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7화
멀리서 볼 때도 쭉 지켜보고 있던 타티아나는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던 척을 했다.
그게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했던 그녀로선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듯하다.
두 사람은 큰 소리를 내거나 하지 않고 그저 놀이터를 한 바퀴 돌며 이야기를 했을 뿐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타티아나가 스마트폰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아나스타샤.”
하지만 태연한 눈빛엔 여전히 약간의 불안감이 머물러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묻지도 않은 이실직고를 해 왔다.
“사실 아까 전에 있잖아요? 제가 조금 연주에 혼선을 준 것 같아요.”
“……응?”
“헝가리 광시곡 2번 말이에요.”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타티아나는 두 사람이 놀이터를 돌며 이야기했던 게 바로 이 부분 아니냐는 듯 조금 더 빠르게 말했다.
“제가 먼저 욕심을 조금 더 부려서 화성을 넓게 썼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혼동한 게 아닐까 싶어요. 어지간해선 속지 않으시더니, 이번엔 속으셨네요. 그렇죠? 에르네스트?”
빨리 일단 도와줄 테니 덮어 놓고 동조해 달라는 눈빛이 휙 와닿는다. 에르네스트는 그 정도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번엔 그녀의 기대를 저버렸다.
“무슨 소리야. 그냥 나 혼자 헷갈렸던 건데.”
“아, 정말!”
혼자 바보가 된 타티아나는 답답한지 그를 흘겨보며 핀잔을 주었다.
“협조 좀 해 주세요. 덜 혼나게 도와 드리려는데.”
“……이미 놀이터 한 바퀴 돌면서 실컷 혼났는데?”
“아…… 늦었나요?”
듣고 보니 그렇다는 듯 멍하니 그런 소리를 하는데 에르네스트는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
분명 이야기의 앞뒤도 생각 않고 연주 중에 자신의 과실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 낼 생각만 계속 했던 것 같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는다. 더군다나 상대는 거짓을 간파하는 데에 능한 아나스타샤였다.
타티아나는 어림도 없는 승부를 걸었다는 걸 느꼈는지 긴장한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아나스타샤는 방금 전 있었던 대화를 어떻게 전할지 생각하는지 잠시 말을 멎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상관없었다.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실리적인 면도 있는 타티아나가 어떻게 반응할진 모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살짝만 방향을 튼다면 비난의 늪으로 에르네스트를 끌고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에르네스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상황을 쉽게 조종할 수 있음에도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별로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 안 했어.”
“그런가요? 전 불안해서…….”
“정말 별것 아닌 걸? 그러니까 나한테 애써 거짓말 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타티아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엔 울적한 진심이 분명히 묻어 있었다.
“부탁해도 되니?”
아나스타샤가 힘없이 웃으며 묻자 타티아나는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행동으로 대답했다.
***
회의가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루가 지나고 나서도 내 머릿속엔 자꾸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어두운 놀이터를 돌던 두 사람. 잠깐 멈춰 서기도 했지만 걸음을 늦추진 않아서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약간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음을 알 수 있었다.
난 그것이 실수를 하고도 대결에서 이기게 된 에르네스트를 아나스타샤가 지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걸 말릴 순 없었다. 두 사람의 입장 모두 타당했으니까.
드러나지 않은 실수를 뒤늦게 자기 입으로 말하여 사람들의 감상을 깎아 내리는 건 프로 연주자의 태도가 아니니 에르네스트는 침묵했고, 내가 아무리 잘 수습해 주었다 하더라도 그 불완전한 연주 자체를 알아본 아나스타샤는 그 사실을 지적 할 수 있었다.
다만 공개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여 평가를 바꾸는 것까지 하진 않고 그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한마디 정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난 두 입장을 모두 이해했지만 에르네스트 개인의 잘못이라 하여 그냥 알아서 해결하도록 두고 나 혼자 집으로 와 버릴 수도 없는 일이라서, 파트너로서 앉아서 잠깐 기다렸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 내 예상과 다른 이야기가 오갔을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어떤 이야기였던 걸까…….’
정말 놀이터를 한 바퀴만 돌고 돌아온 두 사람은 내겐 별것 아니라는 투로 설명을 대충 마쳤다. 내가 살짝 중재하려고 했던 건 자연스레 비껴나 버렸다.
리허설 도중의 실수가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두 사람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게 한 것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궁금증은 밤늦게까지 날 괴롭혔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
수업을 마치고. 난 책들을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뭔가 확인하는지 교과서를 보며 펜을 휙휙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언제 꺼냈는지도 모르게 오선지 위에 음표를 그려 나가고 있었다.
내가 종종 연주하고 싶은 선율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처럼, 그 역시 악보에 옮기고 싶은 선율이 수업 중에 생각난 모양이다.
둘 다 방해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니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펜을 놓았다. 그때를 기다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발렌티나가 먼저 제안했다.
“다 했어? 그럼 점심 먹으러 가자!”
평소 같았으면 오늘 메뉴는 뭐냐고 물었을 아나스타샤였지만, 오늘따라 그녀는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밥 생각도 없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아픈 거 아냐.”
“그럼 그냥 죽을 때인가?”
“뭐라고?”
괜한 농담을 건넸다가 아나스타샤에게 팔을 붙잡힌 발렌티나는 악어에 물린 사람처럼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다.
두 사람이 그러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아나스타샤의 표정에 묘하게 그늘이 져 있는 것은 식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난 먼저 레슨실 갈게.”
“응? 벌써?”
점심시간은 아직 조금 남아 있었으므로 같이 이야기나 하고 쉬다가 오후 일정을 하러 가도 괜찮은데, 아나스타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일에 큰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아나스타샤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약간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레슨 잘 받고 오란 말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악보 빌리러 도서관에나 가야겠다. 둘 다 이따가 봐. 아니면 내일!”
발렌티나도 짤막한 인사를 남기곤 자신의 할 일을 향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나와 에르네스트였다. 우리에겐 공동으로 할 일이 주어져 있었다.
“연습 가시겠어요? 에르네스트.”
“그러자.”
레슨이 없는 날이면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자연스레 피아노가 두 대 있는 듀엣 연습실로 향했다.
자주 와서 이제 익숙해진 듀엣 연습실의 피아노는 의자 세팅을 따로 할 필요가 없도록 내 것과 에르네스트의 것이 정해져 있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각자 피아노에 앉은 우리는 건반 덮개를 열고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제 거기부터 할까요?”
“그럴까.”
“그래요.”
작곡가도 곡명도 시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먼저 연주를 시작했다. 손 풀기도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터져 나오는 시원스런 연주였다.
헝가리 광시곡 2번을 연주하면서 그가 파트를 실수했었던 부분이었다. 난 그 연주를 따라가다가, 정확한 순간에 에르네스트가 넘겨주는 바통을 받아서 이어 나갈 수 있었다.
“…….”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합주.
어제의 실수를 확인하고 피드백하는 데엔 단 10초면 충분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걸 왜 실수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듯 뚱한 얼굴로 피아노를 보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꽤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헝가리 광시곡 2번에 대한 연습을 이어 나갔다.
어제의 연주는 7:6으로 퀸텟의 연주를 이겼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지녔지만, 난 언제나 그 최대치를 높여나가길 지향하는 연주자였고, 에르네스트도 곡에 대한 욕심만큼은 많은 전문가였다.
우리의 연습은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효율적이고 적확했다.
서로 몇 마디의 말로 특정 프레이즈나 선율을 따와선 바로 피아노 위에 올린다.
진지하게 그 음악을 따져보고는 덧붙일 것은 덧붙이고 떼어낼 것은 떼어 낸다. 그 순간의 아티큘레이션과 음색의 변화 등을 난 모조리 기억에 새겼다.
그다음 다시 한번 정리가 끝난 합주를 해 보고 마음에 든다면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 과정의 반복이었다.
어제 실수를 10초 만에 돌아본 것처럼, 우리는 한 구간을 되짚어 보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겨우 30분 정도 지나자 우리의 음악은 바로 어제의 음악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있었다.
“잠깐 쉴까.”
“그래요.”
집중해서 연습하다 보니 조금 피로해졌다. 딱 5분 정도. 우린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쉬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쉴 땐 서로 농담을 하기도 하고 때론 말없이 스마트폰만 보고 있기도 하지만, 어떨 땐 각자 개인 곡을 연주해 보기도 한다.
난 원래 오늘 개인 곡을 연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말없이 노트를 꺼내 들여다보는 에르네스트를 보니 나도 모르게 건반으로 손이 향했다.
“……?”
에르네스트가 이쪽을 바라본다. 난 아랑곳 않고 연주를 지속했다.
오른손으로 건반을 번갈아 연타하다가, 양손으로 떨어뜨린다.
올리 머스토넨의 시엘루린투.
여름에 에르네스트가 내게 사 주었던 곡이었다.
짧은 현대곡이라 외우고 연주할 수 있게 되는 데엔 며칠 걸리지도 않았지만, 이 영혼을 나르는 새를 주제로 한 곡은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 깊게 들어와선 종종 연주하는 곡이 되어 있었다.
“…….”
포코 인퀴에토. 약간 불안하게 연주하라는 지시에 맞추어 정해진 선율을 연주하고 나면 작고 검은 새가 고개를 내민다.
나무와 나무를 오가고, 그 작은 몸집에도 위에서 인간을 내려다본다.
이 신비한 새의 모습을 소리로 화하여 허공에 흩뿌렸다. 특정한 형상 없이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는 그 모습은 신비하고 우아하다.
짧은 연주를 마치고 나자 에르네스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이거 그거지? 시엘루린투.”
“예. 맞아요.”
“정말 흥미가 있었나 보네.”
설마 정말로 내가 새 조각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난 농담하지 말라는 뜻으로 웃어 보였고 그 역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와 공유하고 있던 또 다른 곡을 연주함으로서 약간 분위기가 환기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 이렇게 천천히 풀어나간다면 어떤 일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휴식을 마치고, 우린 다시 연습을 재개했다.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이었지만 에르네스트가 조금 더 집중해서 조금 더 의욕적으로 임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최선을 다해서 그와 보폭을 맞추었다.
“슬슬 여기까지 할까.”
“그래요.”
그렇게 듀엣 연습을 마치고 나니 아나스타샤가 레슨을 마칠 시간이 되었다.
평소대로라면 아나스타샤도 레슨을 끝내자마자 이곳으로 오는 것이 약속처럼 되어 있었고, 우린 그대로 연습실을 바꾸어서 세 명의 피아노 연주자의 협주곡을 연습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시간이 되어서도 아나스타샤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 역시 같은 생각인지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연습실 문을 보고는 날 바라보았다. 난 그 대신 말했다.
“아나스타샤는 안 오는 걸까요?”
“아니, 올 거야.”
그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대로 오지 않진 않겠지.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리 이야기해 준 바도 없었다. 하지만 어제부터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거리며 내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참던 난 안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찾으러 가 볼까요?”
“……어디에 있는 줄 알고?”
그냥 전화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투였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교 어딘가엔 계시겠죠.”
에르네스트는 뭔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으나, 난 직접 찾는 것이 전화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