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5화
어디서부터 들은 거지? 설마 전부 다? 혹시 심각하게 오해할 만한 말이 오가진 않았나?
에르네스트는 방금 전 프세볼로트 장관과 나누었던 대화를 빠르게 되짚어 보면서 무언가 문제가 있진 않았는지 떠올렸다.
아나스타샤에 관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전부 칭찬이었다. 장관은 그녀를 앞으로 눈여겨보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건 연주자로서 꽤 괜찮은 이야기다. 실력만 보장된다면 여러 활동이 가능해질 테니까.
그러나 지금 아나스타샤는 칭찬을 들은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엔 차마 숨기지 못한 실망과 분노, 배신감 등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상황 판단을 하려는 사이,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니야.”
태연한 목소리가 휙 찌르고 들어온다.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화장실 옆의 벽면을 손등으로 툭 쳤다.
“벽이 울리더라고.”
“…….”
“건물 설계를 잘못한 것 같아.”
그녀는 입으로 지금 위한 이 장소의 설계를 말하고 있었지만, 에르네스트에게는 그 속뜻이 이 상황의 설계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다.
혹시라도 못 알아들었을까 싶었는지 아나스타샤는 쐐기처럼 질문을 꽂아 넣었다.
“나한테 잘못한 거 없니?”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지켜야 할 불문율은 존재했다. 특히 서로를 잘 안다면 더더욱.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분명 모든 사실을 알고 나면 아나스타샤가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고 분노할 것이라는 걸 인지하면서도 이렇게 상황을 만들었다.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고 언젠가 칼을 갈아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단 이 방법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했기에.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결정이 바뀔 것 같진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정말 지독한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짧게 말했다.
“잘 하려고 했었어.”
“오, 그러니?”
아나스타샤는 별 재미있는 사람 다 보겠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가 사이에 끼어들면서 에르네스트는 그녀와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그녀는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잠시간 침묵으로 대치가 이어지고,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물을 마시러 나왔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지나쳐 들어가기도 했다.
아직 연주회 회의는 끝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무언가를 놓고 저울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윽고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
화가 날수록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차갑게 침착해지는 사람이 있다. 아나스타샤는 전적으로 후자였다.
그러니 지금 그녀가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것에 대해 에르네스트는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먼저 성큼 발걸음을 옮긴 아나스타샤를 따라 걸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이라도 당장 붙잡고 사과하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 들었지만, 가까스로 눌러 참았다.
그건 아나스타샤에게 대한 예의도 아니고 상황에 도움도 안 된다. 그리고 쉽게 사과할 일이라면 애초에 벌이지도 않았다.
“…….”
연습실로 다시 들어서자 몇몇 사람들이 돌아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열엔 타티아나가 스마트폰의 화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던 그녀는 시야에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들어오자 반색하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나스타샤, 예카테리나가 사진을 보내왔어요.”
“오, 정말?”
“예. 여기 보세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로서 예카테리나는 인터뷰와 음반 녹음, 연주회 등으로 정말 바쁜 일정을 보내왔다. 그러나 지금부턴 더더욱 바빠질 예정이었다.
전세계 투어 연주회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수상자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 연주회였다. 가을부터 시작하는 이 투어 때문에 그녀는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것 같았다.
본래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와 어깨를 붙이고 앉아 사진을 보며 웃었다.
“진짜 좋겠다.”
“그렇죠? 후후, 예카테리나가 이렇게 잘되어서 정말 기뻐요.”
그저 부럽다는 투의 아나스타샤와 달리 타티아나의 심경은 조금 더 깊고 복잡한 것 같았다.
그녀가 예카테리나를 직접 가르친 건 아니지만 마치 제자 한 명을 세계로 떠나보낸 듯한 느낌.
타티아나는 심지어 예카테리나보다 어리기까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해도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가 않았다.
그녀는 즐겁게 화면을 슥슥 넘기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그리고 에르네스트도 이번 연주회는 물론이고 콩쿠르에서도 잘되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그랬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출한 적이 드물었다.
음악적으로는 확실한 고집이 있었지만, 정작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부연 가치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감각이 부족하여 텅 빈 소리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타티아나가 항상 사회적으로 잘되길 바란다고 직접적인 말을 하는 것은 주변인이나 친구들뿐이었다.
바로 옆에서 함께 달리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한 발자국 멀리 떨어져 있는 듯. 타티아나는 그렇게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요즘은 조심스레 살짝 더 가까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녀가 고수하는 기준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런 타티아나에게 아나스타샤는 확실히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보였다.
“타티아나.”
“예?”
“혹시 있잖아, 나랑 연주회 같이 하고 싶어서 네가 장관님께 말씀드리거나…… 그랬니?”
지금까진 한 번도 없었던 직설적인 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의심하는 것 같은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했으나, 지금 분명히 해 놓을 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그 질문에 깜짝 놀란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처음 안 표정이다.
“아뇨?”
“그래?”
“예. 전 제가 초청되었다는 것을 듣고 나서 며칠쯤 후에 아나스타샤도 함께 참가한다는 이야기를 추가로 들었을 뿐이에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타티아나는 이어서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궁리하는 듯했다.
“저기…… 아나스타샤. 실망하신 것 아니죠?”
“어? 아니?”
타티아나는 평소 느긋하게 사람들을 대하지만 눈치가 꽤 빠른 편이다. 아나스타샤의 침착한 태도 뒤에는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 정도는 금방 알아본 듯했다.
거기에 그녀가 했던 질문까지 합쳐서 결론을 낸 듯했다.
“아나스타샤와 같이 연주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번 연주회는 내년 봄까지 일정이 빡빡한 걸 알면서도 같이 하자고 하기엔 너무 시간도 촉박하고 부담감도 심한 연주회라서…… 가볍게 제안드릴 수가 없었어요.”
그 결론은 과녁에서 꽤나 많이 빗나가 있었지만, 그럴싸한 추리이긴 했다.
아나스타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친구가 연주회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고 해서 섭섭해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았다.
되레 말도 않고 참가시킨 것에 대해 지금 굉장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빙그레 웃으며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아나스타샤가 오롯한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서 주목받길 원해요.”
“응?”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 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아나스타샤가 이곳에 함께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타티아나는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후후, 아마 포트워스에서의 활약이 각광을 받았을 거예요. 그리고 이번에도 너무 멋진 퀸텟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 주셨고요. 내년이 지나고 나면 훨씬 많은 활동을 하실 수 있게 되겠죠?”
“……그런가?”
“활동 많이 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쇼팽 콩쿠르에 출전하기 전에 포트워스에 가셨던 것이 그 일환이라 전 생각했는데…….”
아나스타샤는 슬럼프를 겪으며 콩쿠르나 연주회 등의 활동을 하나도 안 하고 지낸 기간이 꽤 길다.
이제 슬럼프에선 벗어났으니 그동안 못 한 만큼 잔뜩 경력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욕심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타티아나는 분명히 아나스타샤라는 피아노 연주자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가볍게 동의했다.
“아니, 맞아. 앞으로도 이것저것 많이 하려고.”
“모쪼록 많이 해 주세요.”
아나스타샤가 연주자로서 의욕을 보인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타티아나가 말했다.
이번에도 친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가 싶었는데, 그녀는 환한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그 옆엔 저도 있을 거예요.”
그 말에선 타티아나의 의욕도 비춰졌다.
아나스타샤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타티아나를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하여 무대에 올라 연주자가 되고, 또 앞으로도 좋은 일들을 함께 겪고 싶다는 그 순수한 목소리는 마치 미래에 대한 예언처럼 어떠한 이유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고 뇌리에 틀어박혔다.
잠시 그대로 굳어 있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가슴 속 어딘가에서부터 나오는 듯한 웃음을 입으로 내었다.
“아하하, 알았어. 타티아나. 알았어.”
“가, 갑자기 왜 그러시나요? 아나스타샤.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
아나스타샤는 복잡한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타티아나는 걱정이 되는지 고개를 틀어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옆을 보며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
대신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분노와 슬픔을 양손에 쥐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회의는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앞서 한 리허설도 좋았고, 그것으로 다시 한번 서로의 실력을 확실하게 알아본 연주자들 사이엔 모종의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대로 무대로 향하는 동료들이라는 확신이 깃든 것이다.
열정적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에르네스트는 공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사적으론 다른 생각을 했다.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였다.
회의가 끝나고 다음 집합 날짜를 정한 뒤 모두들 인사를 나누고 흩어졌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 저물어 있었다.
평소와 그대로라면 타티아나가 빅토르를 호출해서 다 같이 차에 타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스마트폰을 들기 직전, 아나스타샤가 그녀를 불렀다.
“오늘은 우리 둘이 따로 돌아갈게. 타티아나.”
“?”
막 전화를 하려던 타티아나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에르네스트도 번갈아 바라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없었던 일정이 갑자기 생기니 타티아나로선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의 기류가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 정도는 타티아나도 느끼고 있을 터.
그녀는 방해할 생각은 없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가실 약속이라도 있으시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잠깐 이야기 좀 하려고.”
“이야기……?”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불안해졌는지 타티아나는 재차 파고든다.
“혹시…… 제가 들어선 안 될 이야기일까요?”
“그냥 나랑 에르네스트 사이의 일이라서.”
“…….”
적당한 핑계로 구슬려서 타티아나를 돌려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나스타샤는 묘하게 타티아나에겐 거짓말을 정말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곤 했다.
타티아나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참견에 거침이 없는 성격이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하셨죠? 그럼 저도 기다릴게요.”
“타티아나. 이건…….”
“안 되나요?”
이미 그냥 돌려보내긴 글러 버린 것 같다.
차라리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냔 뜻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오늘 그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어. 그럼…… 저쪽으로 가자.”
차량을 호출하지 않고 세 사람은 길 건너에 있는 놀이터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기구들만 있는 놀이터는 조금 을씨년스러웠다. 가을 날씨는 선선함을 넘어 쌀쌀했다.
“안 춥겠어?”
“괜찮아요.”
타티아나는 정말 그대로 기다리겠다는 듯 놀이터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앉아서 지켜볼 수 있는 자리였다.
혹시라도 싸우지는 않을지 감시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자 에르네스트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해졌다.
아무리 짧게 이야기해도 지켜보는 그녀는 걱정하겠지. 상황이 뭐 이렇게 되었나 싶어 한숨을 쉬며 에르네스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네를 끼익거리고 있다가 그에게 말했다.
“한 바퀴만 걸으면서 이야기할까? 우리.”
놀이터 한 바퀴는 길지 않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도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