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8화
어제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 아나스타샤가 보여 주었던 표정. 하루가 지난 오늘도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던 모습.
그런 그녀가 신경 쓰여, 난 에르네스트와 그대로 아나스타샤의 오후 동선을 좇았다. 레슨실과 그녀가 자주 찾는 연습실, 스터디룸까지.
요 근래 연주회 연습 때문에 스터디룸엔 자주 오지 못했었는데, 다른 아이들 역시 바쁜 건 마찬가지였는지 스터디룸엔 리처드만 혼자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는 중이었다.
혹시 아나스타샤가 왔었느냐고 묻자 리처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왜?”
“찾고 있어서요.”
전화로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이렇게 무작정 찾아다니는 건 조금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 단지 난 직감에 의존해서 아나스타샤를 직접 찾아보고 싶을 뿐이었다.
리처드는 묘한 눈빛을 하더니 곧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애는 그렇게까지 변덕스럽진 않아. 그러니 천천히 찾아봐.”
그제야 나는 마음이 조금 급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닫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문가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날 따라와 주면서도 아무 말도 없었다.
뒤늦게 고맙단 뜻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니 에르네스트가 말했다.
“교실로 가 보자.”
“그럴까요.”
난 스터디룸에 혼자 남아 있는 리처드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지금까진 내 주도로 에르네스트를 끌고 다녔지만, 이번엔 에르네스트가 앞장서서 우리는 교실로 향했다.
교실엔 몇몇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레슨을 기다리거나 딱히 오후 일과가 없어서 잠시 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부분 저마다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고 있었는데, 홀로 떨어져 스마트폰을 보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었다. 창문을 통한 햇빛이 그 위로 떨어져 내린다. 아나스타샤였다.
“…….”
어쩐지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살금살금 다가갔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를 속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우리를 발견하더니, 살짝 놀란 얼굴로 황망해했다.
“연습은?”
“다 했어요.”
“아, 연습 끝나서 다시 교실로 온 거구나?”
어떤 때나 여유를 잃지 않는 평소 그녀답지 않다. 난 그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혹시 아나스타샤가 올까 싶어 잠시 기다렸는데, 안 오셔서요. 찾으러 왔어요.”
“어…… 연락하지 그랬니?”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전화나 메시지로 연락을 했다면 그녀는 교실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직접 찾으러 다닌 것 또한 그러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성실함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이유든 간에 혼자서 삭이고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이 이상 캐묻거나 하지 않고 적당히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불안함과 조급함이 내 입을 절로 움직였다.
“오늘 합주 연습은 안 가실 건가요?”
“응? 아니, 가야지. 갈 거야.”
뜨끔해하는 눈빛이 더더욱 내 직감에 확신을 더한다. 난 딱히 내색하지 않고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잠깐 뭣 좀 본다고 앉아 있었어. 별건 아니고…….”
뭔가 이유를 덧붙이려고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지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고민이 있어 보이는데 내게 말해 줄 것 같진 않다.
에르네스트와 관련된 문제라도 내가 들어 준다면 중재라도 해 줄 수 있을텐데, 아나스타샤는 그런 중재가 지금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모습에 나도 약간 무기력감을 느낄 즈음, 이대론 안 되겠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먼저 제안했다.
“지금 갈까? 난 괜찮은데.”
아나스타샤도 피아노 앞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난 그 옆에서 그녀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함께 학교를 빠져나온 우리는 늘 가는 외부 연습실로 향했다. 피아노 세 대는 우리를 기다리며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사실상 이런 세팅은 우리만 이용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연습실 주인이 정말 좋은 분이라 다행이었다.
우린 익숙하게 가방과 외투를 내려놓고는 각자 피아노 앞으로 향했다.
“…….”
모두 피아노 앞에 앉고 나니 지금까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있던 모두의 집중력이 비로소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연주자의 모습으로 고개를 든 아나스타샤가 먼저 물었다.
“에르네스트, 우리 저번에 한 곳에서 더 늘어났니 혹시?”
“조금.”
그는 여전히 작곡 중이었고 시간이 없는 우리는 그 뒤를 착실히 따라가는 중이었다. 새로운 프레이즈가 완성되었다면 바로 그것도 연습해 볼 참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완성은 안 되어 있으니까, 기존에 했었던 것 잠깐만 해 보고 가자. 오래 할 건 아니고.”
“응, 그래.”
두 사람이 태연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어제 놀이터에서 보았던 건 정말 별일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연주에 들어가서 보니 확실히 문제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저번에 했던 것과 똑같은 음악을 똑같이 연주했다. 분명 내 귀로 듣기에 내 연주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양측에서 들리는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의 선율엔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가 어떠한 연구에서 비롯된 확신에 찬 선율이라면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듣고 분석하며 따라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의 음악은 앞으로 튀어나와야 할 때도 섣불리 나오지 못하고 조심스러웠고, 아나스타샤의 음악에선 뜻하지 않은 감정의 격류가 느껴졌다.
그것도 특정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일관성이라도 느껴지겠는데,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음악을 따라잡는 건 귀가 밝은 나로서도 힘든 일이었다.
심지어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을 내밀다가 서로 닿을 때쯤이면 움츠러들며 다음 음악을 준비하곤 했다.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좋은 일이었으나, 길게 이어지지 않아 제대로 들리는 것이 없었다. 즉발적이며 복잡한 음악의 흐름이었다.
어지간해선 그 흐름을 붙잡아 정리해 보려 했다. 난 이런 상황에 즉흥적으로 대처하는 일 또한 꽤 자신 있어 하는 편이었으니.
하지만 실력으로는 이미 내 이상이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두 사람이 양옆에서 음악을 흔들어 버리자 나로서도 대처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결국 휩쓸리듯 간신히 실수만 하지 않고 연습을 마치고 나니,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지금껏 여러 번 합을 맞춰 보면서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글쎄.”
에르네스트는 작곡가이면서도 의도나 해석, 연주에 대한 딱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기술적인 문제는 아니야.”
애초에 그는 작곡할 때 나와 아나스타샤의 실력과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곡을 썼다.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곡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테크닉의 문제는 없다. 아니, 난 되레 테크닉들이 너무 뛰어나서 문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술에서의 색은 세 가지 색을 혼합해서 만든다. 이 곡 역시 그와 비슷했다.
에르네스트는 어느 한 피아노에 주도권을 온전히 주지 않고 균등한 색들을 세 피아노에 부여했다.
그리고 각자 선율의 비율을 조정하여 얽혀 나온 음악을 칠함으로서 다채로운 음악을 구사해 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 색의 최고점은 악보에서 허락하는 만큼 정해져 있기 마련이었는데, 연주자가 너무 뛰어나 버린 나머지 한 색이 너무 튀면 전체적인 색 배합이 망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난 그러한 문제점을 그대로 지적하려다가, 지금 음악을 놓고 평가하는 건 빙 둘러 이야기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어젯밤 있었던 두 사람의 대화에 있다.
이참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려는 차에, 아나스타샤가 마치 자수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엔 내 문제야. 내가 자제해야 할 부분도 너무 오버했던 것 같아. 미안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으려던 난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녀에게 그렇게 묻는 건 더욱 괴롭히는 일밖에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 내버려 둬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우선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해석을 하셨다면 저희가 맞춰 드리면…….”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내가 생각보다 조절이 잘 안 되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생각보다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답도 이미 알아서 내고 있었다.
“좀 쉬어야 할까 봐.”
짧은 한마디였지만, 난 그녀가 정말로 지쳐 있음을 느꼈다.
어디에서 기인한 피로함인진 말해 주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늘 요령 좋고 뭐든 잘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녀에게도 어려운 일은 분명 있는 것이다.
내가 오기 전 오래 슬럼프에 빠져 있기도 했던 것처럼.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에르네스트의 표정도 어둡긴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어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한계에 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제 연주 중에 실수를 할 정도로 제 컨디션이 아닌 모습이다.
“…….”
두 사람 다 너무 지쳐 있고 거기에 약간 내가 모르는 다툼도 있는 것 같다. 지쳐서 다퉜는지, 다퉈서 지쳤는지 그 순서는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둘 다 내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 텐데도, 이 가라앉는 분위기에 나까지 끼워 넣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느껴져 왔다.
그런데도 그걸 무시하고 내가 입을 열고 끼어들면 그건 두 사람을 무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막연한 불안감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자, 그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 연주회에 문제가 가게 하진 않을 테니 걱정 마. 그냥 주말 동안 쉰다는 이야기였어.”
“내일 주말이었죠…….”
“응. 그러니 합주 연습은 다음 주에 하자. 어때?”
다음 주면 괜찮아질까?
내가 지금 괜히 무언가 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며 기다리는 쪽이 나은 걸까.
지금까지 난 다른 사람들의 일에 여러 번 멋대로 참견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안 좋은 이야기를 듣더라도 내가 들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두 사람은 내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더더욱 공격적으로 될지도 모른다.
이 불안정한 균형 자체를 내가 깨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것 같고……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쉴 거야?”
“응.”
“그럼 이왕 쉬는 거 다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갈래? 어디 한적한 곳 가서.”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되레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섰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자 그는 안 그래도 제안하려고 했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 계속 모여선 연습만 했잖아. 잠깐 힐링하는 시간도 있어야지.”
“힐링……?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에르네스트.”
“요즘은 그런 게 중요하대. 스트레스도 풀고.”
그는 태연하게 이야기했지만 아나스타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만약 두 사람이 다툰 거라면 이렇게 뜬금없이 놀러 가자고 하는 건 정말 너무 성의 없는 말이었다. 난 아나스타샤의 말처럼 시간을 두는 쪽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주말 동안 개인 연습을 하면서 감정을 정돈하고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지금 가볍게 장난하듯 상황을 넘기려 하는 게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주말을 그냥 대화 없이 보내 버리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를 오래 봐 온 나는 그가 꽤나 필사적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런 에르네스트의 태도를 알아본 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목소리를 쉽게 누그러뜨리지 않고 물었다.
“이럴 때 놀러 가도 되겠어?”
우린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여기 있는 누구보다 에르네스트에겐 더더욱 시간이 없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이야기했다.
“난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넌 어때? 싫어?”
“…….”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난 둘 중 한 명을 따르자면 아나스타샤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주말 동안 각자 시간을 보내고 다음 주에 만나서 이야기하기. 그건 내가 지금까지 문제들을 처리했던 것과도 비슷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내가 그렇게 혼자 침잠해 들어갈 때마다 손을 뻗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 있게 일을 해결하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진다. 그런 게 어른스러운 방식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했다.
때문에 처음 아나스타샤 쪽으로 향했던 저울추는 서서히 에르네스트의 쪽으로 기울었다.
갑자기 놀러 가잔 이야기는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가 무언가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어 한다는 건 분명히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아나스타샤가 이윽고 대답했다. 그러나 거기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좋아. 그러자. 하지만 어디로 갈진 내가 정할 거야. 비용도 내가 내고.”
“……뭐? 왜?”
“이번엔 내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
갑자기 이야기의 주도권이 에르네스트에서 아나스타샤 쪽으로 휙 넘어갔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