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6화
지금 옳게 가고 있는 걸까.
아나스타샤는 그 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아마 제일 좋은 방법은 친구에게 향하는 이 마음에 정확한 이름표를 붙이고 추스른 후 쿨하게 행동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를 떠보거나 혼란스럽게 할 일도 없고, 만약 잘못되면 그녀 혼자만 떠나면 되니까.
하지만 그녀는 떠날 수도 없었고 관계를 파탄 낼 수도 없었다. 그저 혼자 준비를 하면서 언젠가 다가올 순간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다. 제대로 된 용기도 가지지 못했으면서 일방적으로 누군가의 이해만 바라고 있는, 아나스타샤가 평소 경멸해 온 부류의 방침이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일로 마주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마음의 저울은 솔직함과 두려움이 균형을 이루었고, 그녀는 결국 자신이 정확히 어떤 미래를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그려 낼 수 없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삶 자체가 슬럼프에 빠진 것 같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피아노 실력만큼은 집중하는 만큼 미친 듯이 상승해 나간다는 것이 웃겼다.
그녀가 일단 피아노로 어떻게든 하나쯤 매듭을 짓고자 한 것도 그만한 실력 상승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보면 있잖아? 일상에 문제가 있는 만큼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는 사람들.”
“?”
“난 가끔 그런 사람들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었거든.”
인간의 한 부분을 내려놓고 그것을 대가로 막대한 무언가를 얻어 돋보이게 되는 사람들.
결여되었기에 역설적으로 특별하게 보이는 그런 사람들의 삶을, 어릴 적 아나스타샤는 무턱대고 멋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무지와 편견에 근거하여 피상만 보고 갖게 된 마음이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를 만난 후, 아나스타샤의 생각은 많이 변화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타티아나는 실제로 그녀가 어릴 적 잠시 동경했던 그런 음악가와 비슷한 삶을 겪고 있었다.
혼수상태로 근력과 순발력은 물론 신경에도 문제가 있는지 팔다리가 종종 저리다고 해서 마사지를 받아야만 하고, 머리가 희게 세어 버릴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심각한 기억상실까지 있어서 타티아나는 생활에 꽤 지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피아니스트로서 자신의 분야에선 그야말로 탁월한 성적을 냈다.
물리적 한계에 마주하는가 싶으면 어마어마한 음악적 센스와 집중력으로 그 한계를 뚫어내고 다시 한 발자국 나아간다.
아나스타샤는 그녀의 옆에서 그런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아 왔다.
그리고 지금 타티아나가 자신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이젠 밝게 빛나고 있을 때, 아나스타샤는 되레 더더욱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기억이 돌아온 타티아나는 활기를 되찾고 훨씬 더 건강해졌다. 자아정체성도 보다 뚜렷해져서 정신적으로도 많이 안정되었다.
아나스타샤는 친구로서 진심으로 그녀의 회복을 축하해 주었지만, 동시에 그 이상 무엇도 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타티아나는 자신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분명 그녀의 언행엔 되찾은 기억 속의 관념이 깃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고민했다. 아나스타샤는 그냥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정리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아직 이름을 제대로 붙이지도 못한 마음을 무작정 상자 속에 집어넣고 덮어놓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상자 밖에 이름을 써 놓지 않으면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고 무심코 열어보게 된다.
그럼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제대로 덮고 보지 않으려면 반드시 이름을 써야만 했다.
그저 시간만이 흘러갔다. 시한폭탄을 머리 옆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이 늘 하루 종일 그녀 뒤를 따라다녔다.
당장 폭탄을 집어던져 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던져 버린 폭탄이 다른 사람에게 날아가 터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암흑 같은 일상 속에서 그녀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잘 모르고 동경했던 그 삶에 빠져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수렁과 비슷했다.
허우적거리며 팔을 움직이는 일을 멈추면 정말 끝장일 것 같다는 기분에 더더욱 필사적이 되지만, 결국 그럴수록 더 깊게 침잠한다.
아나스타샤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피아노뿐이야.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집중하지 못하는 너랑은 달리.”
그건 훈계나 자랑 같은 게 아니었다. 음악학교 학생으로서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겠지만, 아나스타샤가 집중할 수 있는 건 단지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건강한 정신상태라 할 수 없는 그녀가 자랑 따위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점을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말꼬리를 잡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요즘 좀 신경이 분산되긴 했지.”
“바로 인정하네?”
“사실이니까.”
완벽주의적 면모가 있던 과거와 달리 굉장히 유해진 모습이다. 이 또한 에르네스트의 변화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에 문제가 생겼느냐면, 전혀 아니었다. 되레 에르네스트는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리허설에서의 실수만을 놓고 보자면 그가 변명을 못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런 건 이제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와 비슷할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끌어안고도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 노력해 나갔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마음의 정리를 마친 뒤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쉽게 웃으며 받아 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음에도 에르네스트는 내색 하나 않고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봐 주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중 하나는 오늘 정리하고 가려고.”
“오, 내 이야기니?”
“정리라고 하니까 말이 좀 이상하네. 정정할게. 확인하고 가는 걸로.”
“그래?”
만약 저 애가 날 공격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최악의 상황과 마주하지 않은 것만 하더라도 아나스타샤는 하늘에 감사하고, 또 에르네스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보다 명확해졌다면, 적어도 이제 와서 에르네스트를 기망하며 빠져나가려고 하진 않아야 했다.
“네 확인이 어디까지인진 모르겠는데, 그럼 이것도 잘 확인해 봐.”
지금 피아노를 조금 더 잘 친다고 해서 내가 에르네스트보다 잘나게 되는 걸까? 음악에 독실한 타티아나라면 그렇게 인정해 줄까? 이 애보다 내가 낫다고?
절대 아니지. 그 정도는 안다.
그래도 그녀가 그간 헛된 시간을 보내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던 건 아니라는 증명이 되어 줄 터였다.
“…….”
입을 다문 채 아나스타샤는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방금 전까지 피아노랑은 전혀 관계없는 연애 이야기를 남자애랑 진지하게 주고받다가 갑자기 이렇게 피아노에 앉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에르네스트가 자신을 비웃진 않을 거란 믿음으로 그녀는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곡은…….’
생각나는 것은 여럿 있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가 말한 대로 아나스타샤가 준비한 대부분의 칼날은 쇼팽으로 집약되어 있었다.
원래는 알캉이나 라흐마니노프 등 고난도의 음악에 손을 뻗으며 이 거대하고 수많은 칼날로 에르네스트를 찍어누를 생각이었지만, 결전지를 쇼팽 콩쿠르로 정한 시점에서 다른 곡은 아무것도 꺼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몇 개월간 계속 쇼팽만을 연습했다.
쇼팽을 깊게 이해하고 연주하는데도 묘하게 꺼려 하는 타티아나가 보여 주었던 몇 안 되는 곡들을 떠올리면서 그 발자취를 뒤쫓고, 그녀가 극복하고 닿았던 지점들에 손을 뻗었다.
거기에서 얻어낸 경험을 다른 곡들로 펼치고, 그녀가 다루는 모든 곡들에서 뛰어난 성과를 끌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윤곽을 그려 형태를 갖춘 음악의 테두리를 얇게 갈아 보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음악의 공격성을 특정 대상에게 향하게 한다는 건 어렵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걸 타티아나는 보여 준 적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의심하지 않았다.
무기가 된 음악을 쥐고 아나스타샤는 걸음을 옮겼다.
“…….”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제 1악장.
내림나단조의 어두운 울림.
안개가 자욱한 무덤가. 크게 내디딘 발이 땅을 파고들고, 깊은 바닥에서부터 소리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아리.
음산한 유령들의 목소리가 뒤를 이끌며 아나스타샤의 어깨에 머문다.
그녀는 가볍게 그것들을 떨쳐 내며 내달렸다.
“…….”
길고 무거운 화음으로 잘하는 척을 해 봐야 타티아나나 에르네스트에게 닿을 수 없었다.
음악엔 정제된 에센스 한 방울의 강렬함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아나스타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알았고, 자신의 음악성을 실어 존재감을 뚜렷하게 했다.
에르네스트의 컨디션이 완벽하더라도 지금은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역량을 쏟아냈다.
이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쇼팽이 작곡한 모든 피아노곡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그만큼 연주자의 실력으로 낼 수 있는 여지가 많았고, 아나스타샤는 그 여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무덤가를 박차고 말에 올라 질주하던 기사는 곧 그 주변을 맴돌며 놀란 말을 달래고 투구를 벗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자신의 적을 정확하게 관찰한다. 두려움과 주저함 역시 형체가 없는 적이었다.
기사는 그 모든 적들을 향해 창끝을 겨누며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 경쾌하게 말이 달린다.
아나스타샤의 양손이 건반을 연타했다. 손은 건반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모든 음을 유연하게 연주하면서도 그 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연주가 지금까지 그 어떤 연주보다 앞서 있음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에게 승리를 받아 내기 위해 만든 이 곡이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르게 된 것이다.
차오른 자신감은 이 곡이 세계를 상대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음악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부 보여 주면 재미없다.
‘여기까지.’
스트레토stretto라는 지시에 따라 단단하게 클라이맥스를 맺은 아나스타샤는 시연을 멈추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 수도 있지만, 그녀가 갖추어 놓은 모든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보여 주고 평가받을 생각은 없었다.
경각심을 느낀 에르네스트가 대응할까 두려워선 아니었다. 아나스타샤는 몇 개월 후 자신이 어디까지 가 있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이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
1악장도 아니고 중간에 연주를 끊어 버려도 에르네스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경쟁자로서 표정에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내심 상당히 놀라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로서도 아나스타샤가 쇼팽을 이 정도 완성도로 만들어 놓았을진 상상도 못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기분으로 옅게 웃었다.
“어땠니?”
“……생각보다 훨씬 낫네.”
어느 정도를 생각했었는데?
아나스타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기 전, 에르네스트는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일어섰다.
뭐 하려는 거냐는 뜻으로 아나스타샤가 바라보자 그는 가볍게 턱짓했다.
“이제 내 차례지? 나와 봐.”
“……뭐?”
분명 그냥 보기만 하겠다고 한 것 아니었어?
그래서 나중에 보일 쇼팽 피아노 소나타 2번을 꺼냈고, 중간에 끊기도 한 건데. 이제 와서 진짜 대결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이걸 배신이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배신감을 느낀 아나스타샤는 피아노에서 꼼짝도 않고 받아쳤다.
“안 칠 거라면서?”
“내가 언제?”
“아까 그랬잖아!”
헛소리 말라는 뜻으로 쏘아붙이자 에르네스트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렇게 말 안 하면 네가 피아노 앞에 안 앉을 것 같아서.”
“뻔뻔하게 그렇게 나와!?”
“최선을 다한다고 해 줘.”
“너 아까 내가 괜찮다고 했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던 아나스타샤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에르네스트가 뻔뻔하게 구는 것도, 아나스타샤의 연주에 대한 답으로 피아노에 앉으려는 것도. 전부 이유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아나스타샤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걸 부정할 순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손가락 다친 건 진짜잖아. 네가 안 괜찮은 것 아냐?”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이깟 게 뭐 대수냐는 듯 말했다.
“괜찮으면 잘 될 테고, 괜찮지 않으면 잘 안 되겠지.”
“미쳤니?”
“아마 괜찮을 거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이런 소릴 들었다면 장난치지 말라고 화부터 벌컥 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에르네스트가 전혀 장난 같은 걸 치고 있지 않다는 걸 느낀 아나스타샤는 조용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