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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56화 (756/1,277)

##  756화

어두운 놀이터엔 가로등만 몇 개 켜져 있었다.

그 흐릿한 불빛은 늦게까지 놀이터에서 놀 수 있도록 밝혀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구에 부딪히거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앞을 비춰 줄 뿐이다.

에르네스트는 그런 기구들이 없는 놀이터 외곽을 걸으면서도 잠시라도 방심하면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아나스타샤와 천천히 발걸음을 맞췄다.

놀이터 한 바퀴는 그리 길지 않다.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슬쩍 들더니 작게 말했다.

“좋은 날이네.”

가을 날씨는 선선함을 넘어 추워지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분위기도 좋았고…… 모두들 결과에 만족하더라.”

“…….”

“문화부 장관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이 정도의 리허설을 해냈으니 이제 연주회 당일까지 장애물은 모두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겠어.”

사실 방금 전 있었던 리허설은 여느 연주자들이건 난색을 표할 정도로 부담감이 막중한 리허설이었다.

자신의 순서를 걸고 대결을 하고 심지어 그걸 문화부 장관이 참관하여 결정을 내려 준다? 음악가로서의 자존심과 명예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자리마저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후회할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말처럼 모두가 만족한 최고의 결론이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문화부의 전적인 지원 아래에서 최고를 추구하기만 하면 된다. 장애물이라 할 건 전혀 없었다.

지금 이 상황만 해결한다면.

“…….”

천천히 걷던 아나스타샤는 가로등 아래에 서서 잠시 멈칫했다. 조금이라도 밝은 곳에서 묻고 싶다는 듯 그녀가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부디 진실만을 말해 달라는 눈빛이다. 에르네스트는 아무 말도 않았지만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기우뚱하게 서서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까…… 잘 모르겠네.”

“…….”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어.”

두루뭉술하게 모른 척하거나 회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아나스타샤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네가 날 이 연주회에 참가시켰니?”

에르네스트 역시 다른 말을 추가하지 않고 짧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그걸 알면 화를 낼 거라는 것도 알았어?”

“어느 정도는.”

“그래서 저번에 내가 몇 번 물어봤을 때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넘어갔고?”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

“내가 다 엎어 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야?”

빠르게 말을 주고받을수록 아나스타샤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양되어 갔다. 사용하는 단어 역시 위험수위까지 닿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평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진득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이렇게 된 건 그의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안하다는 말은 그야말로 그녀를 완전히 폭발시킬 기폭제가 되어 버릴 것이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나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주목하고 있는 지점을 파악하고는 조금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래. 오늘만 봐도 그렇지. 넌 중간에 돌아가지 않았잖아.”

프세볼로트 장관과 이야기하던 것을 들킨 건 회의 중간이었다. 아나스타샤가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돌아가 버렸다면 두 사람은 각자 정말 곤란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마지막까지 내색하지 않고 회의에 참석한 다음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대화를 걸어왔다.

어떻게 참가하게 되었든 간에 아나스타샤가 연주회를 던져 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프로 의식에 대한 신뢰로 한 말에 아나스타샤는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럴 걸 그랬네?”

“그렇게 말하지 마. 아나스타샤.”

삐딱하게 굴기 위함을 목적으로 했다간 이야기의 끝이 안 난다.

되도록 이 대화의 끝을 잘 수습하고 싶었던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건 곤두서 있는 아나스타샤의 신경을 더 건드리기엔 충분한 말이었다.

“……네가 지금 그렇게 잘난 척할 때야?”

아나스타샤는 이를 갈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 잘못이 더 심각한지 분명히 하고야 말겠다는 눈빛이었다.

“…….”

하지만 막 언성을 높이려던 그녀는 갑자기 옆을 휙 돌아보았다. 그곳엔 타티아나가 혼자 덩그러니 앉아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만 이야기하겠다고 하니 존중하겠단 뜻으로 찾아낸 타협점이 저렇게 멀리 앉아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앉아서도 불안해하는 모습이 만약 둘이서 싸우는 시늉이라도 한다면 바로 와선 말릴 것 같았다.

순식간에 힘이 빠졌는지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툭 떨구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싸워서 타티아나에게 밉보이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타티아나가 불안해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을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그 심정을 잘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

서로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가로등 불빛에서 빠져나와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서로의 모습이 흐릿해지자 자연스레 공격성도 옅어졌다. 아나스타샤는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난……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누군가 너희와 같이 날 세워 놓으면 괜찮아 보이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는 것쯤은. 아직 내 이력만으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 정도는 알아.”

“아나스타샤.”

“하지만 말야…….”

어떤 연주회든 주최가 있고 기획이 있다. 연주자는 늘 콩쿠르를 통해 정해지지 않고 특정한 목적에 따라 스카우트된다.

그 기준이 반드시 실력일 이유는 없었다. 타협 없이 실력만을 본다면 어린 연주자들이 설 자리는 늘 없을 테니까.

아나스타샤 역시 그러한 구조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주최나 기획이 목적을 따지는 것과 가까이에 있는 친구가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은 그녀로선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가져온다.

“그 누군가가 너나 타티아나 둘 중 한 명은 아니리라 믿었어. 너희는 그따위 이유로 날 낮잡아 보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믿음이 절반은 옳았지.”

“…….”

“타티아나만은 날 모욕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나?”

회의 도중 타티아나는 아나스타샤가 오롯한 연주자로서 주목받길 원한다고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그건 엄격하면서도 친구에 대한 믿음이 있는 태도였다. 타티아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런 이야기를 잘 하곤 했다.

에르네스트도 평소엔 그런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거기엔 전혀 거짓이 없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상황으로 그는 신용을 완전히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이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의 화살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네가 날 이렇게까지 바보 취급할 줄은 몰랐어. 에르네스트.”

완전히 반대였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그녀가 뭘 어찌 하든 아무 상관 없었다면 이렇게 사서 고생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니 막막했다.

아직 아나스타샤가 직접 밝히지도 않은 사안을 억측으로 미리 깔아 뒀다간 더더욱 심한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여기서 그녀와의 관계가 더 악화되는 건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은 피상적이고 지당한 이야기로 반론하기로 했다.

“내가 널 추천하면 안 되는 거야?”

“?”

“네 실력 요즘 좋잖아. 열여섯 살에 알캉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전 세계를 놓고 봐도 찾기 힘들어. 그럼 내가 어디까지 찾아봐야 하는데?”

그건 누구에게 물어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다른 건 아직 깊게 파고들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속도와 테크닉 부분에서 아나스타샤는 이미 프로들과 비견해도 될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었다.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음악성에 대한 부분이 아니니 이건 객관적인 평가다.

그런 대단한 피아니스트를 연주회에 추천하는 건 누가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아나스타샤는 그 논리에 잠시 넘어가는 것 같더니, 곧 빠릿하게 인상을 쓰며 반박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처럼 속이려 하지 마. 셋 이상의 피아니스트가 필요했었니? 정말로?”

“적어도 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왜?”

“그야 나와 타티아나만 무대에 오르면…….”

에르네스트는 순간 말을 끊었다.

아나스타샤의 태도는 일관적이면서도 복잡했다. 그녀는 친구인 타티아나를 굉장히 과보호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에르네스트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방해를 하진 않았다. 되레 가끔은 떨어져 있을 때 전화로 불러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도와주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어떠한 저울 위에 서로를 올려놓고, 어느 한쪽이 도망가는 건 안 된다는 듯한 태도.

에르네스트는 거기에 되도록 협조해 주었고, 이번엔 반대로 아나스타샤를 끌어내어 같은 곳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게 되니 더 이상은 말을 바깥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떠한 추측을 완전히 배제하고 스쳐 지나가는 듯한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넌 내가 타티아나와 둘이서만 무대를 하길 원했던 거야?”

아나스타샤가 슥 고개를 돌렸다. 농담인지, 아니면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말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 듯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대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아나스타샤를 앞지르며 말했다.

“그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오늘 했었던 리허설과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지 않았어?”

“…….”

“네가 말했듯 결과도 좋았고. 앞으로도 우린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이 연주회의 결과로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뿐이었다. 관계성에 이름을 새로 짓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하고 싶었다.

등 뒤에 있는 아나스타샤가 이해해 주길 바라며 에르네스트는 덧붙였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돼.”

하지만 입 밖으로 뱉고 나서야 말실수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섞인 거짓의 안개가 말에 혼선을 준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빠르게 다시 이어 말하려는 순간, 아나스타샤의 대화의 흐름을 낚아챘다. 맹수 같은 솜씨였다.

“네가 오늘 헷갈리고도 그냥 넘어갔던 그 연주처럼 말이니?”

“……너 그것도 알았어?”

“알겠던걸?”

말문이 막힌 에르네스트가 침묵하자 아나스타샤가 재차 물었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지. 그래서 넌 마냥 기뻤니?”

리허설 중 벌어진 끔찍한 실수. 하지만 타티아나가 도와준 덕에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기쁨뿐만이 아니라 지독한 창피함도 동시에 느꼈다.

입장을 바꾸어 완전히 자승자박한 꼴이었다. 그도 말주변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굉장히 강적이었다.

그러나 딱 한 번의 반론으로 에르네스트를 침묵시켜 버린 아나스타샤는 지금부터 즐기면서 그를 가지고 놀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한 말 하고 싶어. 진짜로. 아주 심한 말.”

“해도 돼.”

“싫어. 타티아나가 저기 있잖아.”

“…….”

왔다 갔다 하는 이상한 말. 그러나 지금 그것이 아나스타샤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거리였고 에르네스트는 무슨 말을 듣든 누군가에게 옮길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아나스타샤는 타티아나가 시야에 들어오는 공간 안에선 되도록 제정신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가책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나스타샤…… 네가 왜 화가 났는진 알겠어. 쓸데없는 소리는 안 할게.”

지금 자존심이란 단어를 꺼내면 안 된다. 아나스타샤는 단순히 자존심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에르네스트에겐 미안하단 말과 더불어 여러 단어들이 제약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은 몇 가지 단어들을 꺼내어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 내가 널 낮잡아 보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거짓 없이 진심으로 한 이야기였다. 아나스타샤가 되물었다.

“정말?”

그러나 에르네스트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그가 생각도 못 했던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내가 남자애였어도 과연 네가 그랬을까?”

“……뭐?”

“아니었겠지?”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가 아는 다른 누군가를 아나스타샤와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하더라도 추천은 안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아나스타샤는 끌어들이고 피아노 곡까지 만들어서 합주를 하려 했던 걸까.

에르네스트는 그것이 다 그녀를 일단 동등한 무대에 올려놓기 위한 일환이라 생각해 왔다.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가 생각도 못 한 이유를 내놓았다.

“넌 날 우습게 보고 있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그 즉시 반론하지 못했다.

오해라고 설명한 것을 아나스타샤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지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갑작스레 엄습해왔다.

그 불안에 집어삼켜지기 전 에르네스트는 가까스로 마지막 목소리를 꺼내었다.

“그러니까 아니라고 했…….”

“한 바퀴 다 왔네.”

아나스타샤는 그 목소리를 가차 없이 짓눌러 버렸다. 애초에 한 바퀴라 정했으니 한 바퀴만 돈다. 변명은 듣지 않는다.

앉아 있는 타티아나와 서로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에르네스트는 점점 더 표정 관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당혹스러움이 커서 힘들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언제 폭발 직전까지 갔었냐는 듯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목소리까지 바뀌어 있었다.

“네 말대로 모두 잘 될 것 같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

“잘 해야겠지?”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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