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74화 (774/1,277)

##  774화

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연습에 집중하면서도 일반교과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 늘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요즘 들어선 연주회 일도 있고, 얼마 전 스터디에선 다른 친구들의 공부를 봐 주느라 약간 신경이 분산이 된 것 같았다.

어젯밤 음학사 과제를 하려고 작정하고 책상 앞에 앉고 나서야 난 관련 서적을 하나도 빌려 놓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을 통해서 레퍼런스 등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대충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결국 간밤엔 다른 과제만 하고는 오늘은 아침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바로 도서관에 가서 참고할 책들을 빌릴 생각이었다.

“…….”

10월이 다가오면서 점점 날씨는 차가워져 간다.

정말 얼마 후 있을 가을 연주회가 겨울 연주회가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실제로 가을 연주회에 눈이 오거나 한 경우도 몇 번인가 있다고 하니까, 모스크바의 계절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연주회 당일엔 날씨가 좋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문을 들어서자 가을바람이 멎고 고즈넉한 복도의 공기가 날 감쌌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약간 차갑고 건조한 공기였다. 여기저기에서 일찍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난 그 소리에 거들며 한 발 내밀었다.

계단을 올라 우리 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한 명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창문은 열어 둔 채였고,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살랑이며 흔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창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

난 우뚝 멈추어 섰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의문이 들었다. 그는 평소 이렇게 빨리 학교에 오지도 않는 편이고, 오더라도 학교에선 절대로 엎드려 자는 일이 없다.

나처럼 늘 바른 태도로 생활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그는 꽤 깐깐한 모습을 견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방비하게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신기했다.

‘추울 텐데.’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졸려서 자고 싶었던 것이라면 창문을 닫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혹시 그를 깨울까 싶어 살짝 다가가선 열린 창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가방을 놓고 도서관으로 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생각지 못한 장난기가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끔 조는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이렇게 학교에서 엎드려 자는 건 좀처럼 마주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놓고 싶었다.

나중에 언젠가 우리가 교복을 입지 않게 되었을 때, 이런 사진이 남아 있다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다른 이유를 다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모습은 보존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사진작가가 된 기분으로 허리를 살짝 숙인 채 가방에서 천천히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때였다.

“…….”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에르네스트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난 정확하게 그와 눈을 마주치고는 호랑이와 마주한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영민한 그는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순식간에 추리해 낸 듯 보였다. 그는 이렇다 저렇다 묻지도 않고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를 내겠지?

난 그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잘못했어요.”

“……뭐가?”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여전히 반쯤 엎드린 상태로 머리만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 셔터를 누를 뻔했다가 간신히 참으며 이어 말했다.

“바로 깨우지 않은 거요.”

“사진 찍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안 찍었어요.”

“미수야? 아쉽게 되었네.”

실제로 아쉬움을 느끼긴 했지만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말하니 괜히 부정하고 싶어진다. 난 양 팔을 뒤로 숨기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별로 그렇진 않아요.”

“어제도 그렇고, 아쉬운 건 내 쪽이라니까.”

“?”

잠이 덜 깬 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바라보니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내가 온 건 알고 깨어났나 했더니 창문을 닫아 놓아서 알아차린 모양이다.

찬바람이 멎으면 더 깊게 잠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희한하다 정말.

다시 내 쪽을 돌아본 그의 눈엔 총기가 돌아와 있었다. 주변을 휙 본 그는 반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시간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일찍 왔네?”

“에르네스트야말로요.”

“사샤가 시끄러워서 말야.”

내가 생각하는 사샤는 상당히 얌전한 아이였는데, 왜 시끄럽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말해도 난 사샤보단 에르네스트 쪽에 무언가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그렇게 말해서 기분 상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 난 그냥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겠거니 하며 넘어가기로 했다.

더 캐묻지 않자 에르네스트는 별로 재미있는 일도 아니었다는 듯 실없이 웃으며 대화를 이었다.

“목은 괜찮아?”

“많이 좋아졌어요. 아프지도 않고요.”

“그래, 다행이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 맞아, 줄 게 있어.”

에르네스트가 꺼내 든 것은 수십 장의 종이들이었다. 그는 그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여기.”

“무엇인가요?”

“뭐겠어? 봐 봐.”

그가 내게 건넬 종이라곤 사실 한 종류뿐이었다.

난 손에 들린 악보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 위에 바로 어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아서 무슨 곡인지 알 순 없었지만, 음악의 언어를 읽어 보니 내가 아는 곡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바로 에르네스트가 어제 연주했었던 그 곡이다.

세 사람의 총보였다. 완성된 곡의 악보를 이제 합주자인 나와 아나스타샤에게도 주려는 것 같다.

정해진 기간 내에 곡을 받은 건 기쁘다. 하지만 이미 이 곡을 들어 본 나는 뭔가 일의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이걸 이제야 주시나요?”

“그러게.”

에르네스트는 내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목을 돌리며 이어 말했다.

“사실 어제 주려고 했는데, 어제 같이 연주했었잖아? 그 후로 수정할 것들이 있어서.”

“…….”

그 말에 난 조금 더 유심히 악보를 살펴보았다. 내 파트를 보니 어제 연주했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젠 에르네스트가 보여 준 빈칸에 맞추어서 퍼즐을 맞춰 넣은 즉흥 연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제대로 고려하여 작곡한 곡은 훨씬 더 정교하고 분명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곡을 읽어 나가면서 난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즉흥적으로 나왔던 몇몇 연주가 그대로 악보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에르네스트가 혼자 썼더라면 아마 분명 이런 흐름이 나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비추어 보면 어제 내 연주를 듣고 좋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차용하여 곡을 수정 보완한 것 같았다.

악보를 몇 장만 넘겨 봐도 그런 면이 크게 느껴졌다. 난 고개를 들고 그에게 말했다.

“원래 어떻게 쓰셨는지도 궁금하네요.”

“크게 다르진 않아. 네 의견과 직관적 포인트들을 조금 더 가다듬었을 뿐.”

그냥 자신이 유도하는 방향대로 곡을 만들어도 되겠지만, 결국 내가 연주해야 하는 곡이니 내 신경을 많이 써 준 모양이다.

그가 왜 아침부터 와서 자고 있었는지 알 것 같다. 난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혹시 밤새셨나요?”

사실 시간도 촉박한데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음악성과 작곡가로서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곡을 쓰고, 연주자인 우리는 그저 거기에 따르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나스타샤가 먼저 거기에 의견을 내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녀를 따라서 보충하자 에르네스트가 해야 할 일이 보다 더 많아진 것이다.

늘 그가 너무 많은 부담을 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난 이중적이게도 그를 힘들게 만들고 말았다. 아무 말 많고 들어준 것이 고마우면서도 난 못내 그것이 미안했다.

에르네스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조금.”

“조금이 뭔가요? 몇 시에 주무셨는데요?”

“1시인가…….”

“거짓말 마세요.”

“……가차 없네.”

1시면 평소 자는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딱히 신경 써서 거짓말을 할 이유를 못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럴 여유도 없는 건지 그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할 뿐이었다.

“아무튼 괜찮아.”

이 고집을 어떻게 할 순 없겠지. 입장을 바꿔 놓더라도 나 역시 똑같은 말을 했을 테니까.

너무 잘 이해하기에 되레 답답해진 기분으로 난 허리를 기울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오후에 리허설 있는 것 잊지 않으셨죠?”

오늘은 연주회 관계자들과 다시 미팅하고 지금까지 준비된 사항들을 시연하는 날이었다. 학교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갈 예정이었으니까 지금부터 몇 시간 남아 있지도 않다.

에르네스트는 그 정도로 정신이 없진 않다는 듯 말했다.

“알지.”

“그런데 이래서 어떡해요?”

“뭘 어떡해. 항상 이랬는데.”

“항상!?”

내가 도끼눈을 하고 묻자 그는 살짝 움츠러들더니 내 시선을 피했다.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누가 봐 줄 줄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상황에 어떻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를 야단치는 게 아니라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돕는 일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죠…… 더 주무세요. 방해 않을게요.”

“……잠 다 깼어.”

“저 어차피 이제부터 도서관에 갈 거예요.”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줄 알았는지 잘 생각 없다는 듯 눈에 힘을 주던 그는 내가 도서관에 간다고 하자마자 바로 힘을 풀었다. 정말 내가 나가자마자 바로 다시 엎드려 잘 것 같다.

난 그를 더 붙잡고 있지 않기로 했다. 받은 악보를 들고 일어서서 바로 나가려던 난 잠시 악보를 내려다보고는, 뒤돌아 그에게 다시 말했다.

“신경 써 주신 것 고마워요.”

“…….”

에르네스트는 내가 마음에 들어 해서 다행이라는 듯 옅게 웃으며 손목을 까딱였다.

***

결국 도서관엔 또 못 갔다.

아침에 에르네스트에게서 악보를 받은 나는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연습실로 직행했고, 그대로 남은 시간을 전부 연습에 썼다.

그리고 오전 수업을 받고,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리허설 장소로 가게 생겼으니 중간에 도서관에 들를 시간이 아예 없었다.

내일은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에 도서관에 가겠다고 다짐하고, 난 그 모든 생각을 머리 뒤편으로 밀어넣었다.

“오늘 리허설은 별로 안 길 것 같긴 해. 난 어차피 따로 더 할 테고.”

학교 수업은 잠시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우리들의 연주회 일을 생각할 때였다.

리허설을 할 연습실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 아나스타샤가 기지개를 켜며 스트레칭했다.

그녀를 따라 나온 에르네스트도 차 안에서 잠시 잠을 청했던 것으로 피로를 조금 더 풀었는지, 약간 나아진 표정으로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래도 잠깐 눈 붙인 걸로도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우리 곡은 오늘 안 할 거지?”

“악보 제출만 할 거야.”

에르네스트는 가지고 온 서류 가방을 툭 치며 말했다. 그 안엔 그가 어제 밤새워 완성한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악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는 그가 완성할 곡을 확인하고 나서야 연주회의 서곡으로 사용할지 말지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으므로, 오늘 제대로 준비해서 그녀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곡을 들려 달라 하면 어떻게 하지? 아나스타샤는 방금 악보를 받았으니 나와 에르네스트만 듀엣으로 해서 연주해야 하나?

무엇을 요구하든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난 그를 따라 연습실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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