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71화 (771/1,277)

##  771화

결국 리처드가 원했던 대로 지난 주말 컨트리클럽에 갔던 세 사람만 음료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리처드는 조금 의기양양해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리 억울해하지 않고 웃으며 주문을 받으며 돌아다녔다. 내심 그녀가 분함을 느끼길 바랐던 것 같은 리처드는 조금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너희들은 뭐 마실래?”

아나스타샤는 어느새 발렌티나와 한승우에게도 주문을 받고는 이어 사샤, 아나톨리, 류보비에게 묻고 있었다. 접객업을 해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재빠른 솜씨였다.

류보비와 아나톨리를 서로를 바라보고는,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요?”

“전 시원한 거라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

어차피 사는 건 내가 사는 것인데다가 음료수 정도는 그렇게 부담되지도 않으니 부담 없이 말해 줘도 괜찮은데……. 둘 다 내기에서 매번 면제되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다. 나중에 좀 더 커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아나스타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인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두 사람을 쓰다듬어 주고는 사샤를 돌아보았다.

“사샤는? 탄산은 안 되지? 당분이 많아도 안 좋을 테니…… 석류 주스는 어떠니? 저번에 마셔 봤더니 괜찮더라고.”

사샤를 무척이나 신경 써 주는 어투였다. 그런데 사샤는 약간 의문이 드는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누나는요?”

“나도 석류 주스.”

“콜라 안 마셔요?”

“저번에 같이 안 마시기로 했잖아?”

아나스타샤도 원래 콜라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유치가 빠진 사샤가 콜라를 끊으면서 덩달아 끊은 상황이었다.

내심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사샤 쪽으로 허리를 숙이더니 장난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한 번인가 마시긴 했어.”

“저도 그래요.”

“오, 정말로?”

“네. 엄마 몰래.”

두 사람은 같이 좋아하는 것을 끊은 동지이자 비슷한 비밀을 공유하게 된 친구처럼 낄낄거리며 웃었다.

멀찌감치에서 지켜보는데도 두 사람이 즐거워하는 기색이 전해져 와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사샤는 손가락으로 입술 부근을 톡톡 치며 말했다.

“갑자기 이가 빠지진 않던데요.”

“그 정도였으면 전 세계에서 콜라가 금지되었겠지.”

“그러네요.”

시시한 농담을 몇 가지 주고받던 두 사람은 결론적으로 그래도 당분간 콜라는 피하다가 나중에 한 번쯤 같은 자리에서 잔을 나누자고 약속까지 한 것 같았다.

영원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언젠가 다가올 미래가 기대되는지 사샤는 기분 좋게 웃다가 문득 아나스타샤를 불렀다.

“아나스타샤 누나.”

“응?”

“고마워요. 저랑 상관없는데도 콜라 마시고 싶은 거 참아 줘서.”

아나스타샤는 섭섭하게 무슨 말이냐는 듯 웃었지만 사샤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자기들은 다 하면서 저만 하지 말라고 금지시키는데, 누나는 달랐어요.”

실제로 콜라보다 훨씬 더 심한 것들을 해 대는 어른들을 보며 사샤는 그것을 일방적이고 모순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샤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리 생각할 만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현명한 방식으로 사샤를 설득하고 도와주었다. 사샤로선 처음 겪는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

아나스타샤는 사샤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직 한참이나 작은 아이가 자신을 이해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있으니 약간 재미있기도 하고 보람을 느끼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곧 그녀의 얼굴은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허리만 살짝 숙이고 있던 아나스타샤는 무릎까지 굽혀서 사샤와 눈높이를 나란히 하며 말했다.

“나야말로 고마워. 사샤.”

“……? 누나가요?”

“응.”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사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더더욱 짙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고마운 거야.”

그녀는 손을 뻗어서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사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는 일어났다.

무슨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예상컨대 사샤가 아나스타샤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 준 게 아닌가 싶다.

아직 어린데도 배려심이 있는 사샤는 종종 깊은 생각이 담긴 말을 하기도 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어느 날 아나스타샤가 감동을 받고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에 대해 굉장히 궁금하긴 하지만, 난 두 사람의 이야기 사이에 억지로 끼어들진 않기로 했다.

그냥 두 사람의 일로 놓아두는 것으로 더 좋은 이야기들도 있기 마련이니.

“내려가자.”

순식간에 6명의 주문을 받은 아나스타샤는 나와 에르네스트를 불렀다. 난 직접적으로 돈을 내야 하는 입장이고, 아마 에르네스트는 배달부가 될 예정인 것 같았다.

스터디룸 문을 열고 나왔다. 패배자 세 명이서 내기 이행을 하러 가는 신세였지만 그렇다고 축 처진 처량한 느낌은 아니었다.

단어 마피아 게임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일까. 난 그저 걷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의 표정도 좋아 보였다. 요즘 약간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좋게 풀어진 것 같아 다행이다. 난 그녀에게 살짝 말을 걸었다.

“부러워요. 아나스타샤.”

“갑자기?”

“사샤가 요즘 잘 따르지 않나요?”

방금 전 본 광경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아나스타샤는 이런저런 긴 이야기는 필요 없다는 듯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샤 귀엽잖아?”

“그렇죠?”

“응. 어떻게 그렇게 귀여운 애 형이 에르네스트인지 가끔은 미스터리이기도 한데…….”

아나스타샤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떻게 보더라도 그 목소리는 내 귀가 아니라 반대편의 에르네스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다 들려.”

쓸데없이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 같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까지 쉬어 가면서 이어 아쉬움을 토로했다.

“저 애도 어릴 땐 꽤 귀여웠던 것 같은데.”

“다 들린다고 했다?”

“들었으면서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뭐?”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요?

에르네스트는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참지 않고 불만을 표시했다. 전혀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에르네스트도 나도 이해가 안 갔다.

동시에 돌아보자 아나스타샤는 당연한 걸 왜 못 알아듣냐는 듯 에르네스트를 압박했다.

“너도 내 칭찬 해 줘야지. 타티아나가 듣게. 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도대체.”

어이가 없는지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팍 쓰고는 쭉 앞서가 버렸다.

기껏 어릴 때 귀여웠다고 칭찬해 줬는데도 돌려주는 게 없다며 아나스타샤는 억울함이 담긴 눈으로 내게 말했다.

“너무하지 않니?”

“……그, 그러게요.”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된 걸까…….”

당장 동조해 주고 있긴 하지만 난 심적으론 에르네스트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잔뜩 장난을 치고 있는데 어설프게 맞장구치려고 하면 더더욱 말려든다는 걸 이미 몇 번이나 아나스타샤에게 당해 본 사람들은 자연스레 얼른 도망치는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로서 일단 수습은 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웃으며 말했다.

“지금도 귀엽지 않나요?”

“?”

약간 변호해 주려는 입장이었는데 바로 옆에서 말하긴 좀 그렇고, 귀가 좋은 편인 에르네스트도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면 못 듣겠지 싶어서 말해 봤는데, 아나스타샤는 내 상상 이상으로 과격하게 반응했다.

갑자기 그녀는 걷다 말고 내 어깨를 덥석 잡더니 한 손으로 뺨을 돌려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타티아나, 시력 나빠졌니 혹시?”

“아직 좋은 편이에요.”

“아니면 미적 감각에 문제가…… 괜찮아? 같이 고양이 영상 볼래?”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긴급 애니멀 테라피를 하려는 거예요?

난 내가 어떤 의미로 귀엽다 한 건지 말하려 했지만 뭔가 본격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니 조금 어려웠다.

분명 외견이 귀엽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하는 행동이? 아니, 이건 동물을 보는 시선과 비슷한 건가?

생각하다 보니 어지러워졌지만 그냥 친구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노력하는 그를 보며 새삼 생각나는 것도 많기에, 당사자 앞에선 혹시 화를 낼까 싶어 못해도 이 정도는 편들어 줘도 될 것 같았고.

“그저 전……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서…….”

“처음? 아.”

아나스타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탄성을 내더니 손을 내리곤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에 비하면 좀 귀여워졌나.”

“……아나스타샤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글쎄?”

아리송하게 대답한 그녀는 히죽 웃더니 다시 날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네 덕분 아닌가? 기억하지?”

내가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에르네스트는 연구회를 만들면서 날 영입하려 했었다.

난 그가 잘못될 것이란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옆에서 지켜볼 작정으로 그에게 응했고, 결국은 폭발해서 내 손으로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었다.

에르네스트의 명예를 위해 그날 있었던 사건들을 아나스타샤에게 정확하게 말해 준 적은 없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터라 아나스타샤는 어느 정도 사실관계를 알고 있었다.

이젠 재밌었던 추억 정도로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와 아나스타샤가 이야기할 순 있었다.

난 살짝 눈을 흘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때 절 부추기셨죠? 아나스타샤.”

“어…… 내가 그랬니?”

“그러셨잖아요? 발 빼는 건 자유니까 마음대로 해 보라고. 사실 그때 절 골탕 먹이고 싶으셨던 것 아닌가요? 멋대로 휘둘릴 거란 걸 아셨으면서.”

“그,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나한테도 너무하고 저 애한테도 너무한 거 아니니?”

이제 와서 곤란했다는 듯 말하니 아나스타샤도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곧 심각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젠 괜찮나……?”

“지나간 일이니까요.”

“그렇긴 하지. 넌 휘둘리지 않고 되레 완전히 휘어잡았고.”

“그 정돈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니?”

휘어잡다니? 어떻게?

상상도 안 가는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한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으며 묻더니 한참 앞서 걷는 에르네스트를 일견하며 말했다.

“그때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저 애랑 사귀어 보라고 했던가.”

“…….”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에 약간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직접적으로 듣기도 했었고, 뉘앙스적으로 느낀 적도 몇 번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러고 나서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지면 되는 것 아니냐며 시종일관 쿨한 태도를 보였었다. 그건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태도에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던 건 사실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앉아 있지 않고 사람들과 교류해 나갈 수 있었던 건 약간이나마 아나스타샤의 영향을 받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기억이 없음을 고백한 뒤로 그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던 아나스타샤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내게 물어보았다.

“그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그, 예?”

“왜 그렇게 놀라니? 내가 이상한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오래 전 봤었던 때와 같은 쿨한 모습. 가벼운 태도는 순간 별생각 않고 대답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런데 오래 전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것처럼, 그 때의 아나스타샤와 지금의 아나스타샤의 모습도 조금 달랐다.

아무리 아나스타샤를 유심히 바라보아도 그 지점을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난 여전히 이런 주제에 가볍게 어울리진 못했다.

어떤 방식으로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한낮의 학교 복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너무 어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이 아니라…… 타이밍이 이상하잖아요?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타이밍만 맞으면 되는 거니?”

“아나스타샤야말로 지금 이상해요!”

왜 곤란하게 하는 걸까? 그리고 당사자가 듣지 못할 정도로 멀다고 하더라도, 저기 앞에 모습이 보이는데 말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실례이기도 하고.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웃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짜 이상한 말 해 보려다가 만 건데.”

“……어떤?”

더 이상한 말이 있나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눈치를 주며 마치 몸을 숨기듯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듣겠다.”

“읍.”

내가 깜짝 놀라 입을 가리자 그녀가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

앞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앞서 걷다가 큰 웃음소리에 그제야 뒤돌아보고 있었다. 뭐 하고 있냐는 표정이다.

그제야 난 아나스타샤가 날 속이며 가지고 놀았다는 것을 깨닫곤 눈을 가늘게 떴다. 아나스타샤는 작게 웃음을 흘리더니 곧 미안하다는 듯 이어 말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다음에. 혹시 필요하면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 줄게.”

“재미있는 거요?”

“응. 허락은 받아 내면 되는 거니까.”

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사자 없는 조용한 곳에서요!

내가 눈빛으로 강하게 요구하자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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