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68화 (768/1,277)

##  768화

어젠 아예 오후 연습을 하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혼자 연습할 것이라면 학교에 있을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와 듀엣 곡을 다시 더 연습하고 협주곡도 물어보고 싶은 구간이 몇 군데 있었지만, 어젠 아나스타샤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약간 다툼이 있었던 것에 대한 그녀 나름의 사과 방식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왜 다툼이 있었는진 분명하지 않지만 주말에 컨트리클럽에 놀러갔다 온 일로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연습하러 갈까요? 에르네스트.”

아무튼, 어제는 아나스타샤가 에르네스트를 데리고 스무 가지도 넘는 의견을 내며 들들 볶았을 테니 오늘은 내 차례였다.

나야말로 어제 못다 한 연습 등을 하려고 하면 오늘 몇 시간이라도 부족했다.

크게 피곤하거나 하지 않다면 저녁 때까지 연습을 하고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하려던 때였다. 에르네스트는 약간 고민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나 오늘은 작곡만 하려고. 내일 하면 안 될까?”

“내일요?”

어제도 오늘도 이틀이나 혼자 연습하라는 말인가요?

이제 연주회까지 날짜도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는데 듀엣 연습을 이틀씩 빠져서 괜찮을지 모르겠다.

물론 그사이 놀고 있는 게 아니라 혼자서 연습을 해서 각자 수준을 더 높여 놓으니까 텀을 두어도 되긴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늘 볼 수 있는데 띄엄띄엄 연습하려니까 갈증이 난다.

물론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고 일정이 있으니 맨날 할 순 없겠지.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잠깐도 안 되는 거죠? 집중하셔야 하니까?”

“오늘은.”

“그런가요…….”

“스터디룸에서 계속 이 오선지만 붙잡고 있을 거야.”

“스터디룸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시창에 능한 그가 아무 곳에서나 작곡을 잘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보통은 피아노를 앞에 두고 작곡을 하는 일이 많았다.

즉석에서 곡을 시연해 볼 수도 있고, 또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스터디룸에서 하겠다고 하니 조금 의아했다.

“개인 연습실에서 하실 줄 알았는데요.”

“어…… 책상머리를 지키고 앉아서 쭉 써 내려가 보려고.”

그럴 거면 집으로 돌아가서 방에서 하셔도 되지 않나요? 훨씬 조용할 텐데.

그러나 난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스터디룸에서 하겠다고 했겠지. 그걸 굳이 돌려보낼 필요는 없었다.

“음…… 알겠어요.”

어쨌건 학교에 있겠다고 하니 납득하기 쉬웠다. 그리고 이렇게 된 김에 나도 오후엔 공부나 할까 싶었다. 어차피 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기도 했고.

난 생각나는 것들을 하나씩 꼽아 보면서 말했다.

“그럼 저도 오늘은 공부랑 연구나 할래요. 연습은 집에서 해야겠네요.”

“……어?”

“같이 가요, 스터디룸.”

그는 내가 따라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분명 내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작곡을 하다가 의견을 구할 일이 생긴다면 내가 옆에서 답해 줄 수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져다줄 수도 있고.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단체로 공부하는 스터디그룹이라는 게 그렇게 하라고 모인 집단이니.

“갈까.”

에르네스트가 먼저 가방을 들고 일어섰고, 난 그 뒤를 따랐다.

반을 나서기 전에 안에 있는 친구들을 슥 돌아보았으나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디 나가 있는 모양이다.

복도로 나와 각각의 오후 일정에 맞추어 움직이는 발소리들에 섞여들었다. 복도를 울리는 소리들은 언제 들어도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앞서 걷던 에르네스트가 슬쩍 발걸음을 멈추더니 나와 나란히 걸었다. 내가 올려다보니 그가 물었다.

“무슨 공부 하려고?”

“오늘 받은 수학 과제랑 음학사 과제…… 그리고 작문 레포트도요.”

“그건 다음 주까지잖아?”

“미리 하면 좋잖아요?”

난 숙제를 미루지 않는 편이었다. 받은 과제는 바로 그날 밤에 마무리 짓는 편이다. 가끔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과제들도 밤마다 조금씩 하면 다 해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이 불가능한 분량의 과제를 낸다고 불평불만이지만, 난 그래도 할 수 있는 정도로 내 주신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실제로 해내고 있고.

오늘은 밤까지 가지 않고 이렇게 오후에 스터디룸에서 하게 되었으니 아마 훨씬 더 일찍 끝날 것 같았다. 아예 다른 공부도 조금 더 해야겠다.

“그리고 헝가리 광시곡에 대한 연구도 조금 더 하려고 해요.”

“어지간히 했다고 생각하는데.”

“어제 다른 음반을 들어 봤는데, 제가 놓친 느낌이 있는 것 같아서요.”

“놓친 것?”

“예. 설명하긴 어렵지만…… 지역적 특징이나 문화적 배경에 기반한 무언가라고 생각해요.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요.”

정답이 딱 주어져 있는 어떠한 해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뉘앙스나 느낌에 달려 있는 미묘한 요소들은 그냥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신경 써서 살려 낸다면 곡의 디테일에 굉장한 영향을 준다.

난 그러한 디테일을 추구하기 위해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고, 실제로 찾아가 보는 일도 있었다.

물론 지금 헝가리에 가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으니까 일단은 책과 태블릿 컴퓨터로 연구해 볼 생각이었다.

멈추지 않고 걷던 에르네스트는 일견 날 보더니 툭 말했다.

“정말 공부를 쉬질 않네.”

“……에르네스트에 비하면 약과죠.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을 다 하시면서 거기에 작곡도 하시는 거잖아요?”

“누가 시킨 것 아니니까 뭐.”

그는 쉽게 말하고 있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사람들은 으레 천재들에게 이것저것 많은 활동을 바라지만, 그것이 의무로 주어져 있진 않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이제 그 일부분을 의무처럼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작곡에 힘쓰는 모습이 특히 그리 보였다.

분명 음악가로서의 본성이 원하기에 하고 있겠지만…… 난 어쩐지 그가 조금은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들도 그의 걸음에 브레이크가 될까 난 그것이 두렵다. 그래서 약간은 다른 부분을 물어보았다.

“원하는 건 전부 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 어떤 힘겨운 일이라도, 원해서 한다면 견뎌 낼 수 있다. 난 그 부분을 믿는 사람으로서 에르네스트 역시 잘 해내길 바란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까딱였다.

“노력 중이야.”

“그렇겠네요…….”

아직 열여섯 살인 그가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노력 중이고, 앞으로도 쭉 그러하겠지. 난 그런 그를 옆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켜보고 싶었다.

“전부 잘 되길 바라고 있어요. 진심으로요.”

“……응.”

그는 별말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잠깐 걷자 스터디룸까진 금방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섰다. 그 안에 있던 두 사람이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오.”

리처드와 한승우. 두 유학생이었다.

두 사람도 같이 무언가 공부를 하고 있었던 듯하다. 리처드가 손을 들었고 난 허공에서 하이파이브 하듯 그에게 맞춰 손을 들어 보였다.

리처드는 씩 웃더니 내게 물었다.

“이번엔 누구 찾으러 왔어?”

저번에 아나스타샤를 찾으러 다녔을 때를 떠올린 것 같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공부하러 온 거예요.”

“공부? 너희 학기초부터 연주회 잡혀서 그거 준비 중이잖아?”

“연주회는 연주회고, 공부는 공부죠.”

“간만에 타티아나의 모범생 멘트 들으니 갑자기 공부할 의욕이 생기네.”

그간 잘 오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것 같은 기분이지만, 리처드는 굳이 그 점을 짚기보단 너스레를 떨며 날 반겨 주었다.

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난 그 옆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두 분은 자주 오셨죠?”

“좁아 터진 기숙사보단 여기가 훨씬 낫지. 숙제나 대충 해 놓고 가려고.”

“나도.”

한승우도 자신의 노트를 툭 치며 말했다. 같이 공부하는 쪽이 그로서도 도움이 되는 듯 보였다.

슬쩍 다가가 보니 작문 레포트를 쓰는 중이었다. 난 독수리처럼 멀찌감치에서 그 글자들을 쭉 읽어 내렸다. 필체는 물론이고 문장 구조나 어법에서도 상당한 발전이 보였다.

그런데 내용을 보여 주긴 부끄러운지 한승우가 손으로 노트를 슥 덮으며 물었다.

“왜?”

“이젠 정말 잘하는구나 싶어서.”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

정말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한승우도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겠지만, 내가 그를 돕기 위해 예전에 단어장을 만들어 시험을 보면서까지 하나하나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러고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 9학년도 잘 보내고 10학년이 된 한승우를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다.

물론 이런 시선만 가지는 건 그에게 불공평한 일이었다. 올 봄만 하더라도 슬럼프에 빠져들던 날 건져 올려 준 건, 바로 빚을 갚겠다고 쇼팽 소나타 1번을 복구시켜 온 그였으니까.

우린 서로 도움을 받거나 도울 수 있는 관계였다. 난 2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을 이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그렇게 두 명과 인사를 나누며 나와 에르네스트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리 공부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스터디룸 문에서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누군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안쪽을 쭉 살피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갑자기 꽃이 만개하듯 활짝 피었다.

“언니!?”

벌컥 문을 열면서 류보비가 뛰어 들어왔다. 난 그녀를 안아 주다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요즘은 체력이 조금 좋아져서 다행이다.

난 류보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것 같죠? 류보비.”

“어떻게 된 거예요? 연주회 끝났…… 아닌데? 한참 남지 않았나?”

류보비는 한참이나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에르네스트는 개학하자마자 연주회가 잡혀서 스터디룸엔 거의 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온다 하더라도 그땐 류보비가 레슨이나 합창 리허설 등으로 오지 못했고.

여러 이유로 못 보다가 간만에 보니 그녀는 굉장히 반가워하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별일은 없었다. 그저 혼자 연습하느니 같이 공부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

“한동안 제가 연습만 하느라 못 왔었죠. 오늘은 공부하러 왔어요.”

“머리 식히러 온 거네요?”

“…….”

공부하러 왔다니까 왜 머리 식힌다는 말이 나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옆을 보니 다들 너무 간단하게 납득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피아노에 미친 사람처럼 보여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해 봐야 당연히 자폭일 게 뻔했다. 난 류보비의 말에 반박하는 건 포기하고 그녀를 따라 들어오는 두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나톨리도 사샤도, 몇 주 사이 더 큰 것 같네요? 제 착각인가요?”

“안 재 봐서 모르겠어요.”

아나톨리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난 멀리서 봐도 그가 몇 센티는 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스스로의 키는 인지하지 못해도 다른 사람을 살피는 눈썰미는 좋은 편이다.

게다가 아나톨리는 약간 걸음걸이가 이상하기도 했다. 난 단번에 알아보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무릎이 아프거나 하진 않나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후후, 척 보면 알죠.”

아나톨리는 정말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난 의기양양하게 웃다가 그에게 조언했다.

“성장통이 온 걸 테니 식사 골고루 잘 하시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을 거예요. 아시겠죠?”

“……네.”

남자애들은 나중에도 키가 크긴 하지만 일단은 성장기일 때 잘 자라 놓는 게 중요할 테니까……. 그런데 말하고 보니 또 선생님이나 할 법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런 버릇도 고쳐야 하는데.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워낙 자주 들어온 아이들은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그간 못 본 반가움을 표시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류보비와 아나톨리는 물론이고 사샤도 은근히 응석을 부려 온다.

이러면 에르네스트가 섭섭해하진 않을까 싶었지만 두 사람은 매일 볼 테니 오늘은 내가 사샤를 예뻐해 줘도 되는 것 아닐까?

일단 공부는 둘째 치고 그간 못 한 이야기나 조금 할까 싶었는데 리처드가 불쑥 말했다.

“이렇게 보니 이 스터디 그룹 멤버가 이렇게 모인 것도 오랜만이네. 그럼 누구누구 없는 거지?”

“아나스타샤랑 발렌티나.”

“그 애들 두 명만 더 오면 정말 다 모이는…….”

그리고 그 말이 나오자마자 문이 탁 열리며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가 들어왔다. 리처드가 킥킥거렸다.

“말하기가 무섭네.”

“뭐니?”

아나스타샤는 왜 그렇게 보냐는 듯 도끼눈을 했지만 리처드는 저기 앞에 앉으라는 듯 손짓만 팔랑팔랑 해 보일 뿐이었다.

스터디룸 안은 친구들의 목소리로 꽉 찼다. 공부를 하고자 모였으니 집중을 해야겠지만 그것을 중재할 사람인 나부터가 조금 정도는 시끄러워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나도 친구들과 즐거운 이야기를 조금 정도는 하고 싶으니까.

한 가지 걱정은 작곡에 열중하고 싶다는 에르네스트였는데, 살짝 옆을 보니 그는 아예 턱을 괴고 이쪽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일해야 하지 않나요?

내가 눈빛으로 물어도 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낮게 웃으며 손을 저어 보일 뿐이었다. 지금도 그가 날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난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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