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7화
에르네스트는 놀란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
아나스타샤는 주로 혼자 연습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스타일이었지만, 얼마 전 미국 포트워스에서 상을 타 온 후부터는 종종 연주를 들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녀의 연주는 굉장히 테크니컬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의 음색을 지니고 있어서 낭만주의 시대부터 현대음악까지 모두를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되었다.
언제 어디에서 연주하든 많은 주목을 받고 인기를 끌 만했다.
그러나 음악성의 발현이나 내적 표현의 부분에 대해선 아직 그 방식이 미흡하게 보이는 부분이 여럿 있었다.
어떠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지 못하고 단어나 문장을 그대로 읊는 듯한 미숙함이 바로 그러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겨우 열여섯 살이었고, 그만큼 음악을 컨트롤하는 능력이나 감정적 체험도 부족할 테니까.
음악가로서 직업병 같은 것이 있는 에르네스트는 친구를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제넘게도 그런 생각 등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다.
물론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그런 단점들을 금방 떨쳐 내고 어느 순간 분명 진면목을 보여 줄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평가는 정말 주제넘은 짓이었다.
아나스타샤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자신의 실력을 곧이곧대로 보이고 있지 않았다.
‘근래 저 애의 연주라면 자주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상을 타 온 이후로 독주곡도 많이 들어 보았고 얼마 전 피아노 퀸텟 연주도 들어 봤다.
그 노련한 연주자들과 함께 곡을 이루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실력자들은 단순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상승작용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아나스타샤는 분명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음악을 연주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건 협연자로서의 최선이었다.
솔리스트인 아나스타샤 세르게예브나 이즈마일로바가 준비한 무기는 주변의 방해물이나 족쇄가 없을 때 비로소 광채를 발한다.
“…….”
열 번을 연주하면 열 번 모두 성장을 보이는지라 더 여유가 있을 것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숨겨 둔 곡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었다.
아나스타샤는 종종 경쟁심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기도 했었으니까.
에르네스트는 그것을 예상하면서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상황은 닥쳐 봐야 아는 것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음악을 이미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나스타샤를 연주자로 끼운 곡까지 작곡 중이다. 친구의 음악을 피아니스트로서 뜯어보고 분석까지 마쳤던 것이다.
오차 범위를 조금 두더라도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으리라 장담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분석은 이제 모조리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연주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그중에서도 앞부분만 잠깐. 겨우 2분 30초 정도 될까 싶은 짧은 노래였다.
그 한 소절만으로 아나스타샤는 이전까지 미숙해 보이던 자신의 모든 연주를 다 덮어 버리곤, 능력을 증명하고 그 가치를 입증해 냈다.
바로 저번 주까지도 무슨 연주를 했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로 확연한 수준 차이가 보이는 연주였다.
혼돈과 죽음. 결코 겪어 보지 못했을 관념에 완벽히 심취하며 그녀는 자신의 칼날을 에르네스트에게 들이밀었다.
건반을 짚는 행위로 공기의 떨림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음파가 닿는 모든 공간을 장악하는 듯한 그 지배력은 타티아나의 음악과 흡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건 맹목적으로 따라 하고자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길을 따라 걸으며 무언가를 갈구하며 손을 뻗었고, 결국 그곳에 닿은 것이다.
“…….”
에르네스트는 이 감각을 안다.
올 봄, 타티아나가 쇼팽의 소나타 1번을 연주하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그가 걱정하면서도 믿고 기다렸던 것은, 그 연주가 분명 다시 타티아나를 일으켜 세우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의학적 근거나 이유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단지 음악가로서 알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에르네스트는 알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혼란스러워하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물러설 생각이 없다. 뭐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음악을 무기로 에르네스트를 무릎 꿇릴 작정이었다.
그녀가 만들어 온 이 쇼팽 소나타 2번은 충분히 그 정도로 날카로웠다. 4악장까지 있는 이 소나타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게 양손 가득 무장한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눈만 들어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결이라고 못 박고 시작했으면 절대 이 정도로 안 끝냈을 것이란 눈빛.
에르네스트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길게 안 할 거야.”
“마음대로 하시지?”
그녀는 퉁명스레 내뱉으며 다리를 꼬았다. 스마트폰을 들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웠다.
피아노 앞에 앉은 에르네스트는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는 그녀에게 그 역시 예의를 지켜 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소나타 2번에 이어 할 수 있는 곡은 한 곡뿐이었다.
“…….”
포르티시모로 터져 나오는 마단조의 거대한 화성.
에르네스트는 양손으로 기둥을 세우고는 그 사이를 아르페지오로 채워 나갔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째 주제까지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뒤에 다시 피아노가 반복하며 홀로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오케스트라도 없고 중간부터 뚝 떼어 시작한 셈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레 있지도 않았던 앞부분이 마치 있었던 것처럼, 그는 더더욱 음악을 응축시켰다.
‘……신경 쓰이네.’
왼손이 따끔거린다.
낚시 바늘에 찔렸던 손가락으로 건반을 짚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프다고 하기에도 애매할 정도로 미미한 통증이었으니. 그러나 그 미세한 통증이라도, 신경을 타고 전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온전히 전 신경과 감각을 피아노 연주에 쏟아부어도 모자를 판국에, 쓸데없는 통증이 그 일부분을 갉아먹는다는 것은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취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에르네스트는 최대한 손 상태엔 신경 쓰지 않으며 건반의 깊이와 소리의 울림만을 느끼려 애썼다.
다행히 피아니스트로서 오랜 시간 훈련된 감각은 그의 집중력이 이끄는 대로 따라와 주었다.
“…….”
쇼팽 특유의 루바토와 리듬. 그 박자를 왼손으로 이어나가면서 오른손으로도 역시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선율을 연주한다.
1830년 작곡된 곡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이 음악은 연주자의 역량을 여과 없이 전부 드러낸다.
물론 20세의 젊은 나이에 쓴 곡이니만큼 빈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 곡의 단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로 피아노 협주곡임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의 비중이 굉장히 적다는 것이었다.
피아노 솔로로 연주해도 문제가 크게 안 느껴질 정도로, 균형이 피아노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오케스트라는 뒷전에 가깝다.
젊은 쇼팽의 치기와 편애라고도 할 수 있는 단점이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꼬집어 짚는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더더욱 화려하게 연주하길 원하고, 쇼팽 콩쿠르에서도 원곡 그대로의 연주로 시험에 오르게 한다.
지금도 이 곡이 오케스트라를 크게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이 에르네스트에겐 굉장히 유리한 점이 되었다.
타티아나가 종종 하는 것처럼 총보를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는 건 에르네스트도 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럴 것 없이 맡겨진 파트만 연주하더라도 연주가 끊어지는 일은 없다.
그리고 온전히 피아노 파트만 연주하는 것이 바로 피아노 연주자로서 아나스타샤에게 그가 보내는 답가였다.
클래식 음악가로서 규칙과 명예를 존중하는 아나스타샤는 그 무엇도 잘못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제대로 보고 있고, 결코 우습게 여기고 있지도 않으며, 그녀가 원하는 가장 큰 무대에서 상대해 줄 작정이다.
“…….”
피아노의 주도로 아름답게 발현되는 주제를 마무리 짓고, 에르네스트는 연주를 멈췄다.
단 3분 정도의 연주.
그는 이 협주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할 수 있었지만 길게 하지 않겠단 약속을 지켰다. 아나스타샤가 연주했던 것이 딱 이 정도이기도 하고.
오늘 나눈 이야기로 서로의 생각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실력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답답했던 부분은 조금 해소되었으리라 생각하며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설마 승패를 가리려는 건가?
후회 없도록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잠깐 실력만 봤을 뿐인데 따질 수 있으려나 싶다.
그리고 지금 쇼팽만 놓고 본다면 큰 차이 없이 비슷했다. 물론 손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최선을 다한 연주였다.
에르네스트는 이 정도로 무언가 급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만 있으면 말해 보란 뜻으로 에르네스트가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랬더니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르네스트.”
“응.”
“너 피나.”
“응?”
그제야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손이 피투성이라는 걸 보았다. 눈으로 보고 났더니 갑자기 더 따끔거린다.
아직 좀 아플 뿐이지 대충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속으로 투덜거리던 에르네스트는 대충 손수건으로 손을 닦아 내려다가, 지금 닦을 게 손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피아노를 보니 건반도 왼쪽이 붉게 얼룩덜룩했다.
“어쩐지 미끄럽더라…….”
건반에 예민한 에르네스트는 묘하게 손끝이 미끄러진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고 정확하게 연주하는 데에 더더욱 신경을 쏟았다.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나스타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몰랐니? 난 방해하지 않으려고 아무 말 않고 있었던 건데.”
“몰랐어. 난 건반 잘 안 보거든.”
“그래도 어떻게 그걸 모르지?”
황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아나스타샤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상황이 웃긴 모양이다.
“괜찮니?”
“그냥 피만 좀 났을 뿐이야.”
“남자다운 척하긴.”
픽 웃는 그녀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눈썹을 치켜세웠지만 무어라 할 생각은 안 들었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일어난 아나스타샤는 옆으로 다가오더니 피아노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다가 슥 손을 뻗어 건반을 만졌다. 피가 묻은 건반은 당연히 미끄러웠다.
그걸 왜 직접 만져서 확인하냐고 묻기 전, 아나스타샤가 손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달라는 뜻이었다.
그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아나스타샤는 깨끗한 면으로 손끝을 닦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런 손과 이런 건반으로 어떻게 그렇게 연주한 걸까…….”
연주에 대한 감상이라는 건 알겠지만, 아나스타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진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아나스타샤가 다시 손수건을 돌려주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는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눈가에 매달고 있었다.
“작곡에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피아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구나. 에르네스트.”
“작곡은 책상머리에서만 하는 게 아냐.”
작곡한 음악을 즉석에서 피아노로 쳐 보고 현실의 음악이 머릿속의 것을 몇 퍼센트나 재현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가끔은 상상의 음악을 구현해 내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테크닉을 구사하려 노력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이미 여러 피아니스트들로 검증된 곡으로 연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도를 가능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 그렇지.”
아나스타샤는 짧게 웃더니 약간은 허무하다는 듯 말했다.
“네가 피아노라도 못 쳤으면 좋았을 텐데.”
만약 에르네스트가 이것저것 다 달려들면서 어느 하나 제대로 못하는 반푼이였다면 아나스타샤는 너무나 쉽게 그를 찍어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하면서도 어느 하나 쉽게 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로선 그 점을 분명 인정해 주면서도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나스타샤는 이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듯 피아노를 곁눈질했다.
“저거 닦는 거 도와줄까?”
“……됐어. 내가 할게.”
“알았어. 그럼 난 루미놀 같은 걸 구해 봐야겠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루미놀luminol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혈흔을 검출하는 지시약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 본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쉬며 물었다.
“요즘 범죄 드라마 같은 거 봐?”
“네가 제대로 닦았는지 확인해 봐야지.”
“아무리 잘 닦아도 검출된다는 건 알지?”
그도 잘 알진 못하지만 혈흔을 지우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특히 루미놀 검사 같은 것까지 한다면.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열심히 닦아야겠지?”
“……너 내 말은 안 듣는구나?”
조금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듯 장난을 걸어왔다.
에르네스트는 당분간 그녀를 이겨먹을 수 있는 일은 없겠구나 싶다가도, 문득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