘 했었던 일을 이어 한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가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한 발을 내디뎠다.
“에르네스트.”
그런데 복도로 나오자마자 뒤편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갑게 목 뒤에 와닿는 소리에 머리가 얼어붙는다.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돌리자 아나스타샤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목소리보다 훨씬 차갑고 매서웠다. 에르네스트는 방금 프세볼로트 장관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잘 해결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