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0화
아나스타샤가 짠 일정은 시작부터 하드했다.
예약한 방에 가방을 놓자마자 그녀는 우리를 이끌고 나와선 골프 용구들을 렌트했다. 이것도 미리 다 예약이 되어 있었기에 그냥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묵직한 골프 가방이 조금 어색했지만, 벌써부터 무언가 제대로 갖춰지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두근거리기도 했다.
아나스타샤는 선크림을 가져와선 나와 나누어 발랐다. 가을 햇빛이 더 무섭다고는 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진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어디선가 가져온 모자까지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아, 고마워요.”
“골프 선수 같아.”
“농담 마세요. 아나스타샤야말로 그렇게 보이는걸요.”
간신히 골프 가방을 메고 있는 나와 달리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는 훨씬 더 익숙해 보였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함께 골프 시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여긴……?”
“연습장이야.”
넓은 잔디와 호수가 있는 코스도 옆에 있었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편에 직사각형으로 정돈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코스는 제대로 골프를 칠 수 있게 된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옆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운드는 안 가는구나.”
“못 가지. 어떻게 가? 이 애를 두고 가라고?”
아마 나 없이 두 사람뿐이었다면 저 옆에 가서 제대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날 옆에 그냥 데리고 다니거나 여기서 연습하라고 놔두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나스타샤는 아예 오늘 여기에서만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도 거기에 동조했다.
“어차피 나도 잘 못 쳐. 그냥 여기서 놀자.”
난 두 사람에게 미안해졌다. 나도 같이 할 수 있었다면 코스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이 좋은 곳까지 와서 제대로 놀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이미 아나스타샤도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을 테니 괜한 약한 소리 하지 않으려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움츠린 목소리가 나왔다.
“저 때문에 혹시…….”
“응? 아니야 그런 거.”
그녀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잘랐다.
“에르네스트도 골프를 칠 줄 안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은 원래부터 라운드 돌 생각 없었어. 애초에 많이 잊어버려서 이렇게 연습하는 게 나아.”
미안해하는 날 보면서 되레 아나스타샤가 더 미안해했다. 난 그녀에게 무언가 부담을 줄 생각은 일절 없었기에 이렇게 된 이상 있는 그대로 즐기기로 했다.
보아하니 우리만 연습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옆으로 길게 늘어선 다른 라인엔 몇몇 사람들이 서서 계속 연습하고 있었다.
한 자리에서 공을 치는 것뿐인데도 모두들 진지한 태도로 임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연습에도 의미가 있을 테니 열심히 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이자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으며 짜잔 하고 팔을 펼쳤다.
“자, 타티아나를 위한 원데이 클래스가 있겠습니다.”
원데이 클래스로 도예나 캘리그래피 등을 가르쳐 준다는 광고는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골프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아나스타샤가 가르쳐 준다면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난 그녀에게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만에 배우는 만큼 자세하게 다루진 않겠다는 듯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녀가 연습장을 가리켰다.
“원래 골프는 에티켓과 룰이 중요한 스포츠이지만…… 오늘은 공부하러 나온 게 아니니까 그냥 공 치는 법만 알려 줄게. 괜찮지?”
“예, 좋아요.”
“채 이거 들고, 이쪽에 서 볼래? 타티아나.”
난 그녀가 말하는 대로 자리에 섰다. 용어도 자세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서 있는 상태였다.
분명 매체 등에서 골프를 치는 걸 본 적 있지만, 그렇게 보고 따라 하는 건 아나스타샤 같은 천재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골프채를 양손으로 쥐고 서니 아나스타샤가 웃으며 내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채는 이렇게 잡고…… 발도 이렇게. 응. 잘하네.”
그립이나 팔의 위치부터 발끝이 향하는 각도까지 그녀는 세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벌써부터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최대한 가르쳐 주는 대로 하려고 애썼다.
작년 여름,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아나스타샤에게 배드민턴을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녀는 친절하게 내게 잘 설명해 주었지만 난 너무 어려워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절망적인 운동신경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체력이 조금 더 붙었고 몸을 조금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선 그때보다 낫다.
“땅을 치지 않게 주의하고. 천천히 해 볼래?”
어느 정도 자세가 나오는지 아나스타샤는 한 번 해보라면서 내 앞에 공을 올려 주었다. 난 최대한 집중해서 공을 보고, 배운 대로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리고 호쾌하게 헛스윙을 했다.
“…….”
창피해서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
내가 꼼짝도 하지 못한 건 그저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숨을 장소가 있었다면 분명 도망쳤을 것이다.
옆을 돌아보니 아나스타샤는 심각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지금 쿡 찌르면 바로 폭소를 터뜨릴 것이 뻔했다.
이럴 줄 알고 있었잖아요!
난 뾰로통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제대로 하고 있나요……?”
“처음엔 당연히 어려우니까…… 내가 보여 줄까?”
그리고 그녀는 일단 가까이에서 시범을 보여 주겠다는 듯 자리를 잡았다.
“자, 이렇게.”
아나스타샤는 이 자리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까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깔끔하게 자세를 잡고는 스윙 역시 깔끔. 날아가는 공의 궤적도 환상적이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저편에 떨어지는 공을 보면서 난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방금 했던 헛스윙이 생각났다.
난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정말 멀리 날아갔어요. 홈런인가요?”
“그건 야구고. 이건 그냥 롱샷이야.”
“아, 야구요…….”
연달아 창피를 겪으면 아무 생각도 없어진다. 차라리 말이나 말걸.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내가 겪는 상황을 수습해 주려다가, 갑자기 휙 돌아보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다음은…… 에르네스트. 네 차례야.”
“나도 해야 하나?”
“그럼 앉아서 자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는 듯 에르네스트는 눈을 흘기더니 자신의 채를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역시 깔끔하게 한 번에 공을 날렸다. 보기엔 분명 멋졌는데도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잘 안 되네.”
공이 날아가 떨어지는 걸 보고 나서야 난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았다. 아나스타샤가 더 멀리 공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신체조건만 봐선 아나스타샤보다 더 좋은 에르네스트가 멀리 치지 못한 건 아마 기술적인 부분인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골프공을 하나 휙 던졌다 받더니 물었다.
“원래 몇 타 정도 쳐? 에르네스트.”
“난 그냥 120이지. 애초에 골프 치러 와 본 적도 몇 번 안 돼.”
“그러니? 자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할 것 같긴 한데.”
아나스타샤는 그의 잠재력을 꽤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정도라면 아나스타샤는 훨씬 더 잘 하는 걸까? 에르네스트가 120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200 정도? 애초에 그 점수가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냥 멍하니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이윽고 아나스타샤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역시 이런 걸로 내기하자고 하기엔 좀 그렇지? 별 의미도 없고.”
정말로 작정하고 내기를 한다면 그녀가 무조건 이기겠지만, 애초에 성립이 안 되는 내기를 해 봐야 재미도 없고 무의미하다. 그녀도 그것을 잘 아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그냥 기분이나 풀었으면 좋겠어.”
“기분? 오늘 나 기분 좋은데.”
“……그럼 다행이고.”
여전히 둘 사이 긴장감은 잔류해 있다. 하지만 꽉 막힌 연습실에서 커다란 피아노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밖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으니 조금은 편해진 모습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원래 주말간 혼자 있고 싶어 했지만, 다 같이 뭐라도 하자고 제안한 에르네스트가 옳았던 것 같다.
“저도 간만에 나오니 기분 좋네요.”
“그러니?”
“예, 다른 분들은 조금 아쉽지만…… 다음에 함께 하도록 하죠.”
발렌티나나 리처드, 한승우도 시간만 된다면 같이 와도 좋았을 텐데.
지금 우리는 같은 연주회로 묶여 있는 데다가 한 곡을 합주하는 연주자들이기도 했기에 협동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목적도 있어서 이렇게 올 수밖에 없었다.
아마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면 난 그 애들에게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다음엔 그렇게 해도 괜찮겠다는 듯 웃더니 문득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다른 애들 중에 골프 칠 줄 아는 애 있던가?”
“없을걸.”
“그럼 다 가르쳐야겠네?”
“이게 수영처럼 그냥 물에 집어넣으면 알아서 배워지는 것도 아니고. 힘들걸.”
저번에 수영도 두 사람이 진두지휘해서 가르치긴 했지만…… 말이 너무 격한 것 아닌가요, 에르네스트.
내가 약간 어이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는 찔끔하더니 연습이나 해야겠다며 자기 자리로 가 버렸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연습하러 가지 않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난 타티아나나 봐 줘야지.”
난 가볍게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나스타샤의 골프 원데이 클래스는 내게 집중되었다. 다시 한번 그립부터 스윙까지 차근차근, 그녀는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난 운동신경에 믿음이 없었기에 스스로를 로봇이라 생각하며 오로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하기 위해 애썼다.
헛스윙도 두어 번 하고 나니 조금 덜 창피해졌고, 그렇게 몇 번 휘두르다 보니 자신도 붙었고, 하다 보니 골프공도 한 번은 칠 수 있게 되었다.
“……!”
시원한 감각이 손에 아릿했다. 난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눈을 크게 뜨고는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보다 더 기뻐하는 것 같았다.
배드민턴은 한 번도 못 받아 냈던 것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그렇게 한 번 공을 치고 나서야 난 의자로 와서 쉴 수 있었다.
그냥 채를 휘둘러 공을 친다는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웠고,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내가 섰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멋지게 공을 치고 있는 아나스타샤를 보며 난 빨대를 물었다.
목도 축이고, 채를 휘두르느라 힘든 팔도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골프 연습하러 놀러 온 학생들은 오랜만이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나이는 50대 즈음.
우리와 똑같이 이곳을 찾은 손님인데 신기해서 말을 걸어온 모양이다. 난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친구들끼리?”
“예, 맞아요.”
남자는 껄껄 웃으며 즐거워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이렇게 놀러 오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죠. 하하하.”
우리 세 명이 이렇게 놀고 있는 게 그의 눈에는 꽤나 좋게 보인 모양이었다. 좋게 봐 주었다면 나도 그만큼 기뻤다.
이름도 모르는 분이지만 간단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우리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는 턱을 쓸며 놀라워했다.
“좋은 학교일 것 같단 생각은 했지만 중앙음악학교라니…… 체육계일 거라 예상했는데.”
“기악도 몸을 써야 하는 건 같죠.”
“그건 그렇네요.”
애초에 날 보면 체육을 잘 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들텐데…… 그는 피식 웃더니 손을 들며 조언했다.
“아무튼 음악을 하는 학생들이라면 몸조심해서 자세를 잘 배우는 게 좋아요. 이게 생각보다 어려운 운동이라서.”
“자세…… 아.”
배우다 보니 쉽지 않다고 말하려던 난 그의 팔꿈치 쪽에 보호대 같은 것이 밴딩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난 골프 역시 부상 위험이 존재하는 스포츠라는 걸 깨달았다.
실제로 채를 휘둘러 보니 팔에 조금 무리가 왔기도 했고. 조심해야겠다는 경각심이 확 찾아든다.
내 표정이 바뀐 것을 보았는지 남자는 약간 미안하다는 듯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좋은 시간 보내길.”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난 팔꿈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물론 난 프로 골퍼도 아니고 이 정도 하면서 다칠 거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겨우 얼마 했다고 겁먹고 움츠러들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조심해야 할 부분은 충분히 조심하면서 즐기면 아무 문제 없을 거란 상식적인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마냥 즐거웠던 기분은 조금 식었다.
잠시 먼 숲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아나스타샤가 다가와 물었다.
“누구야?”
“글쎄요, 연습하러 오신 분이겠죠?”
나와 이야기하다가 간 남자는 한참 멀리서 스윙 연습 중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바라보더니 다시 날 돌아보고는 살며시 웃으며 제안했다.
“골프는 이 정도만 할까?”
“연습 거의 못하셨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이 컨트리 클럽의 주 시설은 골프이지만 그것만 보고 온 것은 아니라면서 아나스타샤는 슬슬 다른 것도 하러 가자며 날 일으켜 세웠다.
아마 혼자선 꼼짝도 못 했을 난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일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