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3화
물병을 내려놓고 나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금만 진정했으면 농담으로 잘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과민반응해 버렸다. 아마 아나스타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훨씬 더 잘 대응했겠지.
속으로 약간 후회하고 있는데, 옆을 보니 내가 물을 마시는 사이 에르네스트는 괜히 자기 피아노에 가선 피아노 안의 현과 모델명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딴청을 저렇게 적극적으로 피울 수 있다는 것도 참 대단하다.
“…….”
가만히 흘겨보자 내 시선을 눈치챈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날 의심하는 말을 한 것이 미안한 모양이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에르네스트만의 잘못이라기엔, 아나스타샤의 장난기가 너무 심한 탓도 있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을 끌어와서 이야기하면 누구라도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이 이야기를 더 길게 할 생각 없다는 뜻으로 건반을 쿡 찍었다. 피아노에서 튀어 오른 강대한 음이 정적을 깨뜨린다.
무너지는 정적의 잔해가 다 가라앉기 전에 난 그 뒤에 목소리를 덧붙였다.
“연습하죠.”
“그럴까.”
에르네스트는 비로소 안도한 듯 피아노 앞에 앉고는 날 돌아보았다. 무엇부터 할까 물어보는 눈치다.
난 쉽게 할 수 있는 연습부터 같이 해 보기로 했다.
“지금부턴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딱히 말이 필요하진 않을 테니까.
에르네스트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았지만 난 기다리지 않고 바로 건반을 연달아 짚었다.
우리가 방금까지 연습하던 헝가리 광시곡 2번이 아닌, 에르네스트가 작곡해서 내 파트로 떼어 준 음악의 일부분이었다.
난 이 한 조각의 음악을 이쪽저쪽으로 굴려 보면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확신을 점점 가지게 되었고, 며칠 전 아나스타샤가 연주자로서의 제안이라면서 가지고 온 수정 사항들을 직접 듣고는 내 파트 또한 어떻게 더 완벽성을 기하여 에르네스트에게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전할지에 대한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난 작곡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수업밖에 듣지 못했기에 손댈 수 있는 부분은 무척이나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작곡가를 거쳐 온 연주자로서의 본능과 그 본능을 제어하도록 교육받은 규칙들은 이따금 내 손이 악보에 없는 음을 짚도록 인도해 주었다.
순간적인 영감처럼 떠오른 그 음들을 악보에 적어 넣고는 다시 면밀히 분석하고 결정을 내린 후, 그 흐름을 다시 정확하게 외우고는 음악으로 승화시켰다.
“…….”
대부분의 의견은 디테일한 표현에 모여 있었다.
7개나 되는 음들이 모인 장대한 화음에다가 음 하나를 살짝 더 끼워 넣거나, 수십 개나 되는 스케일의 끝에 꾸밈음을 붙여 느낌을 바꾸고, 가끔은 지나치게 박자를 쪼개는 음을 거두어 여유를 만든다.
그러한 변화들을 설득력 있게 에르네스트에게 제시했다.
일부분을 연주하고 돌아보면 그는 가만히 보고만 있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 빠르게 적어 내리기도 했다.
내가 말로 설명하지 않고 음악만 연주해도 그는 내 의도와 방향성을 정확하게 읽어 내고 따라오고 있을 테지. 난 어떠한 걱정이나 의심 없이 우리 음악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연주를 선보였다.
“…….”
건반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다. 방금 전 했던 헝가리 광시곡 2번 연습도 좋았지만, 이번에도 꽤 잘 되었다는 느낌이 분명히 들었다.
옆을 보니 에르네스트는 더 없냐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일단은 이제 전부였다. 난 다시 건반을 만질 생각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갑자기 픽 웃었다.
“이젠 말해도 되잖아.”
목 아프다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 모인 목적이 곡을 연습하는 일이라는 걸 보면, 이미 할 말은 다 했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에르네스트가 대답했다.
“그러게.”
그는 내 무언의 의사를 알아들은 사람처럼 대답하더니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난 그가 방금 들었던 것들을 다시 갈무리하고 오늘 연습은 그만하자고 할 줄 알았다.
헝가리 광시곡 2번 연습도 좋았고, 방금 내 의견은 다시 작곡가로서 그가 참고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우리가 더 할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요 며칠 공동 연습을 쉬는 사이 가만히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작곡에 쏟아붓고 있었다는 점이다.
‘……?’
갑자기 그가 일언반구 없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난 살짝 당황했지만, 곧장 귀를 기울였다. 훈련된 연주자의 신경은 피아노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챈다.
그리고 잡아낸 그 선율을 해석하던 난 이 선율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바로 우리가 함께 연주해야 할 곡의 마지막 악장이었다.
‘완성하신 건가요?’
정말 그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세 명의 피아노 연주자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해 낸 것이다.
난 그가 해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정말 그 결과물을 직접 마주하게 되니 가슴이 벅찼다.
이 곡은 연주회의 서곡으로 세 피아노 연주자를 소개하는 음악이다. 그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하듯, 에르네스트의 파트는 비르투오시즘이 넘치는 화려함이 돋보였다.
폭발적인 사운드와 현란한 테크닉은 에르네스트라는 피아노 연주자를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
한동안 난 그 음악에 심취하여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직접 작곡한 만큼 와닿는 설득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교차하며 형태를 이루는 역동적인 화성, 그가 주로 좋아하며 자주 사용하는 특별한 코드의 진행.
내가 바라보고 있었던 에르네스트라는 음악가의 역량과 에센스가 전부 한 음악에 녹아 있었다.
마치 거친 파도처럼 다가오던 음악은 다시 돌아갈 땐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흘러나간다.
난 이 음악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다가도 어느 순간 넋을 놓고 그저 빠져들었다.
“?”
그렇게 몇 번의 파도를 마주하던 난 순간 이 한 음악가를 표현하는 완벽해 보이는 음악에도 빈틈이 있음을 발견했다.
홀로 독주하던 음악은 순간적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는데, 그것은 에르네스트가 어찌할 줄 모르고 남겨 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안배해 둔 자리였다.
‘잠깐만.’
난 그제야 이 음악이 세 명의 연주자를 필요로 하는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독주곡처럼 연주하고 있지만, 조금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자 다른 두 사람의 빈 공간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퍼즐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다. 테두리와 그림의 모양에 따라 어떤 조각을 끼워 넣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그 형태가 살짝 불분명하더라도 상관없이 우리는 수천 가지의 조각들을 손으로 헤집어 그중에서 한 조각을 직관적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난 몇 개나 되는 퍼즐 조각들을 양손 가득 쥘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빈 공간에 끼워 넣지 않고 가만히 참고 지켜보고만 있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에르네스트 또한 지금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잘 알겠지. 잘 알기에,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선 놀자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
정말 장난이 지나치다.
곡을 완성시켰다면 악보를 주고 제대로 진지하게 연습하자고 해도 모자를 것을, 이렇게 갑자기 무턱대고 쏟아내면 어쩌자는 걸까.
하지만 난 그의 이런 방식에 화가 나거나 난감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되레 차분해지면서 이 장난에 응하고 싶어진다.
어째서 아무것도 주지 않고 음악으로 강제하려 드는진 잘 모르겠지만, 그가 원한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멍하니 음악에 빠져 있던 정신을 건져 올리곤 온몸의 신경을 집중했다.
바로 귀에 들어오는 조성의 변화. 지금까지 들었던 화성의 흐름. 그리고 되풀이되면서 이 음악 전체의 구조를 암시하는 주제들.
나는 어느 순간부턴 처음 듣는 그의 음악을 앞서 예상하며 따라가고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조성은 내가 익히 아는 그것이었다.
‘아마도…….’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그 손길은 천천히 내려와서 내 팔을 들어 올리고, 피아노 쪽으로 향하게 했다.
아무렇게나 해 보라는 듯 성급하게 굴지 않는다.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고, 정확하게 건반의 위치에 내려놓는다.
소리로 전해져 오는 그 어떠한 이끌림에 따라 난 나도 모르게 건너편의 소리에 손가락을 얹었다.
“…….”
내가 갑자기 소리를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르네스트는 전혀 당황하거나 놀라워하지 않고 그대로 연주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난 내가 제대로 된 퍼즐조각을 찾아서 맞춰 넣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음악에 확신을 얻게 된 나는 이어서 다른 퍼즐 조각들도 하나씩 끼워 넣었다.
연주를 하면서도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우린 예전에 청중들을 무대 위로 불러서 무작위적인 선율에 맞추어 즉흥 연주를 하는 행사를 하기도 했지만, 이건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즉흥과는 거리가 먼 또렷한 그림을 지닌 음악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성만 알면 이디엄으로 임기응변이 가능한 상황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이 처음 듣는 음악에 내가 소리를 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에르네스트의 화법이 같은 클래식 음악가로서 교육받은 공통적인 기틀 위에 올라서 있다는 점.
내가 개인적으로 에르네스트라는 음악가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느껴 온 여러 가지 특징들이 이 음악의 주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연주되는 이 음악은 처음 듣는 곡의 시작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몇 번이고 합을 맞춰 오면서 연습해 본 곡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점이었다.
에르네스트 또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음악의 수준을 알고 있기에 이런 시도를 해 본 것일 테지.
아무리 그래도 상당히 러프하고 거친 방법이었지만, 난 이것도 일종의 놀이라 생각하며 어울려 주었다.
“…….”
물론 정말 놀이처럼 대책 없이 응한 건 아니었다.
난 이전의 흐름을 기억하고 그것이 되풀이될 땐 보다 확신을 가지고 내 선율을 쏟아 냈고, 약간 불분명할 땐 잠시 쉬면서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크게 선심 쓰는 듯 공간을 열어 주면, 기다리고 있던 내 퍼즐 조각들을 빠르게 맞춰 넣었다.
신중하게 에르네스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내 파트를 차곡차곡 챙겼다. 그렇게 조금씩 잠식해 가면서도 음악이 엉망진창으로 뭉개지거나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상당 비중으로 내 퍼즐조각으로 채워 넣었을 때였다.
갑자기 다음 클라이맥스 주제가 전개되면서 미처 반응하기 어려운 변화가 전개되었다.
잘 모를 땐 손을 놓고 지켜보던 나였지만,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서 합주에 도전하다가 이어지는 복잡한 흐름을 놓치고는 그만 불협화음으로 음악을 깨뜨리고 말았다.
“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다 만든 도자기를 마지막에 깨뜨린 기분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봐주지 않고 그대로 연주를 중단했다. 난 너무 아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장난을 치거나 놀리려는 기색이 전혀 없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여러 감정에 휩싸인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사뭇 진지해서 나 역시 왜 이런 연주를 강요했느냐고 묻지 못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연습실을 맴돌던 마지막 소리까지 멎었을 때 에르네스트가 입을 열었다.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 역시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방금 전 완주를 못한 건 내 손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었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쉬웠다고 해 주세요.”
적어도 엉망진창이진 않았지. 그가 그렇게만 말해 준다면 고마울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 고민하던 에르네스트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영문 모를 말을 남겼다.
“아쉬운 건 내 쪽이겠지.”
이렇게 멋진 곡을 그 짧은 시간에 작곡해 냈으면서 무엇이 아쉽다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아쉽다고 말하면서도 그가 무언가 다짐하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