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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69화 (769/1,277)

##  769화

스터디룸의 분위기는 도저히 공부나 무언가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9명 중 10학년 친구들은 매일같이 교실에서 보니 할 이야기가 없을 법도 한데, 이렇게 교실이 아닌 다른 공간에 모여 앉아 있으니 없던 이야기도 생겨난다.

“아, 맞아. 타티아나. 물고기는 어떻게 해서 먹었어?”

“물고기요?”

“저번 주에 잡은 것 말야.”

아나스타샤가 물어보았다. 저번에 내가 낚아서 가지고 간 물고기를 구웠는지 튀겼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사실 딱히 요리할 기회가 없어서, 손질하는 법만 드미트리에게 배워서 한 뒤에 그냥 냉장고에 넣어 둔 상태였다. 고개를 저으며 다음에 오면 해 주겠다고 하려던 차였다.

“무슨 이야기야?”

“아.”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우리 이야기를 듣고 끼어들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다니던 강아지가 눈을 반짝이는 것 같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말실수를 했다는 듯 당황하자 발렌티나는 조금 더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영민한 그녀는 잠시 후 정확하게 진실을 추리해 냈다.

“잠깐만…… 뭐야? 너희 혹시 나 빼고 놀러갔었어?”

“빼고 가려던 게 아니라…….”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발렌티나를 보니 나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직전에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가 다투다가 즉흥적으로 급하게 정해진 일정이었으니까.

누군가를 초대할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거니와, 만약 다른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갔다면 두 사람이 금방 화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당사자들끼리 시간을 보내며 여유를 가졌기에 해결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자니 제대로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아나스타샤 역시 난처해하기만 했다.

그때 에르네스트가 수습에 나섰다.

“나도 있었어.”

“어!?”

나와 아나스타샤 둘만 갔었던 걸로 생각했는지 발렌티나가 깜짝 놀라했다. 에르네스트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별건 아냐. 저번 주에 문화부 장관을 앞에 두고 리허설 하는 바람에 다들 조금 과하게 몰입되어 있었거든.”

“무, 문화부 장관?”

“그래서 분위기 좀 풀려고 교외에 잠깐 바람 쐬러 갔었어.”

에르네스트는 이야기의 초점을 프세볼로트 장관 쪽으로 돌리면서 발렌티나를 당황시켰고, 단순히 놀러간 게 아니라 마치 사무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야유회를 간 것처럼 뉘앙스를 바꾸어 놓았다. 노련한 말솜씨였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의 온도가 살짝 떨어졌다. 문화부 장관 앞에서 리허설을 한다는 상상만 해도 다들 소름이 돋는다는 표정이었다.

발렌티나는 에르네스트가 교묘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것 같았지만, 우리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괜한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컨트리클럽이었는데, 별것 없더라.”

“낚시했다며?”

“낚시도 있더라고.”

세 명만 갔다 왔던 이야기를 납득시키는 건 어떻게든 에르네스트가 수습해 주었지만, 그다음으로 우리는 디테일한 관심을 받아 주어야만 했다.

“물고기 잡았어요?”

“낚시를 어떻게 해요?”

컨트리클럽에서 낚시를 한 이야기는 뜨거운 주제로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다들 저번 주말에 공부하거나 연습했던 이야기나 하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다. 그중엔 낚시를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나톨리는 낚시를 하려면 바다로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저번 주가 낚시가 처음이었던 건 마찬가지이지만, 약간 미안함을 느끼며 말했다.

“다음에 같이 가기로 해요. 제가 무언가 가르쳐 드릴 순 없겠지만…… 음, 미끼를 끼워 드릴 순 있어요.”

“……미끼요?”

“지렁이?”

“악!”

미끼라는 단어도 잘 모르는지 아나톨리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사샤가 순진하게 받았고, 류보비는 생각만 해도 징그럽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흥미진진하게 듣던 아이들은 진저리치며 조금 차분해졌다.

나중에 같이 놀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웃으며 바라보니, 다들 안색이 조금 파랗게 질렸는데…… 혹시 미끼로 장난이라도 칠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기대해 준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 주고 싶어지는데…… 고민이다.

“흠.”

그런데 리처드는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엄격한 재판관으로서 이 사태에 판결을 내려야겠단 표정이다.

“나중에 가는 건 가는 거고. 음, 주말에 재미있게 놀고 온 것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순 없겠는데.”

“뭘 못 넘어가?”

“다들 물고기와 호수를 생각하다가 목말라하는 거 안 보여?”

피의자 아나스타샤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듯 대꾸했다.

“넌 호수 물도 마시니?”

“이렇게 눈치 없는 사람인 줄 몰랐는데. 아나스타샤.”

“진짜…….”

대놓고 뇌물을 요구하는 리처드를 보며 정말 뻔뻔하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눈을 흘겼지만, 리처드가 정말 터무니없이 이해하지 못할 요구를 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다들 이야기하고 놀다 보면 결국 마실거리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점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넘어가 주진 않았다.

“그냥은 못 하지. 내기 해.”

“내기?”

“동전 튕길…….”

“거꾸로 나한테 떠넘기려고 하네, 너무 치사한 것 아니야?”

“들켰니?”

내기 운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없는 리처드는 아나스타샤에게 말려들어가면 분명히 자신이 사게 될 것이란 걸 지난 몇 년간 학습한 상태였다. 그는 절대로 운에 의거한 내기는 안 할 작정이다.

한발 양보하겠다는 투로 아나스타샤가 손을 내밀었다.

“좋아. 뭘로 할 건데?”

“마피아 게임은 다들 할 줄 알지?”

리처드는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파티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마피아 게임이라면 일전에 다들 우리 집에서 했었던 적이 있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그 즐거웠던 기억은 다시 순식간에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었다.

리처드는 흥미를 보이는 모두가 마음에 든다는 듯 웃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아직 밤이 안 왔으니까 다른 마피아 게임으로 하자.”

“그건 또 뭐야?”

“간단해.”

그가 제안한 건 단어 마피아 게임이라는 이름의 파티 게임이었다.

룰은 간결했다. 사회자를 제외한 참가자 8명 중 7명에겐 주제 단어가, 그리고 마피아로 정해진 1명에게만 다른 비밀 단어가 주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모든 참가자들이 받은 것은 그저 단어뿐이기 때문에 자신이 시민 편인지 마피아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서로 단어들을 유추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눈치껏 자신의 역할을 파악해야 했다.

“되도록 듣기만 하는 게 유리하겠네요?”

“그러면 진행이 안 될뿐더러 의심받아서 지목되겠지. 그리고 마피아에겐 마지막으로 뒤집을 기회가 있어.”

“기회요?”

“주제 단어를 정확하게 맞히면 역전승 할 수 있게 돼. 그러니까 가만히 있지 말고 주제단어를 유도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

요컨대 시민은 혼자서만 이상한 소리를 하는 마피아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고, 마피아는 오가는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고 주제 단어를 추리해 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낮밤의 개념이나 처형도 없는 단순한 게임 같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난 순수하게 다 같이 놀고 싶어서 살짝 들떠 있는데, 승부사인 리처드와 아나스타샤는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있었다.

“10학년들만 하는 걸로?”

“돈 내기가 될 테니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되나요……?

그런데 내기라도 상관없다는 듯 아이들이 먼저 끼어들었다.

“저희도 끼워 주세요!”

“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내기에 저학년들을 끼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리처드는 잠시 고민하더니 적당한 합의안을 내놓았다.

“그럼 얘들도 끼우되, 한 명씩 팀으로 맡기로 하자. 사샤는 에르네스트가. 류보비는 타티아나가. 아나톨리는 아나스타샤가. 어때?”

“그럼 우리가 너무 불리하잖니?”

“불리하라고 그렇게 정한 건데. 아, 첫 사회는 내가 볼게.”

“…….”

아이들 중 한 명이 지면 책임을 져야 하니 질 확률이 두 배보다 높다.

게다가 리처드까지 사회로 빠져 버리면 발렌티나와 한승우만 참가하게 되니까, 저번 주 컨트리클럽에 갔던 나와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가 음료를 살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듯 아나스타샤는 받아들였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서 그녀는 그만두거나 룰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래, 하자.”

“바로 시작해 볼까?”

게임은 바로 시작되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고, 리처드만 일어나서 사회자 위치에 섰다.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다. 리처드는 스마트폰으로 각각 참가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새우]

‘……?’

내게 도착한 단어는 새우였다.

이렇게 받고 보니 정말 막막했다. 새우가 7명에게 간 주제 단어인가? 아니면 비밀 단어인가. 내가 마피아인지 시민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옆을 보니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긴장감이 감돈다. 다들 게임엔 진심인 사람들이다 보니 경솔하게 나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중에서 먼저 입을 연 건 머리가 좋고 게임에 능한 아나스타샤였다.

“나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봤었던 것 같아.”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빙 둘러 하는 이야기다. 무엇을 말하는지 특정하긴 어렵지만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엔 적당했다.

다들 지금 가만히 있으면 의심당할 거라 생각했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나도 봤어.”

“나도.”

“저도! 저도 아빠가 보던 다큐멘터리에서…….”

류보비가 얼른 동조하려다가 순간 말실수라는 걸 깨달았는지 입을 막았다. 그런데 딱히 실수 같진 않았다.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범위가 굉장히 넓으니까.

“다큐멘터리?”

“오.”

“아, 아닌가?”

“아니, 맞아. 나도 다큐멘터리에서 봤었던 것 같아.”

“저도요.”

나도 슬슬 분위기가 이해되는 것 같아서 끼어들었다. 사실 본 적은 없지만 본 척했다. 새우가 해양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그리고 그런 내 추측에 한승우가 확신을 세워 주었다.

“그거 보니까 바다 가 보고 싶더라고.”

아. 정말 맞나 보다.

여러 정황이나 분위기로 봤을 때 분명 다들 새우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중 한 명이 분위기를 타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거지……?

난 가까이에 있는 아나스타샤부터 수사하기로 했다.

“이거, 아나스타샤가 좋아하시죠?”

“음…… 싫진 않지? 딱히 싫어할 이유는 없으니까.”

마피아인가?

너무 엉뚱한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본 내가 되레 당황할 정도였다.

평소 똑 부러져서 절대 이상한 말은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이렇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니까 더 재미있어졌다. 단어 마피아만의 묘미였다.

난 수사망을 점점 좁혀 나갔다.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음? 왜 놀라시나요? 의심되는데요?”

“……어?”

아나스타샤는 정말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난 그녀를 살살 놀리듯 더 몰아세웠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약간 묘했다.

“맛있다고?”

“이게 맛있나?”

“몰라, 안 먹어 봐서.”

“손질해서 먹긴 하나 보던데.”

갑자기 저마다 토론이 시작되었다.

손질? 새우는 당연히 손질해서 먹어야 하긴 하지만…… 이렇게 다들 생뚱맞다는 반응이 나오는 건 왜지?

순간 뒷머리로 싸늘함이 느껴졌다. 난 무언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는 기분으로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당황해하고 있기만 하던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타티아나.”

“……그, 예?”

“이거. 어떻게 손질해?”

약간 패닉이 왔다. 난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해 보았지만 이렇게 정확하게 물어본 질문을 대충 빠져나가는 방법 따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냥 내가 아는 그대로 말했다.

“어…… 껍질을 벗겨서…….”

“억.”

“잠깐, 그만.”

갑자기 테이블 위로 탄식이 쏟아졌다.

나 혼자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니, 리처드가 이쯤하면 되었다는 듯 물었다.

“자, 시민 여러분. 마피아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타티아나요.”

“타티아나.”

“타타아나네.”

“??”

상황 파악이 잘 안 된다.

난 일단 살고 봐야겠단 생각으로 변명했다.

“저, 전 아닌데요. 정말 아니에요.”

“스스로 마피아인지도 모르는 게 이 게임이 재미이긴 하지. 자, 타티아나는…….”

리처드는 가차 없이 내게 선고를 내렸다.

“마피아가 맞았습니다.”

“예……?”

마피아라는 말을 듣고도 뭔가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받은 건 그냥 새우라는 단어 한 마디였지, 리처드에게 마피아라고 설명 들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임 룰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당황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니 리처드가 희망을 가지라는 듯 말했다.

“역전의 기회는 아직 있지. 타티아나. 주제 단어가 뭐라고 생각해?”

“……???”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뭔가 해양 다큐멘터리에 나올 만한 생물이고…… 껍질을 벗긴다는 말에 다들 질색하는걸 보니 그렇게 안 먹는 건가?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문어?”

“땡. 답은 상어입니다.”

“상어요!?”

상상도 못한 답에 기겁했다.

깜짝 놀라 묻자 리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두들 상어 이야기를 했던 거예요?”

“응.”

“아.”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전 그러면 상어를 잡아먹…….”

“깜짝 놀랐잖아.”

갑자기 내게 상어가 맛있지 않냐는 질문을 들었던 아나스타샤는 드디어 한숨 돌린다는 듯 어깨의 긴장을 풀더니,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평소 이상한 소리는 잘 안 하는 편이면서 갑자기 이상해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모두들 진귀한 광경을 본 사람들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창피함에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리처드에게 말했다.

“다음 게임 해요…… 어서요.”

내 목소리가 조금 음산해져 있다는 걸 느꼈는지 리처드의 표정에 긴장이 서렸다. 하지만 그는 사회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근데 이거 뭐가 걸려 있었는진 알고 있지?”

내기에서 졌다는 건 나도 안다!

빨리 진행하라는 압력을 눈빛으로 잔뜩 보내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엔 저와 같이 가셔야 할 분을 뽑는 것으로, 다음 게임 해요.”

리처드는 여기서 게임을 끝내겠다고 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느꼈는지 재빠르게 진행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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