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8화
에르네스트는 싸늘한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지금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긴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맥락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내기 내용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타티아나에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어릴 적 창피했던 기억 같은 걸 공개하겠다는 수준이 아니다. 그녀는 무엇이 되든 간에 상황을 진전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싫어.”
“왜? 질까 봐?”
“아니.”
단순히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아나스타샤는 전혀 공정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는 바보 취급하지 말라는 뜻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이긴다고 해도 의미가 없으니까.”
“왜 의미가 없니?”
“네 이야기를 멋대로 떠들고 다니라고? 사람 쓰레기 만들 일 있어?”
그가 아는 아나스타샤의 비밀이라고 해 봐야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허락을 받는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나스타샤는 잠시 말이 없더니 곧 살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건 고맙네.”
아무리 내기 내용이라 하더라도 정도를 지키려 하는 에르네스트를 보며 아나스타샤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알았으면 이제 장난 그만 치라고 할 참이었는데, 아나스타샤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듯 가늘게 웃더니 이어 말했다.
“그런데 난 멋대로 네 이야기 하고 싶은데.”
“……왜 이러는데 진짜.”
너무하지 않나.
에르네스트는 적어도 콩쿠르 전까진 모두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음악에 집중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애초에 친구로서의 의식 말고는 별로 없는데다가 피아노를 여전히 최우선으로 여기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자신의 일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그녀가 좋은 결과를 얻을 때까진 신경 쓰이게 하지 않는 것이 친구로서의 도리이기도 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아나스타샤도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따금 이렇게 에르네스트를 도발해 오곤 했다.
차라리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선수를 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자꾸 에르네스트에게 떠넘기려는 것 같아서 그는 약간 화가 났다.
그런데 신경질적으로 바라보는 에르네스트에게 향하는 아나스타샤의 얼굴은 어떠한 이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게임 하자는 거야.”
약간 망연하게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치 중요한 결정을 놓고 동전던지기를 하며 그것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처럼.
“네가 이겨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그렇게 맡기고 싶어졌어.”
“…….”
그렇게 말을 마친 아나스타샤는 이제 자기도 잘 모르겠으니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 고개를 숙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향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과감한 결단도 서슴지 않는 아나스타샤가 이렇게까지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정도라면 그 고민이 얼마나 깊을지 상상조차 안 간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말하는 건 정말 큰 상처가 될 것이다.
“…….”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한마디 해야만 했다.
풀죽은 경쟁자는 손쉬운 사냥감이지만 에르네스트는 상대의 약점을 공격해서 무너뜨리는 스타일의 전술가가 아니었다.
그는 오롯이 완전한 상황에서 정당하게 승부하는 쪽을 좋아한다.
아나스타샤 역시 비슷한 성격이라서 두 사람의 상황은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아나스타샤.”
“응?”
이름을 불린 아나스타샤가 순진하게 고개를 드는 찰나, 에르네스트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강하게 튕겼다.
아나스타샤는 막을 생각도 못 하고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생각보다 너무 세게 들어갔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에르네스트는 갑자기 발 같은 게 반격으로 날아올까 봐 때려 놓고도 은연중에 방어 준비를 했지만,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이마를 맞은 게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황망해하던 것도 잠시, 아나스타샤는 곧 눈을 부릅뜨고는 에르네스트를 노려보았다.
“너, 너…… 지금 나 때렸어!?”
“엄살은. 이게 때린 거냐?”
“그럼 뭔데!? 아, 머리 아파…… 너 이거 타티아나한테 다 이를 거야.”
부모님이나 일리야도 아니고 갑자기 타티아나에게 이른다니, 얼핏 웃긴 소리 같았지만 사실 에르네스트에겐 그게 제일 무서운 말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뻔뻔하게 투덜거렸다.
“……갑자기 그러기냐?”
“너야말로 갑자기 이랬잖아!”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뭐라고?”
진짜 되갚아 주기라도 할 것처럼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썼다.
에르네스트는 분노로나마 약간 기운을 차린 그녀에게 제대로 본론을 꺼냈다.
“저번에 나한테 그랬지.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렇게 진지했으면서 왜 지금은 될 대로 되라 식인데?”
“……어?”
“너야말로 내가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걸로 보여?”
맞기도 하고 혼나기도 한 아나스타샤는 약간 어이없어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의 잘못이라는 걸 대부분 인정하는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침울해하길 바라는 게 아니었기에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확실한 고집이 서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꼭 장난인 건 아니야.”
갑자기 게임을 해서 서로의 이야기를 멋대로 하자는 게 어떻게 질 나쁜 장난이 아닌지 에르네스트는 이해가 안 갔다.
그는 똑바로 설명하지 못할 거면 아예 말하지 말란 태도로 표정을 굳히고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이해를 하지 못할 리 없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에르네스트 너도 알 거야. 우린 늘 실력을 최우선으로 치지만 사실은 운도 정말 중요하다는 걸.”
갑자기 나온 이야기였지만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늘 노력은 배신하지 않음을 믿으며 실력 외의 요소들이 영향을 주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에르네스트도, 그간 크고 작은 경쟁들을 수두룩하게 겪어 오면서 운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오늘 있었던 그의 평가에 대해서도 알렉산드라가 공신력 있는 프랑스의 음악가인 브누아 랑베르를 알고 있었던 것과, 그 브누아의 음악적 견해가 에르네스트의 곡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던 것, 모두 그의 입장에선 운이 좋았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지 않니?”
“그렇다고 쳐.”
“삐딱하긴. 아무튼…… 난 결국 운에 많이 기대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말야.”
아나스타샤의 실력도 충분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나스타샤가 완벽하게 자신감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운은 좀 좋은 편이거든.”
세상 못하는 것 없이 잘 하는 그녀가 ‘다른 건 몰라도’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정말로 지금 운이 좋길 바라는 듯했다.
“…….”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말을 조금 깊이 생각해 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단순히 요행을 바라거나 정말 운으로 무언가 결과를 얻어 내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존심도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타티아나의 태도는 운에 의존하여 바뀌거나 할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아나스타샤 나름대로의 신중한 결과로 찾아낸 것이 그저 운이 아니라 운명에 가까운 무언가라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성이 보일 정도로 아나스타샤가 바라는 것은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쉰 에르네스트는 결국 이번만 양보하겠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종목이 뭔데?”
“할 거니?”
“들어 보고.”
뭐든 간에 어지간한 것이라면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상식적인 사람이니 에르네스트의 비밀 운운하더라도 주변을 크게 곤란하게 만들 일을 벌이진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운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게임이라면 어떤 종목이 있을까.
쉽게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이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듯 제안했다.
“다트 던지기 어때?”
“너 그거 저번에 보니까 프로선수 해도 되겠던데.”
“그럼 체스는?”
“운을 시험해 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받아 줄 것 같으니까 이기고 싶어지네?”
대놓고 실력으로 꺾어 주겠다는 태도다. 에르네스트가 헛웃음을 흘리자 아나스타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정말 운에 맡겨 보고 싶다고 했던 건 그녀의 진심이었던 만큼, 곧 가볍지만 웃음기 없는 목소리로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처음 문을 열고 나올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로 정하는 건 어때?”
“어디, 저기?”
“응.”
그녀는 손가락으로 연습실을 가리켰다.
의도하지 않아도 에르네스트의 머릿속에선 자동적으로 승산이 계산되었다.
이 게임은 언뜻 공정하게 보이지만, 사실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므로 촬영팀까지 포함한다면 성비가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전혀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잠깐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공정하지 않잖아.”
“남자가 많지?”
“그러…….”
“그러니까 난 여자인 거에 배팅할게.”
“?”
에르네스트는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봐도 남자 쪽에 거는 게 유리한 게임인데 아나스타샤는 고민도 안 하고 그 반대편에 걸었다.
불리한 편에 건다고 해서 배당이 높은 게임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한 건 그야말로 손해밖에 없는 행위였다.
“왜?”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는 투로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는 짙게 웃기만 했다.
“안 할 거니?”
“…….”
운이 좋은 편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정말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는지 제대로 시험해 보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배팅의 기본은 운이 아니라 수학이다. 에르네스트가 빠르게 산출해 낸 승리 확률은 약 71퍼센트였다.
정말 높은 확률이었다. 어차피 이긴다고 해도 그가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다. 현황 유지로 두면 될 일이다.
계산을 마친 그는 내기를 받아들였다.
“하자.”
“그럼 지금부터 처음 나오는 사람이다?”
두 사람 사이의 게임이 즉흥적으로 시작되었고, 겨우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연습실 문이 살며시 열렸다.
그 너머로 타티아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 하시나요?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
“…….”
에르네스트는 확률은 확률이고 결국 운이 전부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대놓고 좋아하진 않았지만 아나스타샤는 거보라는 듯 약간 으스댔다.
내기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에르네스트에게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타티아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무슨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나란히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게 그냥 궁금해서 따라나선 느낌이었다.
그녀가 나와 볼 것이란 걸 예상한 건가? 에르네스트는 완전히 뒤통수 맞은 기분으로 아나스타샤에게 낮게 물었다.
“너…… 알고 있었지?”
“응? 뭐를?”
아나스타샤는 시치미를 뚝 떼며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웃었지만, 그 태도에서 이미 타티아나가 나와 볼 것이란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물론 타티아나의 행동을 완전히 예측할 순 없었고, 그사이 다른 연주자나 스태프가 나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간 텀이 있었으므로 에르네스트도 억울해할 건 없었다.
그래도 내기를 수락하자마자 타티아나가 나와서 져 버린 건 정말 운 이상의 무언가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게임이라 하더라도 결과엔 승복해야 했다. 아나스타샤는 은근히 그의 입으로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적당히 해.”
“그러니까 뭘?”
“…….”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는 아나스타샤가 필요 이상으로 막나가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혹여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그는 불안해하지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최선을 다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아,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갈게.”
타티아나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계속 바라보니 아나스타샤는 웃으며 먼저 앞장섰다.
에르네스트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