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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72화 (772/1,277)

##  772화

어제는 오후 내내 스터디룸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스터디가 아니라 파티를 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스터디룸에서 시끄럽게 게임을 하고 노는 것은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는 일이다.

간만에 모인 느낌으로 우리끼리니까 들키지 않게 놀고 있었을 뿐이지.

아무튼 교칙에 의거한 이유와 진짜로 과제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 등이 합쳐져서 모두들 적당히 놀고 난 뒤엔 각자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난 노트를 펼치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다른 친구들의 공부를 도와주는 데에 썼다.

내 과제를 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다는 건 안다.

하지만 밤에 한두 시간쯤 늦게 자는 것으로 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낮 시간 동안 친구들과 마주하고 있을 땐 이 아이들에게 시간을 쏟고 싶었다.

내게 시간 괜찮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어려워하는 부분들을 알기 쉽게 다시 설명해 주고 조언을 해 주다 보니, 반나절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의 치유가 되는 시간이었다.

스터디를 끝낸 뒤 귀가한 나는 못다 한 피아노 연습도 하고, 밤늦게까지 개인 공부도 마친 후 잠자리에 들었다.

“……아.”

어제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목이 잠겼다.

미약한 통증이 올라온다. 그 와중에도 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다른 부위에 문제가 없는지 컨디션을 체크했다. 목 말고는 괜찮은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몇 번 목소리를 내 본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노래를 하거나 소리를 친 것도 아닌데 대체 얼마나 신나서 열을 올려 이야기를 했으면 목이 이렇게 된 거야?

이전에도 성악을 배우면서 몇 번 겪어 본 경험에 따르면 하루 정도만 지나도 정상으로 돌아오니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 자각 없이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보다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검은 새가 남겨준 이 목소리는 멋대로 망가뜨려서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 피아노 소리의 근원 중 하나이기도 하니까.

“아아.”

일단 오늘은 말하는 것을 조금 삼가야겠다.

그런데 입을 다물고 있는 내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학교로 가는 차 안에서 빅토르는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아가씨 그렇게 계시니 몇 년 전이 생각나는군요. 기억하십니까? 말을 다 까먹어서 제가 뭐라고 놀려도 대꾸하지 못하셨을 때.”

빅토르와 나 사이에 못할 농담이 없긴 하지만 지금 이건 조금 위험했다. 왜냐하면 내가 반응하기 전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소로킨이 번개처럼 주먹을 조수석으로 뻗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를 얻어맞은 빅토르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고, 소로킨이 으르렁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빅토르. 농담이 지나치다.”

“소로킨은 주먹이 지나친데요?”

“쓸데없는 소리를 막는 데엔 주먹만 한 것이 없지.”

오래 전부터 봐 왔던 광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진지한 소로킨과 장난스러운 빅토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난 목 상태를 주의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만……. 괜찮아요, 소로킨. 미안하지만 이 상황이 전 약간 웃기거든요.”

“……친애하는 경호원이 얻어맞았는데 웃기십니까?”

“빅토르가 자처한 일인걸요.”

“잔인하십니다.”

빅토르는 섭섭하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난 그가 날 웃기려고 했다는 걸 잘 안다.

몸 상태에 예민한 내가 목이 잠긴 것에 대해 우울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한 그가 일부러 피할 곳도 없는 차 안에서 심한 농담을 던진 것이다.

소로킨은 그의 연극에 끌려간 것에 가까웠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 너머의 눈이 어떤 모양으로 어디를 보고 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꽤나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걱정해 준다는 건 무척이나 기쁘다. 어제 친구들과 잔뜩 이야기한 대가로 목이 잠긴 난 그리 우울하지도 않았고. 괜찮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조심하려고 해요. 하루 정도면 괜찮아지겠죠.”

“유리 님에게 말씀은 드렸습니까?”

“아뇨, 아침에 일찍 나가셔서.”

“그렇군요.”

이런 일까지 아버지나 예고르, 나제즈다에게 말할 건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 오늘은 다들 바빠 보이기도 했고. 빅토르도 딱히 보고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별일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약간 더 편해진 태도로 날 보던 빅토르는 킥킥 웃더니 재차 장난을 걸어왔다.

“그나저나 잠긴 목소리도 멋지십니다. 아가씨. 평소보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

“소로킨, 운전하시죠, 운전. 사고 납니다.”

하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소로킨이 다시 주먹을 쥐자 기겁하며 앞 유리를 가리켰다. 참으려고 했던 나는 다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내 목 상태를 아나스타샤와 발렌티나에게 알리자 두 사람은 깜짝 놀라며 걱정해 주었다.

“괜찮니? 많이 아픈 것 아니야?”

“병원은?”

발렌티나는 지금이라도 조퇴하고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난리였다. 그 정도로 심각했으면 애초에 학교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한마디도 못 할 정도는 아니고. 조심하면 괜찮을 거예요.”

내 말을 듣고도 잠긴 목소리가 신경 쓰이는지 두 사람은 모종의 시선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내가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 이해했는지 한숨을 쉬었다.

다 같이 웃고 떠들었는데 나만 이런 상황이 되어버리니 약간 미안해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같이 있긴 했어도 말을 한 횟수만 따지고 보면 아마 내가 제일 많지 않을까 싶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가 조용히 공부할 때에도 난 아이들 옆에서 이것저것 가르쳐 주느라 말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 광경을 봤었던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튼…… 어제 애들 공부 가르쳐 준다고 해서 그런 거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이럴 줄 몰랐으면서 괜히 짓궂게 말하던 발렌티나는 곧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조심하자는 각오를 지키는 데엔 두 사람도 도움을 주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나서선 내 목 상황이 안 좋다고 말해 준 것이다.

컨디션 상황에 대해 알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두 사람은 정말 내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오전 수업이 다 지나갈 즈음이 되자 아예 선생님이 내 쪽으로 시선만 돌려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입을 모아 오늘 타티아나는 말 못한다고 해 줄 정도가 되었다. 이쯤 되니 창피했다. 말할 수 있는데?

“…….”

오전 내내 그렇게 강제로 한 마디도 못 하게 되니까 뭔가 이젠 입을 아예 열면 안 될 것처럼 되어 버렸다. 누가 내게 강요한 건 아니지만 내 양심이 입을 꾹 닫아놓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식사까지 마치고 오니 비슷한 시간에 나오던 에르네스트가 날 불러선 물었다.

“컨디션 안 좋으면 오늘도 연습은 쉴까?”

“!?”

그저께도 어제도 쉬었는데 오늘도요?

물론 에르네스트가 보기엔 내가 연습할 기분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먼저 배려해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되레 그 말에 오기가 생겼다. 목소리가 조금 잠겼다고 해서 내 피아노 소리까지 달라지진 않는다.

“아뇨, 해요.”

“목소리 정말 잠겼…….”

“상관없지 않나요?”

듣고 보니 또 그렇다는 듯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우리가 연습을 더 쉴 이유는 되지 않는다.

우린 그대로 함께 듀엣 연습실로 향했다.

오랫동안 듀엣 리허설은 하지 못했었지만 우린 익숙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서로의 자리를 찾아갔다.

두 대의 피아노는 누군가 그사이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의자의 높이도 저번에 세팅했던 그대로였다.

피아노 앞에 앉은 나는 물을 마시고 헛기침도 몇 번 해서 목을 풀었다. 연주 중에 기침 같은 것을 해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오랜만에 에르네스트와 리허설을 하는 것이니 맞대 보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다.

그동안 혼자서 연구한 음색 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갈무리했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

손을 푸는 일도 없이 바로 맞춰 본 연주임에도 우리 연주는 어긋남 없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이대로 무대에 올려도 될 것 같단 기분이 든다.

난 조금 더 자유롭게 음을 풀어 놓았고, 에르네스트 역시 내 주도에 맞추어 따라오기도 하고 가끔은 그가 주도하여 움직이기도 했다.

‘……?’

그런데 연주 중에 난 미묘한 위화감을 눈치챘다.

에르네스트는 정확한 박자로 정확한 음을 짚어 나갔다. 실력에 문제가 있는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 느껴져 오는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벌써 저번 주말부터 따지고 본다면 며칠이나 리허설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사이 생긴 긴장인 걸까? 어쩐지 정확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잔뜩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그는 이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연주를 한다는 걸 아는 나는 약간 의아해했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번 주 아나스타샤와의 연주에서 부조화가 일어났던 때랑은 완전히 달랐다. 일시적인 긴장이니 금방 해소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어쩐 일인가 싶어 난 장난을 치며 그에게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소리가 약간 바뀌었네요.”

“……그런가?”

“어떤 이유죠?”

내가 아무 근거 없이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건 그도 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곧장 대답해 주지 않고 약간 난처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 그렇게 이상한가?”

“그렇진 않아요. 그냥 조금 긴장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긴장?”

“미스하지 않도록 신경 쓰시는 것 같은…….”

설마 그간 듀엣 연습을 허투로 하신 건 아니겠죠? 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자, 그는 갑자기 쿡 하고 웃음을 흘렸다.

“정말 네 귀는 못 속이겠네. 타티아나.”

“……?”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날 시험이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내가 짚어 낸 문제가 정확하다는 걸 인정하는 듯 웃기만 했다.

헝가리 광시곡 2번은 물론 어마어마한 난곡이긴 하지만, 정말로 미스를 낼까 봐 그렇게 긴장했다고요? 뭔가 약간 믿기지 않아서 난 다시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 곡 미스 잘 안 내시잖아요?”

“그냥 조금.”

“……그런가요?”

“이런 일 몇 번 겪어 봐서 알아. 일시적인 거야.”

피아노 연주자는 신체적 컨디션 외에도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아마도 곡을 연습하는 데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부분이 그에게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같이 하는 내가 듣기엔 약간 다르게 들렸을 뿐이고.

난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자주 있었음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제 목소리처럼요?”

“뭐 그럴 수도 있고.”

잠깐 소리가 바뀌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웃다가, 잠시 피아노에서 몸을 떼어 놓으며 허리를 쭉 폈다.

괜히 긴장해 있는 것이라면 잡담이라도 나누며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가 먼저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어제 일을 이야기했다.

“그나저나, 어제 정말 이야기 많이 했나 보네.”

“그랬죠?”

“음료수 사러 갔다 올 때도 아나스타샤랑 끊임없이 계속 이야기하던데.”

난 친구들과 했었던 일들이나 이후에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내가 말을 많이 했던 것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에르네스트는 내가 아나스타샤와 계속 이야기했던 것이 궁금한 모양이다.

난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할 때 약간 목소리가 커지고 톤도 높아지는 편이니까, 아마 그게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정말 궁금해하는 것은 정작 그 내용에 있었다.

“무슨 이야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

“예?”

“내 이야기 아니었어?”

뜨끔했다. 어떻게 알았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절대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에르네스트는 확신을 가지고 내게 묻고 있었다.

설마 그 내용까지 들었나? 그렇다면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정도로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와 난 그를 놓고 별이야기를 다 했던 것이다.

난 당황하긴 했지만 일단 그가 어디까지 확신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야 아나스타샤가 내 어릴 적 이야기 하려고 하길래 내가 피해 버렸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에르네스트가 의심하는 건 자신의 뒷담화인 것 같았다.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당연한 추리의 일환이었다.

난 한숨 돌리며 물었다.

“신경 쓰이시나요?”

“내 욕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신경 쓰이지.”

약간 억울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아나스타샤와 내가 정말로 뒤편에서 그랬으리라 생각할 수 있는 거지?

아나스타샤가 워낙에 장난기가 심한 편이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고 믿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를 변호했었던 난 조금 화가 난 상태로 말했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정말로요. 맹세할게요.”

내가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느낀 에르네스트는 손을 저으며 사과하듯 말했다.

“맹세까지 할 건 없고. 네가 말하면 믿을 테니까.”

“……정말이에요. 앞서가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맞지만 나쁜 이야기를 한 건 아니니까…….”

“그럼 좋은 이야기 했어?”

“……예?”

“그건 그것대로 상상이 안 가는데.”

그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난 아나스타샤와 했었던 말들을 거꾸로 다시 떠올리면서 말문이 막히는 걸 느꼈다.

좋은 이야기? 물론 그렇긴 하지만…… 갑자기 당사자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그게. 콜록 콜록.”

“아, 미안. 말 너무 많이 시켰네.”

에르네스트는 내 목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이제야 다시 깨달았는지 급히 물을 가져와서 건넸다.

일부로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목이 따끔거렸다. 타이밍이 좋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렇게 넘어간 것으로 안도하는 나 자신을 느끼며 양심의 가책을 조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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