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0화
룰에 익숙해지지 못한 첫 판에 중요한 역할에 걸려서 바로 들킨 것이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리처드가 무작위로 역할을 나누어 준 것이라 믿는다면 승복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난 절대로 혼자선 못 간다는 집념으로 이어서 계속 하자고 졸랐고, 친구들도 막상 해 보니 재미있었는지 단어 마피아 게임을 이어 나갔다.
“너희 주제 단어는…… 소금? 맞지?”
“아, 너무 말을 많이 했어.”
“아쉽네.”
두 번째 게임은 마피아인 한승우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되면 시민 편의 7명이 모두 패배가 된다.
이 결과 그대로 내기를 이행하면 정말 한승우만 뺀 나머지 모두가 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시민이 패배했을 경우엔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마피아 한 명이 걸렸을 때만 나와 함께 음료를 사러 가는 것이다.
누가 걸릴진 모르겠지만 기대하는 중이다. 난 점점 더 몰입하면서 친구들과 게임에 임했다.
“사회 볼 사람?”
“제가 해도 돼요?”
“아예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할까?”
“그래도 좋겠네.”
중간에 리처드는 사회자에서 내려왔다.
어차피 이 단어 마피아는 처음 단어 제시만 제대로 하고 나면 그다음엔 사회자가 할 일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아이디어만 확실하다면 누가 하더라도 별 상관 없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사회를 보기로 하니 조금 더 흥미진진해졌다. 어떤 단어가 나올지 기대된다.
[브라키오사우르스]
“…….”
사회자 사샤의 메시지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사우르스……? 공룡인가?
분위기를 보니 다들 비슷한 단어를 받은 것 같았다. 카테고리가 비슷해야 게임이 재미있어지니 사샤도 아마 공룡 중에서 두 마리 정도를 골랐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참가자들이 공룡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일동이 침묵한 상황에서 난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사회자님.”
“네. 누나.”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괜찮을까요?”
“?”
사샤는 순간 브라키오사우르스를 왜 모르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약간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데, 내가 잘못한 건가?
난 당황했지만 그래도 한 번만 봐 달라는 뜻으로 웃으며 부탁했다.
“안 될까요?”
“그래도 돼요…….”
살짝 시무룩해진 사샤가 인터넷 검색을 허락했다. 그리고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다시 스마트폰을 들고는 각자 검색에 나섰다.
내가 찾아본 브라키오사우르스는 거대한 초식 공룡이었다.
“목이 굉장히 기네요…….”
조금 신기한 기분이라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옆에 있던 발렌티나가 귀신같이 그 말을 듣고는 날 추궁했다.
“어? 타티아나. 지금 굉장히 의심 가는 발언을 했는데? 목?”
“그, 어…… 뿔 이야기를 한 것이었어요.”
“뿔? 뿔이 어디 있어?”
“아…….”
망했다는 생각에 혹시 몰라 주제 단어가 뿔 달린 공룡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다.
결국 난 또 졌다. 이번엔 정말 억울했다.
하지만 어차피 음료수를 내가 사는 것은 정해진 상황이니까 별 상관 없었다. 내가 백 번을 지더라도 같이 음료수를 가지러 갈 사람은 데리고 갈 작정이었기에.
난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았고, 모두들 긴장 속에서 눈빛을 교환했다.
당연히 그 후로도 게임은 계속되었고. 한 바퀴가 다 돌기 전에 나와 함께 갈 희생자가 결정되었다.
“아, 이게 이렇게 걸리네.”
“잘 빠져나갈 뻔했지만, 아쉬웠어. 아나스타샤.”
주제 단어는 셔츠였는데, 코트를 비밀 단어로 받은 아나스타샤가 방심하다가 그만 마피아로 특정되어 걸린 것이다.
눈치가 빠른 그녀도 잠깐만 방심하면 걸릴 정도로 모두들 이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게임을 마치고 나면 힘이 쭉 빠질 정도로 긴장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두 명의 패자가 정해지고 나자 리처드가 손짓했다.
“두 명 갔다 오지 그래?”
아나스타샤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말했다.
“아직 난 사회자 못 해 봤잖아. 이렇겐 못 가. 마지막으로 해.”
“거참 끈질기네.”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리처드는 금세 꼬리를 내리고는 그럼 사회를 맡아 보라는 듯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아나스타샤는 일어나선 단어를 고민하는지 팔짱을 낀 채 손끝으로 팔을 툭툭 쳤다.
잠시 후 그녀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메시지 보낼게.”
그녀가 마피아를 어떻게 선정할진 몰라도 이번엔 내가 아니겠지. 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며 내게 날아올 단어를 기다렸다.
***
리처드가 간만에 재미있는 게임을 가지고 왔어.
늘 내기를 한답시고 이상한 게임을 하다가 자기가 걸려서 억울해하더만, 그래도 학습능력이란 게 있는가 보다.
다른 마피아와 합을 맞추거나 누군가를 저격해서 원한을 살 일도 없고, 또 단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올 때까진 자기 역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무작정 다른 사람을 마녀사냥하는 것도 불가능한 게임이다.
이런 구조이다 보니 말발이 센 아나스타샤가 게임을 휘어잡거나 하는 일도 없이 꽤 균형이 괜찮았다.
에르네스트는 오랜만에 리처드를 인정하면서 즐겁게 단어 마피아 게임에 임했다.
“…….”
이번 사회자는 아나스타샤였다. 모두들 침묵 속에서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만 바라보았다. 어떤 단어가 날아올지 기대되었다.
아까 사샤가 공룡 이름을 보냈을 땐 정말 황당했었는데, 아나스타샤라면 독특하면서도 상식적인 단어를 적절하게 보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메시지를 확인한 에르네스트는 사샤에게 메시지를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당황해했다.
[타티아나]
이거 타티아나를 부르려고 보내려다가 잘못 보낸 건가?
왜 친구 이름을 보내왔는진 모르겠지만, 인물을 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 이 또한 사회자의 자유였다.
에르네스트는 혼란스러운 기분에 자기도 모르게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무 문제 없다 이 말이지……?
에르네스트는 주제 단어인지 비밀 단어인지 모를 이 이름을 가지고 게임에 임하기로 했다.
“…….”
한동안 눈치를 보며 서로의 안색을 살피던 친구들은 쉽게 대화를 시작하지 못했다. 다들 타티아나의 이름을 받은 걸까? 아니면 나 혼자만?
에르네스트는 일단 가만히 있어 보기로 결정하곤 분위기를 살폈다.
처음 화두를 던진 건 발렌티나였다.
“유명하지?”
“그렇지.”
타티아나는 유명하다면 유명하다 할 수 있겠지만 약간 아리송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마피아가 주제 단어를 못 알아맞히게 하는 것 또한 시민들의 중요한 임무라 빙 둘러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리처드는 사회자의 심리를 읽어 보겠다는 듯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카테고리라면 어떤 인물이라는 건 같겠네.”
“아마도?”
다들 몇 번 하다 보니 게임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다.
적당히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두드러지는 두 단어를 제시했을 때, 게임이 정말 재미있어진다.
어느 정도 카테고리가 비슷할 것이란 확신이 든 친구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난 이 사람 존경해.”
“응. 나도.”
“나한텐 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
타티아나라는 단어를 받은 에르네스트는 순간 웃어 버릴 뻔했다가 간신히 참았다. 한승우, 너 그 정도야?
물론 한승우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받아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에르네스트의 입장에서는 마치 타티아나가 잔뜩 추켜세워지는 것 같은 광경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자 에르네스트만 비밀 단어를 받았다는 것이 보다 확실해졌다. 류보비가 고개를 갸웃거린 덕분이었다.
“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누구지?”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다른 친구들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류보비 바로 옆자리에 있는 게 타티아나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일단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역할을 파악했다. 타티아나라는 비밀 단어를 쥔 마피아. 그럼 지금부턴 자신이 마피아라는 걸 들키지 않고 주제 단어를 알아내는 것이 임무였다.
그런데 그런 그를 가만히 주시하던 리처드가 툭 물었다.
“넌 왜 가만히 있어? 의심 가게.”
“그래. 에르네스트. 혹시 싫어해?”
주제 단어로 오른 인물에 관한 이야기일 테니 지금 분위기에 맞춰 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복잡한 계산 없이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데.”
“오, 얼마나?”
다들 신기한 듯 물어보지만 에르네스트는 지금 주제 단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 뭔가 흥미진진한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한 명 더 꼽자면 이 단어를 제시한 사회자 아나스타샤까지 포함되겠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이런 상황을 만든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에선 제일로.”
“뭐?”
그 말에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분 돌아가신지 오래되지 않았어?”
“한참 됐지.”
이미 작고한 누군가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별 신경 쓰지 않고 아나스타샤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다른 참가자들이 토론하는 것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조금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래.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결론이 난 것 같은데. 자, 투표를 해 볼까요?”
“에르네스트지 이건.”
“단순 말실수가 아니라면 에르네스트밖에 없는데?”
잡아뗄 여지도, 생각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양손을 들며 자백했다.
“그래, 내가 마피아인 것 같네.”
마지막 게임이 너무 쉽게 끝나서인지 다들 약간은 아쉬워했다. 그래도 아나스타샤는 끝까지 장난스런 어조로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대화가 굉장히 짧았는데…… 기대되네. 에르네스트. 역전해 볼래? 이 아이들이 이야기하던 주제 단어가 뭐였을 것 같아?”
에르네스트는 방금 전까지 친구들이 칭찬하던 걸 떠올렸다. 그는 타티아나에게 그 칭찬들이 향하는 것처럼 느꼈지만, 혼자서 느끼는 그런 기분도 정도가 지나치다 생각했다.
그래서 전혀 관련 없는 쪽으로 살짝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글쎄, 스탈린?”
“야!”
살짝이 아니라 너무 갔나.
여기저기서 식겁한 표정으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지금 분위기 파악 못하냐는 듯한 눈빛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분위기를 너무 잘 파악했기에 일부러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아니면 말고. 피아니스트인가?”
“……다 알면서 그런 농담을 하면 어떡해요. 형.”
“진짜 저 자식 제정신 아니야.”
리처드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지만 에르네스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너희 단어가 다른 거면 상관없잖아. 그래서 뭐였는데?”
“라자르 라우모비치 베르만.”
정말 존경할 만한 피아니스트였네.
하지만 대화가 너무 빨리 끝나서 도저히 맞출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에르네스트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단어 마피아를 하면서 아나스타샤가 내준 특별 게임까지 함께 수행한 기분이다.
다만, 어떤 이유로 아나스타샤가 이런 상황을 에르네스트에게 만들어 주었는진 아직도 알기 어려웠다.
그녀는 종종 이렇게 에르네스트를 도와주는 것 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분명 어떠한 이유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물어보더라도 잘 말해 줄 것 같진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을 잠시 내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드니 한승우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에르네스트, 넌? 뭘 받았는데?”
베르만을 신처럼 여긴다고 했던가. 에르네스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픽 웃으며 대답을 거절했다.
“내가 왜 가르쳐 줘? 득 될 것도 없는데.”
“게임 끝났잖아.”
“그래도 말해 줘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물어봐도 소용없다는 뜻으로 딱 잘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