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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75화 (775/1,277)

##  775화

연습실엔 다른 멤버들은 아직 보이지 않고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만 앉아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산드라.”

“아, 어서 와요. 타티아나.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그녀는 인사를 하고도 노트북에서 시선을 놓지 못하고 계속 무언가 타이핑했다. 꽤 바쁘게 일하는 중인 것 같았다.

다른 스태프분들과도 눈을 마주하면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모두들 바쁜 것 같고, 난 멍하니 있기도 어색해서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눈치가 빠른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가 찻잔을 준비했다.

우리가 바스락거리는 걸 발견한 알렉산드라는 곧바로 만류했지만 이미 잠깐 사이 준비는 다 마친 상태였다.

“차 드세요.”

“아…… 고마워요. 이렇게 해 줄 필요는 없는데.”

“괜찮아요.”

알렉산드라는 약간 미안해하면서도 목마른 것도 잊고 일을 하다가 이제야 자각했는지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바로 찻잔을 입에 댔다. 꽤 뜨거울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걸 보면 조금 대단하다.

우리도 차를 한 잔씩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선 잠시 시간을 보냈다.

“오늘 너희는 다른 일정 없니?”

“예, 딱히.”

“난 이따가 스푸마토 분들이랑 바로 리허설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마 오늘은 같이 못 돌아갈 것 같아. 아까 이야기했었지?”

이미 출발 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우린 같은 연주회에 참가하지만 각기 다른 무대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늘 함께 할 수는 없었다.

나로선 그녀가 우리와 떨어져 따로 준비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조금은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 할 콰르텟 사람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똑 부러지는 성격이기도 하고.

“괜찮죠…… 그, 게오르기가 데려다준다고 하셨죠?”

“응. 완전 반대편에 사는데도 매번 고생이지.”

“고마우신 분이네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아나스타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고맙다며 감사를 표했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내 경호원들이 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전해 주겠다고 하니 아나스타샤는 그도 그렇다며 웃기만 했다.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너무 시끄러우면 알렉산드라나 다른 스태프분들에게 민폐가 될까 싶어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에르네스트는 혼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혹시 괜찮으면 잠깐 몇 분이라도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눈이라도 붙이고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일하는 곳까지 와서 졸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었다.

살짝 인상을 쓴 채 멀찍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그는 앞으로 있을 회의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끔 그는 이렇게 프로다운 얼굴이 정말 잘 어울린다.

잠시 후, 타자 소리가 멎었다.

알렉산드라는 노트북을 탁 닫더니 우리를 똑바로 돌아보며 사과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일이 바쁘시죠?”

“뭐…… 이제 슬슬 연주회가 가까워져 오니 말이죠. 이곳저곳 보고하거나 확인할 것이 있네요.”

알렉산드라는 묘한 열기를 담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시간이 1년이 남아 있든 하루가 남아 있든 관계없이 정해진 시간 내에 준비를 마쳐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연주자인 우리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지나치게 열의에 들뜨거나 긴장하는 것을 주의해야 하지만, 콘서트 디렉터는 더더욱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하루하루 중요한 지금 이 시기에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온통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일밖에 없다는 것이 겉모습만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싱긋 웃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연주자분들에게 문제되지 않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관리감독 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믿고 있어요. 알렉산드라.”

“고마워요.”

우리 콘서트 디렉터는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았다.

저번에도 문화부 장관을 초청해서 리허설을 하자고 하고 진행할 정도라면 얼마나 진지하고 유능한 사람인지도 이미 어느 정도 검증이 끝났다고 봐도 좋았다.

그리고 우리 세 명 역시 검증은 되었다.

이 연주회의 연주자로 발탁된 이유엔 절대적인 실력이 아니라 어린 나이에 비한 상대적인 실력 등이 눈에 띄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제대로 실력발휘는 다들 한 번씩 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년간 음악을 해 온 노련한 음악가들도 우리 실력에 대해서 아쉬운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알렉산드라는 우리에 대해서도 확실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 두진 않는다.

“세 분의 완성도에 대해서 따로 말할 건…… 딱 한 가지 정도 있겠네요.”

그녀의 시선은 우리 세 명을 바라보면서도 마지막엔 정확하게 에르네스트에게 향했다.

“연주회 초두에 세우기로 한 서곡의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에르네스트.”

“그거 말이죠.”

알렉산드라는 나름 회심의 질문을 던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에르네스트는 대수롭잖다는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가방에서 악보를 꺼냈다.

“다 되었습니다.”

그 행동이 너무 태연해서 알렉산드라가 약간 당황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어서 에르네스트가 건네는 악보를 받았다.

세 연주자의 흐름이 기록되어있는 총보는 상당히 양이 많고 묵직했다. 일반적인 악보가 20페이지라 치면 족히 60페이지 가까이 되는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악보들을 슥슥 넘겨 보면서 이것이 어설프게 마무리 지은 미완성 악보가 아니라, 제대로 만든 것이라는 걸 느낀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제가 이렇게 물을 걸 알았나요?”

“오늘까지는 맞춰야 무대에 올릴 시간이 되겠죠. 그래서 시간에 맞춰 마무리 지었습니다.”

작곡가로서 공부를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에르네스트는 시행착오랄 것도 별로 없을 정도로 주도면밀하고 노련한 사람이었다.

음악가로서의 경력이 있기 때문인 걸까. 그는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모든 흐름을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딱 정해 놓은 시간은 없었지만 오늘도 만약 에르네스트가 끝내지 못했더라면 알렉산드라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산드라는 에르네스트가 일반적인 어린 학생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는지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저번에 장관님 앞에서 리허설을 피하셨던 건?”

“곡이 덜 완성되기도 했고, 그분은 원래 무대 전에 다 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서.”

“……그것까지 다 알고 있었군요. 저도 아무 말 않고 있었던 건 에르네스트의 작업에 문제가 생긴다면 여지없이 그만두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그건 아시죠?”

“어렴풋이. 제가 사정 봐 달라 해서 들어줄 분은 아닌 것 같았죠.”

“아하하.”

저번 주 리허설 때 에르네스트가 곡을 보여 주지 않아서 알렉산드라는 아마 그가 완성작을 못 내놓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 예상이 빗나가도 기분 좋은 한 방 먹었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난 확실하게 자신의 일을 마친 에르네스트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앞으로도 잘 될 것 같아서 기쁜 마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한참이나 웃던 알렉산드라는 다시 악보를 몇 페이지 넘기며 물어보았다.

“아무튼…… 시간은 몇 분 정도죠?”

“12분 정도입니다.”

“적절하네요. 짧은데도 악장 구분이 분명하고…… 꽤 다채로운 그림이 나올 것 같아요.”

그녀는 기악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다른 전공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콘서트 디렉터로서의 역량과 명망도 높은 음악가였다.

악보를 보고 곡의 수준과 무대에 올렸을 시의 반향 등을 가늠하는 건 순식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에게 이어 요청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전 악기 세 대가 등장하는 총보를 한눈에 보고 파악할 능력은 없어서. 혹시 녹음된 파일 같은 것 있나요?”

“아뇨, 오늘 완성된 것이라서 악보도 오늘 나눠 줬네요.”

“음…… 그러면 괜찮으시다면 제가 다른 저명한 음악가 분들 한두 분 정도에게 이 곡을 보여 드려도 될까요.”

초연 전에 작곡가가 악보를 다른 음악가들에게 보여 주고 고견을 구하는 건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가 직접 구세프 선생님이나 작곡 선생님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라가 다른 저명한 음악가를 찾는다고 하니까 느껴지는 무게감이 조금 달랐다.

알렉산드라가 그저 명목상의 이유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작곡 콩쿠르 심사 받는 기분이네요.”

“비슷하다고 생각하셔도 되겠네요. 실제로 한 분은 파리 음악원에서 로마 대상 심사하는 분이기도 하니.”

“……로마 대상이요?”

“이 일을 하다 보니 어떻게 연이 닿아 알게 된 분이죠.”

로마 대상grand prix de rome은 1600년대부터 프랑스에서 유망한 예술가들을 뽑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보내 주는 유서 깊은 대회였다.

작곡 부문은 1800년 초부터 시작되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200년이 넘도록 수많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등용문이 되어 주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만큼 공신력 있는 상이라 할 수 있었지만, 파리 음악원의 학생만 참가할 수 있어,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은 로마 대상에서 경쟁할 기회가 없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사실상 로마 대상의 심사를 받아 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르네스트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는지 깜짝 놀란 눈을 했다.

설마 러시아의 콘서트 디렉터가 먼 프랑스의 음악가와, 그것도 로마 대상의 심사를 할 정도로 명성이 높은 사람과 친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우린 여러 이유로 놀라서 말도 못 꺼내고 멍하니 있었는데, 알렉산드라는 우리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급히 진정시키듯 말했다.

“아, 걱정 마세요. 그분 평가를 절대적으로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곡 자체의 완성도만 봐 달라 요청드리고, 만약 연주에 지장만 없다면 그다음은 세 분의 리허설을 듣고 판단할 생각입니다.”

엄청난 이야기를 꺼내 놓고도 알렉산드라는 단지 다른 음악가의 의견은 참고만 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곡이 어떤 평가를 받을진 초연 자리에서 청중들 앞에 내보여 봐야 안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실질적인 일정을 다시 정리하며 알렉산드라가 물었다.

“이 곡의 리허설은…… 기본 틀이라도 최소 1주일 안에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능할까요?”

난 지체 없이 바로 대답했다.

“가능해요.”

“저도요.”

아나스타샤 역시 곤란하다거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사이에 조금씩 연습해 온 것도 있었고, 앞으로도 시간 내에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서로 간에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알렉산드라는 한숨 돌렸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녀가 에르네스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에르네스트. 이렇게 대단한 피아니스트분들과 친분이 있으셔서.”

로마 대상 심사를 보는 음악가와 연락이 닿는 알렉산드라가 이런 말을 하니 조금 어색했지만, 그녀는 정말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음악가로서 이렇게 같은 음악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에르네스트는 긴 말 않고 짧게 대답했다.

“운이 좋은 편이죠.”

그게 다예요?

난 에르네스트를 휙 돌아보았고 그건 아나스타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길게 이야기해도 좋은 타이밍 아닌가요?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언제나 그렇듯 태연한 얼굴로 이쪽은 보지도 않고 있었고, 알렉산드라는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이 곡은 맡아 두도록 하겠습니다. 최소한의 심사 외 다른 유출은 제가 책임지고 관리할 테니 걱정 마시길.”

그렇게 그가 곡 제출을 마무리 짓고 알렉산드라가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자리를 뜨자마자 우리는 에르네스트를 가운데에 놓고 타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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