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7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의 곡을 초연하는 것을 알렉산드라가 허락하는 대신, 그 수준이나 완성도 등을 미리 검증하겠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과정이 알렉산드라 개인의 기준이 아니라 다른 저명한 음악가들을 통할 것이란 예상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작곡한 곡에 꽤 자신도 있었고, 친밀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음악가들의 의견도 들어 보고 싶었던 에르네스트는 은근히 알렉산드라가 가져올 결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곡상인 로마 대상 심사위원의 검증을 거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알렉산드라도 대단한 사람이야.’
지금 보니, 서곡을 자신의 곡으로 초연하겠다고 했을 때 알렉산드라가 조금 놀라면서도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것도 이만한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름 협조해 주는 것 같았지만 도움을 주지도 않았고, 절대로 그녀는 어영부영 에르네스트의 고집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외부의 평가를 참고만 하겠다고 했지만, 만약 정말 혹평을 받았다면 그녀는 그것을 무기로 해서 에르네스트를 얼마든지 압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검증되지 않은 곡은 내려 버리고 보다 완벽하게 연주회를 구성하고 싶은 것이 당연히 콘서트 디렉터로서의 바람일 터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 못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적당히 평가받을 줄 알았는데…….’
청중들 앞에 내보내도 부끄럽지 않겠단 평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혹여 이런저런 개선점을 지적받는다면 충분히 감안하여 피드백할 용의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유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려 했다.
애초에 먼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곡이다. 나쁘게 평가할 건 없겠지만 그렇다고 좋게 평가해 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엄격한 작곡 콩쿠르가 아니었으니, 에르네스트는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드라가 받아온 곡에 대한 반응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파리 고등 음악원 특례 입학. 에르네스트가 제안받은 혜택은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러브콜이었다. 곡 하나로 받기엔 버거울 정도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반응에 집중했다.
“잘했네,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잘했다는 것인지 에르네스트는 알 수 없었다.
곡을 잘 썼다는 걸까? 그리고 짐작하건데 아나스타샤도 스스로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얼마 전 대화를 주고받은 후로 아나스타샤는 점점 본격적으로 모종의 경쟁심을 에르네스트에게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피아노가 아닌 방면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음악가로서 수확을 거두자 그녀는 순수한 축하와 동시에 복잡한 감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콩쿠르에서 밀려난 연주자들의 눈에서 에르네스트는 저런 감정을 본 적이 있다. 결과를 인정하지만 허무함을 느끼는 감정.
에르네스트는 차라리 그녀가 보이는 감정이 시기이길 바랐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만큼 이기적이지도 못했다.
“…….”
그리고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말없이 에르네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에르네스트가 프랑스로 갈 일은 절대 없다는 걸 그녀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있지도 않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전엔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진학하는 일로도 그랬다.
그땐 단순히 친구를 먼저 보내고 싶지 않은 단순한 이유가 주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그보다 조금 더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이럴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 타티아나는 곧잘 믿어 주니까.
“그렇게 전달할게요.”
에르네스트가 프랑스로 갈 생각이 없음을 밝히자 알렉산드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프랑스어로 말을 전했다.
타티아나의 얼굴은 확연히 편안해졌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애초에 모스크바 음악원 외에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이유로 생각을 바꾸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그는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두 사람을 확인하고 나니 그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잔뜩 들뜬 분위기에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음악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건 응대해 줄 필요가 있었다. 모두들 이젠 정말 에르네스트를 믿을 만한 피아니스트뿐만이 아니라 작곡가로도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도 들어 볼 순 없는 건가?”
“제가 악보를 오늘 새벽에 완성해서요. 제 친구들이 이 곡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합니다.”
“아, 그렇구먼.”
“아마 다음 주엔…… 가능할겁니다. 그렇다고 했었지?”
아나스타샤를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라는 1주일이란 기간을 제시했지만 사실 그녀와 타티아나가 제대로 시간을 써 준다면 아마 며칠 안에 이 곡은 연주하기에 문제없을 수준까지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단 한 곡으로 파리 고등 음악원 특례 입학을 받아 낸 작곡가에게 다들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다.
에르네스트는 아직 시연해 보일 수 없는 곡에 대하여 일문일답을 주고받으며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뜻하지 않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사이 데니스가 지휘하는 카메라들도 계속 에르네스트를 중점으로 비추었다.
연주회에서 초연한 곡이 미리 프랑스에서 고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이야깃거리로 만들기에 꽤 적절할 것이다.
어차피 이제 와서 이슈화되길 막는 건 글렀다. 에르네스트는 나중에 없던 이야기가 생기지만 않길 바랐다.
한참을 질문과 카메라를 상대하고 있자 이윽고 알렉산드라가 전화를 끊었다.
시끌시끌했던 분위기가 뚝 하고 멎었다. 모두가 알렉산드라의 입에 집중했다. 그녀는 짧게 웃더니 에르네스트에게 말했다.
“제안을 거절한 건 애석하지만 이해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로선 감사한 일이고요.”
알렉산드라의 감사는 러시아 음악가로서의 감사였다. 에르네스트는 애초에 생각 없던 제안에 대해 이렇게 감사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이어 시간을 확인한 알렉산드라는 작곡가가 정말 궁금해할 이야기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다.
“딱히 곡에 대해 할 말씀은 없으시지만, 짧게나마 코멘트 정도는 정리해서 보내 주겠다 하셨습니다. 음, 기다리실 필요는 없고 제가 받아서 전해 드리면 되겠네요.”
“고맙습니다. 알렉산드라.”
문답무용으로 파리 음악원에 오지 않겠냐고 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 되는 실력자가 짚어 낼 부분이 전혀 없이 완벽할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지금까지 안 물어본 게 이상했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죠?”
“제 평가를 부탁드린 분이 누구죠?”
“아, 제가 로마 대상 심사위원이라고만 말씀드렸었나요?”
알렉산드라는 깜짝 놀라더니 미안한 목소리로 답했다.
“브누아 랑베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지휘자, 그리고 음악학자로 프랑스에선 정말 저명하신 분이에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주변에서 다시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브누아 랑베르라는 이름은 그만큼 음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음악가였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런 사람에게 곡을 보이게 될 것이라곤 오늘 새벽 악보 마지막을 마무리 지었을 때만 하더라도 상상도 못했다.
뒤늦게 한숨 돌린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편안하게 말했다.
“그런 분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서 다행이네요.”
“곡이 정말 훌륭한 덕분이겠죠.”
알렉산드라는 담백하게 이야기하더니 무언가 결심했는지 보다 솔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사실 다른 몇몇 분께도 보여 드릴까 생각이 있었는데, 일단 여기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가죠.”
양손으로 손뼉을 짝 치며 그녀는 연주회 기획을 확정지었다.
“초연은 허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이 이야기로 마주했을 때만 해도 알렉산드라는 반신반의로 초연 기획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말을 듣더라도 밀어붙일 것 같은 적극성이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손뼉을 친 손을 그대로 깍지를 낀 채, 그녀는 약간 들뜬 사람처럼 손을 테이블 위로 흔들거렸다.
“저도 정말 기대가 되네요. 에르네스트가, 그리고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어떤 무대를 보여 주실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강력해진 신뢰로 그녀가 주위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 눈빛들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만이 가득했다.
“그 뒤에서 저도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온 것처럼 앞으로 남은 시간도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 만들 수 있길 바랍니다.”
모두를 이끄는 알렉산드라 다음으로 콰르텟을 이끄는 게오르기는 거기에 질세라 말을 더했다.
“저희야말로 최선을 다해야겠네요.”
“우린 새 곡도 없는데, 어쩌죠?”
“이럴 줄 알았으면 의뢰라도 할걸 그랬네.”
“2주 안에 써 달라고 했다간 욕이나 잔뜩 먹었을걸?”
그녀만 한 카리스마가 분명 있음에도 멤버들의 농담이 오간다. 에르네스트는 그사이 은근한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에 약간 부담을 느꼈다.
이 사람들…… 연주회 끝나고 나서라도 곡 써 달라고 하는 것 아냐?
하지만 작곡가를 지망한다면 마냥 피할 일도 아니었다.
피아노를 전문으로 해서 현악엔 아직 조예가 얕지만, 에르네스트는 그 방면도 놓치지 않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알렉산드라는 회의 결과를 정리해서 다시 한번 브리핑하고 다음 날짜를 잡았고, 아나스타샤는 이후 퀸텟 리허설을 위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르네스트는 이후 할 일이 없었다. 타티아나와 듀엣 연습을 더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눈이 바로 감길 것처럼 졸렸다.
밤새워 작곡을 마치고 연습과 회의까지 마친 그의 정신력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딱히 뭘 더 할 생각도 들지 않아서 가만히 사람들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타티아나는 다시 알렉산드라와 연주회 건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그렇게 가만히 있는 에르네스트의 곁에 아나스타샤가 휙 다가왔다.
“오늘 정말 좋았지?”
에르네스트는 고개만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았다면 좋았지만, 예상 이상으로 너무 좋은 평가에 아나스타샤가 순간적으로 보였던 감정은 여전히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 말했다.
“부러워, 에르네스트.”
차마 장난으로 대꾸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말을 더해 주자니 바닥난 정신력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뭐가?”
“모르는 척하지 마. 그게 더 약은 거니까. 오늘 주인공은 너였잖아?”
괜한 모르쇠는 그녀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실수하지 않으려 하며 말했다.
“그냥 다 같이 연주할 곡이 잘 되었다는 걸로 충분해.”
“흥…… 속으론 좋아 죽을 지경이면서.”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니?”
좋은 평가가 기분 나쁠 이유는 없지. 하지만 좋아 죽을 지경은 아니었다. 잠이 깰 정도로 억울한 기분에 에르네스트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킥킥거리더니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잠도 안 자고 해냈으면서 억울하다는 표정 짓지 마. 나야말로 대체 네가 뭘 기다리면서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정말로.”
그녀가 향하는 시선 사이엔 알렉산드라와 대화 중인 타티아나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에르네스트는 멀거니 아나스타샤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비로소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했다.
그가 이해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아나스타샤가 조금 더 은밀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진짜 쇼팽 콩쿠르 우승이라도 하고 나서 타티아나와 이야기할 작정이야?”
“……아나스타샤.”
“퀸 엘리자베스는 6월이면 끝나. 그건 알지?”
그녀의 말대로 두 콩쿠르 사이엔 몇 개월이나 되는 시간 차이가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지금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타티아나에게 영향만 안 가면 상관없으니까 그사이 먼저 대쉬라도 하라는 건가?
일단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먼저 일어서며 아나스타샤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얌전히 그를 따라 나왔다.
“…….”
연습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고 창가 쪽으로 향한 두 사람은 멀찌감치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속으로 단어를 골랐다.
이해가 안 가는 소리 말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집요하게 캐물어 볼 것 같았다.
차라리 오늘 이 결과로 자신감을 조금 얻었다 한들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실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네가 왜 날 독촉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는 넌…….”
“우리가 같다고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나랑 너랑 같니?”
“…….”
그 한마디에 에르네스트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가 말을 꺼내면서 자신을 우위에 두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느꼈기에.
불리하다면 불리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건 정말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잠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말이 없었다. 먼저 말하면 지는 게임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일 대신 재미있는 걸 하자는 듯, 아나스타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게임 하나 할래?”
“무슨 게임?”
“이긴 사람이 진 사람 비밀 하나 공개하기 어때?”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지금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