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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59화 (759/1,277)

##  759화

갑자기 주말 약속이 생겨 버렸다.

물론 놀러 다녀도 될 정도로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었다. 주말이야말로 각자 모자란 부분들을 체크하고 준비해야 하는 때였다.

하지만 그 준비의 일환으로 기분 전환도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

목표만 보고 달려가는 것도 좋지만 난 주변 친구들이 지쳐 간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아 버렸다.

그나마 에르네스트의 상황은 조금 일찍 눈치챘지만, 난 그가 온전한 역량을 발휘하는 데에 혹여나 방해가 될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끼어들어서 억지로 쉬게 한다거나 하는 방법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방해받지 않는 그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바로 이 상황이다.

에르네스트는 집중력을 잃고 중요한 리허설에서 실수를 하기도 했고, 평소 날카롭긴 해도 여유를 잃지 않던 아나스타샤도 약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선 과자 한 조각만 놓고도 싸움이 벌어지는 법이다.

“…….”

두 사람 사이가 삭막해질 걸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내게도 책임이 있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 사이에서 말리고, 진즉 쉴 땐 쉬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어야 했던 건데.

애초에 나부터가 직업병처럼 음악밖에 보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 같다.

‘지금이라도…….’

합주의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문제가 있는 지금, 곧 있을 연주회를 이유로 둔다면 빨리 해결해야 함이 옳겠지.

하지만 난 연주회를 차치하고서라도 두 사람이 다시 여유를 되찾고 이전처럼 진지하면서도 배려할 수 있는 관계로 돌아가길 바랐다.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는진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일이라 생각해서 내겐 잘 설명해 주지도 않으니까. 그래도 분명 가까이에 있으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

차를 타고 프리스넨스키로 향하는 내내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는 것은 계속 안 좋은 생각만 불러일으키기에 난 쓸데없는 상상을 자중하는 편이다. 우울한 건 이제 싫다.

그 대신 평범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만 했다. 같이 무엇을 하더라도 열심히 참가하고, 만약 두 사람이 날 찾으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는 것 정도였다.

전날 있었던 일에 대한 긴장과 두 사람과 놀러 간다는 것에 대한 기쁨 등은 애매하게 얽히며 중화되었고, 결론적으로 날 침착하게 만들어 주었다.

차가 멈추어 섰고, 대로에서 기다리던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손을 흔들었다.

“타세요, 두 분.”

“응.”

에르네스트는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폴로 셔츠와 재킷을 걸쳤다. 그 옆에 서 있는 아나스타샤는 팔이 긴 스웨트셔츠에 조끼, 그리고 바지 차림이었다.

아웃도어 활동을 할 테니 편한 복장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도 바지를 입고 왔지만 이렇게 옷만 봐선 뭘 하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차에 오르며 앞좌석의 소로킨과 빅토르에게 인사하고, 내게도 감사를 건넸다.

“오늘도 고마워.”

“별말씀을요.”

오늘은 모든 일정을 아나스타샤가 기획하면서 원래는 이동 또한 그녀의 아버지가 도와주시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예고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아직까지 내가 다른 차량에 타는 걸 불안해하시는 모습이 보여서 어쩔 수 없이 이동만큼은 우리 차를 쓰는 것으로 정했다.

아나스타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빠는 오늘 우리 데려다주지 못한 걸로 좀 아쉬워하시더라.”

전에 뵈었던 그녀의 아버지, 세르게이 예브네비치는 딸의 친구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도 즐겨 하시는 분이었다.

야외 활동도 즐겨 하신다고 들었으니 아마 이런 도움을 주시는 것도 귀찮다 생각하지 않고 기껍게 여기실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어쩔 수 없었지만.

난 가볍게 웃으며 그녀에게 대신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 집 방침이라…….”

“그게 아니라, 그냥 우리는 핑계고 아빠 본인이 가서 쉬고 싶었던 것 같아.”

“그, 그런가요?”

어정쩡하게 대답하니 아나스타샤는 분명히 그럴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게 뭐 잘못된 것인가 싶긴 하다. 아버지들도 쉬고 싶을 때가 있으실 테니.

난 오늘도 회사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며 꽤 오랫동안 가족끼리 활동이 드물었음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본인께선 늘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계시고 내가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길 바라는 분이셨다. 그쪽이 내게 보다 도움이 되리라 여기시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서 진지한 애정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아버지가 죄의식을 지니고 있음 또한 느꼈다. 특히 올 겨울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는 더더욱.

루슬란 오빠도 그렇고, 언젠가 한 번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멀어지진 않겠지만, 손을 뻗어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만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저편에 있던 에르네스트가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그건 미리 빅토르에게 부탁했어.”

“그러니까 어디냐고.”

“말 안 해 줄래.”

“…….”

언제나처럼 주고받는 말들이지만, 난 이런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 불안해졌다.

정말 장난이거나, 아니면 감정이 있어서 나오는 말. 혹은 둘 모두가 혼합된 무언가. 무엇인진 몰라도 내버려 두면 점점 커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말의 책임을 느끼는 나는 이번엔 관망하지 않고 살짝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 저도 궁금해서 그래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미리 알려 주셔야 마음의 준비를 하죠.”

“무슨 마음의 준비까지 하니……?”

“그게…… 모르잖아요? 갑자기 번지점프라도 하자고 할지.”

정말 모른다.

모든 스포츠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아나스타샤가 과연 아웃도어 활동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난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번지점프는 갑자기 나온 이야기이지만 상당히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아나스타샤와 정반대로 모든 운동에 재능이 없는 날 데리고 무언가 하려면 시작부터 벽에 막힐 테니까.

그런데 번지점프는 그냥 발에 줄을 매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되니까…… 아마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쭈뼛 설 것 같은 감각에 어깨를 옹송그리고 있자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하자고 하면 할 거야?”

“……해야죠?”

“안 해도 되는데?”

진짜 번지점프인가?

평소 같았으면 지금이라도 바꾸자고 했겠지만, 그게 오늘 아나스타샤의 기획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죽지는 않겠죠……?”

내 말에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빵 터졌다.

“아하핫, 갑자기?”

“심장마비 같은 걸로…….”

“진지하게 무서운 말 하니까 나도 무섭잖아……. 넌 가끔 그런다니까.”

그냥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는지 아나스타샤는 다소 황망해하며 말을 돌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날 안심시켰다.

“걱정 마. 그런 것 아니니까.”

“정말요?”

“응.”

뭔진 몰라도 그녀가 날 괴롭힐 것 같진 않아서 마음이 조금 놓인다.

그리고 우리가 각각 따로 다닐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무언가 한다면 다 같이 하게 될 것 같다. 저 옆에 있던 에르네스트도 어딘가 모르게 안도하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순간 질문의 방향을 그쪽으로 돌렸다.

“넌 어떻게 예상하고 있어? 에르네스트.”

“무슨 예상?”

“혹시 너도 번지점프니?”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쓰긴 했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킥킥 웃더니 괜히 덧붙였다.

“더 익스트림한 것도 있는데.”

“…….”

대체 뭐가요……?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는 나는 멍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장난으로 받아치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차가 잠시 덜컥거리며 몸이 흔들리자 한숨을 길게 쉬더니 천천히 말했다.

“뭐든 상관없지만 위험한 것만 아니면 돼.”

“위험한 건 왜? 무섭니?”

“……왜냐고 묻는 게 웃기네.”

몸이 재산인 연주자들이 위험한 걸 하면 당연히 안 되죠.

나 역시 에르네스트와 똑같은 의견이라서 살짝 나무라듯 아나스타샤를 보았다. 그녀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에르네스트를 보고는 가볍게 말했다.

“무서워하진 마.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사탕을 꺼내 먹기도 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가십거리들을 보기도 했지만,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오늘은 정말 다들 음악 생각은 하지 않고 쉬기로 한 것이다.

그런 암묵적 합의 아래에서 30분 정도 놀다가, 난 슬슬 어디쯤 왔을까 궁금해져서 몰래 스마트폰을 켜고는 지도 앱을 열었다.

모르는 곳으로 데려가는데 적어도 동서남북 어디 방향인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같다.

“…….”

방향은 모스크바 북서쪽 교외.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그 위쪽 도로를 타고 있었다. 나카비노라고 하는 지명이 보인다.

늘 차량으로 모스크바 도심으로 등하교를 하는 나는 가 볼 일이 없는 곳이었다.

여전히 뭘 할지는 전혀 모르는데도 어느 쪽인지 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난 시치미를 뚝 떼고는 아나스타샤가 어떤 일정을 준비했는지 기대해 보기로 했다.

이윽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컨트리 클럽country club이라는 곳이었다.

“……와.”

차에서 내린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선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 들 정도로 탁 트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모스크바에서 조금 벗어난 교외로 오는 것만으로도 벌써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다.

마치 그림처럼 그 풍경 한가운데에 호텔같은 커다란 건물이 위치해 있었다.

그 주변엔 몇몇 건물과 편의시설 등이 있었고, 옆으로는 넓은 부지와 호수까지 있었는데 이 전부가 이곳의 사유지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컨트리 클럽이 뭘까. 그 단어만 놓고 보자면 시골 클럽이니까…… 숲과 호수 속에 있는 휴향지인 걸까? 아나스타샤라면 무언가 액티비티를 할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무엇을 하게 될지 전혀 모르겠다.

애초에 실력이랄 게 전혀 없는 나와 뭔가 해 봐야 별로 재미없을 테니까 정말로 그냥 쉬기만 하려는 걸까.

여러 생각을 하면서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햇살에 눈이 부신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난 그에게 살짝 다가가 물었다.

“에르네스트. 오늘 뭘 하게 될 것 같나요?”

“글쎄, 골프?”

“?”

생각도 못했던 이야기라서 의아하게 바라보니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으로 건물 입구를 가리켰다.

“이 근방에서 컨트리 클럽들은 승마나 골프 시설이 있는 게 대부분일 거야.”

“아, 그런 곳이었나요.”

처음 안 정보에 신기해하자 그가 이어 말했다.

“다른 레져도 할 건 많겠지. 그런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공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나스타샤는 골프도 칠 줄 아나요?”

“저 애가 할 줄 모르는 게 뭔지 난 잘 모르겠어.”

에르네스트는 진지하게 몇 초간 고민해 보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그녀가 체스에서 야구까지 못하는 게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골프도 할 줄은 몰랐다.

기억들을 다 돌아보아도 골프는 여전히 접근성이 낮은 스포츠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나스타샤를 상상하는 것은 쉬웠다. 그녀는 뭘 해도 자세가 잘 나오는 편이었으니까. 아마 골프도 멋지게 잘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옆에 있는 에르네스트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에르네스트는요?”

“나?”

“예. 잘 하시나요?”

그는 작게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자꾸 하라고 해서. 조금은.”

“아.”

에르네스트의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유명한 분이셨다. 베르체노프와도 관련이 깊었고. 아마 골프 정도는 교양으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가르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교양도 없는 난 어떡하지.

“전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걱정이에요…….”

“다들 처음 하는 게 있잖아. 괜찮아.”

뭘 그런 걸 신경 쓰냐며 에르네스트가 웃었다. 그의 웃음을 보며 난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나스타샤도 내가 잘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이렇게 데리고 왔다. 그렇다면 잘하든 못하든 간에 같이 어울리는 것이 중요했다. 애초에 오늘은 그럴 작정이기도 했고.

숲을 보며 몸을 풀던 아나스타샤는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스트레스 풀러 가자.”

스트레스가 어떻게, 얼마나 쌓인 것인진 모르겠지만 난 오늘로 아나스타샤가 조금 개운해지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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