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4화
아나스타샤 개인의 파트를 보는 데엔 멀리 갈 필요 없었다. 근처의 빈 개인 연습실을 찾은 우리는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닫자 좁은 공간에서 오래된 공기들이 뭉친다. 난 살짝 옆으로 물러서며 두 사람이 이야기할 틈을 만들어 주었다.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최근 있었던 그 곡의 연습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연주에 불만족스러워했다.
그건 다른 우리 두 명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특히 신경 써서 오늘은 연습을 해 온 듯했다.
그런데 단순히 그런 연습뿐이라면 이따가 세 명이서 같이 연습할 때 맞춰 보면 될 일. 연주자가 작곡가를 직접 찾아서 봐 달라 하는 것이라면 그건 조금 더 중요한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구한 악보가 있으면 보여 달란 뜻이었다.
“어느 부분인데? 봐 봐.”
“악보 두고 왔어.”
“그럼 여기다가…….”
“그냥 들려줄게. 들어 보면 알잖니?”
아나스타샤는 종이에 펜으로 쓴 것으론 아무것도 보여 줄 수 없다는 듯 양손을 팔락거리며 웃었다.
에르네스트 역시 보는 것보단 듣는 것이 빠르다는 걸 아는 사람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내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가 되었다.
아나스타샤는 닫혀 있는 피아노의 덮개들을 들어 올렸다. 잠들어 있던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듯 피아노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앞에 선 사람은 너무나 작아 보이지만, 아나스타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앞에 정면으로 앉았다.
“…….”
시작한다는 말도 없었다.
잠시 모든 진동이 멎고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찰나, 그 순간을 꿰뚫듯 아나스타샤는 건반을 눌러 음을 쏘아냈다.
에르네스트가 그녀에게 허락한 화려하고도 선명한 음악이 연습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감상자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은 개인 연습실의 설계는 일부 음을 복잡하게 산란시키고 흡수하기도 했지만, 구조적으로 그 실력이 상쇄된다 하더라도 우리 정면으로 와닿는 음의 파도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해석이…….’
그 연주는 지금까지 우리가 연주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지금까지 나와 아나스타샤는 에르네스트가 쓴 악보를 충실하게 따랐다.
그의 악보는 그만큼 면밀하게 우리의 특성을 고려하여 쓴 것이라서 달리 다른 해석을 곁들일 필요도 없었고, 또 곡을 완성하여 무대에 올리기까지 주어진 시간도 꽤나 촉박한 까닭이었다.
연주자와 작곡가가 의견을 맞추며 곡을 교정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 초연만큼은 일단 원전대로 연주하는 쪽으로 우리 사이엔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이번에 그 합의를 깨고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그건 그리 큰 변화는 아니었다. 선율 자체를 뒤틀거나 화성을 마음대로 하진 않는다. 애초에 아나스타샤는 편곡에 그렇게까지 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호흡에 단 한 음표 정도.
숨을 내쉬며 노래하다가 다시 들이쉬는 그 순간의 짧은 길이.
피아노 연주자로서의 본능이 찾아낸 그 찰나의 순간에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의견과 또렷한 근거를 붙여서 합리적이고 멋진 음악을 찾아내었다.
난 그 모든 순간을 전부 캐치할 순 없었지만, 에르네스트가 작곡한 것을 그녀가 망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쯤은 바로 판단할 수 있었다.
“…….”
대곡을 쓴 작곡가들 수많은 작곡가들 중엔 자신의 곡에 절대적 완성도를 부여하고 수정을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연주자의 역량과 번뜩이는 센스가 찾아낸 음표를 존중하며 반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었다.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 같은 작곡가들이 그런 부류였다.
에르네스트는 어느 쪽인지 이미 나는 잘 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강하고 뻣뻣한 점도 분명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곡에 이름을 붙여 달라고 하거나 해석에 대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도를 주었다.
그의 음악이 향하는 어떤 지점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일지 모르겠지만, 그 여정으로서의 곡은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십분 이해하고, 용감하게 의견을 내었다.
이 또한 그녀와 에르네스트 사이의 어떠한 불만의 교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음악으로 된 교류엔 반목과 다툼이 있더라도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란 믿음이 내게, 그리고 우리에겐 있었다.
“…….”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아나스타샤의 연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쭉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지만 그가 이것을 싸움이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짧지만 강렬한 연주가 멈추었고, 난 박수를 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단해요! 아나스타샤.”
“괜찮았니?”
“그럼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이것이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난 들뜬 가슴을 쉽게 진정시키지 못하고 그녀에게 보챘다.
“아, 이대로 셋이서 가서 연주해 보고 싶은걸요? 어쩌죠?”
“아하하, 그건 좀 나중에.”
“예? 왜요?”
“혹시 못 알아차렸니?”
그녀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어보았으나 내가 그런 점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금방 이해한 난 그녀에게 말했다.
“아…… 고쳐 연주하신 것 때문에요?”
“응. 그 부분에 대해 작곡가와 이야기도 좀 해 봐야지.”
아나스타샤가 의견을 낸 이 해석대로 그대로 다시 곡을 조율하여 맞춰도 될 일이다.
우린 즉흥적으로 그렇게 즐기면서 해도 충분히 음악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 주먹구구식이 되어 버린다.
가볍게 합주를 하며 놀 것이 아니라 큰 무대에 올려야 하는 곡을 그렇게 완성할 수는 없었다.
작곡가가 여기에 없는 것도 아니었고, 우린 그에게 충분한 근거를 갖춘 의견을 내밀어 한정된 시간 사이 가장 좋은 음악을 찾아내어야 했고, 그것을 악보로 정돈하여 정확하게 다시 익힐 필요가 있었다.
작곡가 에르네스트의 명예는 물론이고 세 명의 피아노 연주자의 평가가 달려 있는 무대는 되도록 신중하고 면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 지금 가장 심각할 에르네스트는 진지한 눈으로 자신의 악보를 바라보더니 펜으로 쿡 찌르며 말했다.
“스무 군데를 넘어선 지점부턴 그냥 체크만 하고 따라갔는데. 이걸 다 봐야 하나?”
“응. 오늘은 시간 좀 내줘?”
“…….”
결코 장난 같은 음악이 아니었고, 때문에 작곡가로서도 그냥 지나치거나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군데도 넘는다고 했으니 그 모든 부분을 다루고 합의를 찾아내려면 아마 시간이 한참이나 걸릴 것 같았다.
아마 오늘은 아나스타샤의 파트를 위해 에르네스트가 힘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잠깐 시간을 내어 한 번만 연습하자고 할 순 있었지만, 지금 저 두 사람 사이의 집중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난 억지를 부리지 않고 미리 말했다.
“그럼 오늘 전 따로 개인 연습 할까요?”
“그럴래?”
“그래요. 음, 아나스타샤가 이 정도로 해 주셨다면 저도 힘내야죠. 어제 전 그냥 평소처럼 하는 데에 그쳤었거든요.”
난 그저 컨디션을 바로잡고 지금까지 나온 악보대로 연주하는 데에 그쳤을 뿐이다.
연주자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곡에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는 걸 당연히 알기는 했지만, 시간이 없는 에르네스트에게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이미 꽤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끝없이 초월하여 갱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나도 이번엔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설마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의욕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엊그제 약간 슬럼프에 시달리는 것 같던 모습은 금방 극복해 낸 것 같아서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나도 질 수 없다는 뜻으로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에르네스트가 피식 웃었다.
“타티아나 너처럼 피아노 리덕션에 능한 피아니스트가 작정하고 건들면…….”
“후후, 걱정 마세요. 저도 욕심을 그렇게 내진 않을 테니.”
난 총보연주 등 다중선율을 하나로 합치는 데에 꽤 능숙해서 이런 삼중주를 재해석 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한 것처럼 내 파트에서만 연주자의 본능대로 조금 더 높은 완성도에 닿은 음을 찾아낼 생각이다.
그것도 시간이 허락하는 내에서 다른 친구들과 조화 역시 고려해야 할 테니 크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
그래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난 가방을 다시 들고는 연습실 문을 열었다.
“그럼 전 연습하러 갈게요. 이따 뵈어요.”
“알았어.”
“이따 봐.”
두 사람은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 작은 미소를 남기곤 연습실을 떠났다. 괜한 걱정은 할 필요 없었다.
***
타티아나가 연습실을 떠나자마자 아나스타샤는 환하게 웃던 표정을 지우고는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냉랭하거나 적대적이진 않다. 저번 놀이터에서 보였던 그 배신감에 가득 차 있던 표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옅어져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약간의 편린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죄책감을 느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런 그를 다시 몰아세우거나 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왜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연주했던 곡에 갑자기 주말동안 의견을 스무 개도 넘게 가지고 왔는지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손은?”
“괜찮아.”
“줘 봐.”
말로는 못 믿겠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손을 내밀었고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왼손을 보여 주었다.
바늘에 찔렸던 손끝은 이젠 아주 작은 상처만 보이고 있었다. 이런 건 여섯 살짜리들도 다쳤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확하게 건반을 터치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의 입장에선 이런 작은 상처가 눌리며 오는 통증에도 감각이 무뎌지고 신경이 쓰이게 된다.
그것은 아주 작은 균열이겠지만, 결국 연주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요소였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연주할 수 있었다. 어제 혼자 연습했을 때도 큰 문제 없었다.
“아프니?”
“별로. 조금 거슬릴 뿐.”
“피아노 쳤으면 타티아나가 알았겠네.”
“아마도.”
하지만 혼자 연주하는 것과, 음악에 무척이나 민감한 파트너를 옆에 두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실제로 손끝의 통증을 느끼는 것보다 타티아나는 음악을 통해 훨씬 더 강렬하게 그 위화감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녀가 피아노 소리를 인지하는 수준은 예민하다는 정도를 넘어서서 거의 초인적인 정도였으니.
그래도 연습은 해야 하니 어떻게든 숨기면서 해 보려 했는데, 때마침 상황을 아는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끼어들어 하루 시간을 더 벌어 준 것이다.
어제 하루 만에 상처가 이만큼 아문 것을 보면 하루만 더 주어지면 정말 괜찮아질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에게 감사했다.
“고마워. 내일은 아마 멀쩡해질 거야.”
“어쨌든…… 조심해. 릴케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장미 가시?”
“응.”
오스트리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선물 받은 장미 가시에 손끝을 찔려 죽었다는 일화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건 릴케가 그렇게 믿고 싶어 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일화일 뿐이고, 사실 그의 사인은 오래전부터 걸린 백혈병으로 판명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지금 아나스타샤에게 릴케는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바로잡아 줘 봐야 그녀가 화만 내게 될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같은 피아니스트이기에 다친 것을 걱정해 주는 건 맞는 것 같으니까.
“오늘은 고마워. 그래도 괜찮으니까 이젠 신경 쓰지 마.”
“안 쓸 거야.”
“그래도 음악 이야기는 더 하다가 갈 거지?”
아나스타샤가 작곡가 에르네스트의 시간을 붙잡아 놓고 피아노를 못 치도록 한 건 손을 쓰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준비해 온 음악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수정한 부분들을 슥 짚어 보고는 손톱으로 툭툭 쳤다.
“내가 널 정말 몰랐었던 것 같아. 전폭적으로 네 의견에 따라서 고칠게. 아나스타샤.”
“그럴 필요 없는데.”
“아니야.”
그는 아나스타샤가 최근 연주하는 곡들의 특성과 그녀의 실력 등을 고려해서 곡을 써냈다.
최고의 효율로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도록. 그러나 그녀가 지금 보인 실력은 그의 상상을 몇 계단이나 뛰어넘는 것이었다.
갑자기 한순간에 발전하진 않았겠지. 그렇다면 분명 이것은 그녀가 숨기고 있던 실력의 일환이었다.
왜 실력을 숨기지?
에르네스트는 그 부분에 대해 약간 싸늘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칼끝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면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아나스타샤는 분명 예전부터 경고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최선을 다해 승부해 달라고.
그건 피아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 연관되어 있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타티아나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애가, 정말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생각치도 않고 우습게 보고만 있었다.
“……네가 그랬지. 내가 널 우습게 보고 있다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아나스타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할게.”
서로 겉돌던 이야기의 흐름이 큰 곡선을 그리다가 마주했다. 아나스타샤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긴 호흡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