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2화
스마트폰을 받아 쥔 타티아나는 바로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타티아나는 순진하게 별 생각 없이 걸거나, 혹 농담을 눈치챘더라도 모른 척하고 넘겨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주제를 꽤 불편해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티아나가 쉬운 사람인 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보던 타티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여러 의아함과 올곧은 직관이 담겨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그 눈빛에 숨을 멈췄다가, 간신히 물어보았다.
“왜?”
“궁금해서요.”
“뭐가?”
“에르네스트가 좋아했으면 하시나요?”
순수한 의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어서 모르쇠로 되물었다.
“그렇게 들렸니?”
“정확하게 그리 말씀하셨잖아요?”
타티아나는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아나스타샤가 평소 투닥거리기 좋아하는 에르네스트를 자꾸만 언급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 애가 기뻐했으면 하냐고? 아니, 약간 달라.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갑자기 똑바로 물어 오는 타티아나를 보며 어떻게 말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본데 있는 타티아나는 늘 상대를 당황시키지 않도록 배려해서 말하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직설적으로 당황시킬 때가 있었다.
타티아나가 아예 스마트폰을 내려놓더니 이어 말했다.
“며칠 전 기억하시나요. 복도에서. 그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셨던 말.”
“…….”
“왜 그런 걸 물어보셨나요?”
그땐 어색해하며 피했으면서, 여긴 다른 듣는 사람이 없고 사적인 공간이라 확신했는지 물러섬이 없다.
방금 연주를 했을 때 누워서 들을 정도로 타티아나는 이곳을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무슨 말을 해도 들어 줄 것 같은 타티아나를 앞에 두고 아나스타샤는 확신했다. 이런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만한 분위기가 자주 오진 않는다.
물론 그 대상은 이 자리에 없는 친구였지만, 본래 연애 이야기라는 게 다 그런 법이다.
아나스타샤는 너무 진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약간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작년까진 이런 이야기는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아니잖니? 기억도 다 돌아왔다고 했으니까.”
“……예?”
“이미 알고 있지? 그 애가 널 좋아한다는 것쯤은.”
이 정도 말했다고 화내진 않겠지?
솔직히 이건 우리끼리가 아니라 학교 전체가 아는 사실이나 다름없잖아.
에르네스트는 연주회가 끝나고 콩쿠르가 끝날 때까진 되도록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평소에도 음악적으로도 티를 내면서 아닌 척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아나스타샤가 열 받는 부분은 그 부분이었다. 왜 환심은 있는 대로 사면서 콩쿠르 때까지 음악만 하는 척하는 건데?
그리고 당연히 타티아나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연애사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정도 눈치가 없을 정도로 둔하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한마디를 꺼냈다.
“아마……도요?”
“아직도 추측성이니?”
“그야…….”
어색한 듯 쭈뼛거리던 타티아나는 곧 괜히 몰아가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직접 그런 말을 듣진 못했으니까요.”
꽤 당당한 태도다. 마치 이겼다는 것처럼 말하는 타티아나를 보니 조금 어이가 없다.
그러나 오늘을 위해 아나스타샤는 준비한 것이 있었다.
“이미 들었어.”
“……?”
무슨 소리냐는 듯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로 자신이 에르네스트로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 생각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장난치지 말라는 듯 눈을 흘긴다.
“그런 적 없어요.”
“전에 그 애에 관한 이야기 했을 때 내가 재미있는 것도 보여 주겠다고 했었는데. 기억나?”
“아…… 그랬었죠?”
“그걸 네게 보여 줘도 될지 안 될지 고민 중이야.”
지금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진 타티아나도 충분히 파악한 표정이었다. 에르네스트와 관련된 것이란 걸 알자마자 타티아나는 진지해졌다.
괜한 흥미 본위의 장난이라면 되도록 삼가 달라는 것 같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받으셨나요?”
“응? 응.”
“정말요?”
“정정당당하게 받았어.”
운으로 하는 내기에서 이긴 것이니 분명 정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나스타샤는 조금 갈등했다.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에르네스트는 분명 입을 꾹 다물고 있었을 테니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이해했다. 중요한 시기가 올 때까지 모두의 관계에 대한 것은 보류해 두는 게 낫다는 건 꽤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처음엔 그럴 생각으로 피아노에 집중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 계획만을 따라가면 계속 휘둘릴 일밖에 없다.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적어도 그의 감정 정도는 제대로 밝히란 것이었다.
애초에 이런 걸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아나스타샤는 최소한의 의리를 지켜 에르네스트에게 정말로 허락을 받아 냈다.
그는 적당히 하라고 했지만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타티아나의 표정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엔 이 자리에 없는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 심지어 그와 자신에 대한 깊은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에 상당히 거북해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아나스타샤 말고는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다.
“그렇다면 보여 주세요.”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타티아나에게서도 묘한 관심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확인일 뿐이지.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다시 들고는 메시지 창을 띄워선 한 메시지를 찾아내어 보여 주었다.
타티아나란 단어를 발송한 메시지였다. 당연히 타티아나는 어리둥절해했다.
“……뭐예요 이게?”
“전에 단어 마피아 했을 때, 마지막으로 내가 에르네스트에게 보냈던 단어.”
그렇게 정답을 말해 주고 나서도 타티아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몇 초 지나서야 어깨를 움찔거렸다.
잠깐 지나갔던 게임일 뿐이지만 기억력이 좋은 타티아나가 마지막 게임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아나스타샤는 스마트폰을 접으며 말했다.
“기억나? 그 애가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요…….”
자신이 마피아의 단어를 받았다는 걸 알자마자 에르네스트는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다른 아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만약 아나스타샤가 거기에서 단어를 공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뻔히 알았을 텐데, 정말 과감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을 지금 타티아나도 전부 이해했다.
타티아나는 그의 말보다는 그 상황 자체를 돌이키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상상도 못했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리 태연하게……. 전 당연히 베르만이 아닌 다른 피아노 연주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하하.”
“웃지 마세요!”
아나스타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타티아나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바락 화를 냈지만 하나도 안 무서웠다.
재미있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웃기만 하자 타티아나는 다시 고집스럽게 허리를 세웠다.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중이란 단서를 붙였으니 아마 연주자로서의 이야기겠죠.”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
타티아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연주자로서 타티아나를 높게 평가하고 가까이한다.
그러나 비단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한 번이라도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이런 식으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확인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늘 모두가 편하게 있게 해 주었던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증거를 들이밀면서 에르네스트와 관계를 인정하라는 듯 나오자 실망감을 느끼는 표정이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조용히 물었다.
“왜 제 이름을 보낸 거예요?”
아나스타샤의 이유는 간단히 정리해서 설명할 수 없었다.
시간만 끌면 뜻대로 되리라 확신하는 것 같은 에르네스트에게 유리한 타이밍을 넘겨주고 싶지도 않았고, 기억을 찾기 전엔 분명 혼란스러워하던 타티아나가 지금은 무슨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 본인의 감정을 전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녀는 에르네스트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타티아나의 생각을 듣고자 했다.
어차피 선택 자체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꼭 먼저 앞서서 갈등거리를 던져 주는 입장이 될 필요는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그걸 알기에 시간을 두고 있는 것이었고.
아나스타샤는 그런 아슬아슬한 균형과 역학을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고.
“글쎄?”
그저 의뭉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기울이자 타티아나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표정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도 느껴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여전히 답을 쥐고 있지 못했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 타티아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아나스타샤.”
화가 난 것 같진 않지만 정말로 부탁하는 목소리였다. 아까 전부터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쿡쿡 찌르던 미안함이 입 밖으로 나왔다.
“……기분 나빴니?”
“그게 아니에요.”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기억을 찾은 것에 대해 말씀하셨죠. 맞아요. 전 올 봄에 쓰러졌다 일어난 이후로 지난 14년에 대한 기억을 전부 되찾았죠.”
다른 친구들을 모르는 사실을 아나스타샤는 안다.
타티아나는 이제 두 살짜리 피아노 연주자가 아니다. 열네 살까지의 충분한 기억을 지닌 또래인 것이다.
이제 유예는 필요 없지 않냐는 투로 아나스타샤가 말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반년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아나스타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 일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전까지 저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었니깐요. 이전의 자신을 알고 난 뒤엔 그런 불안이 많이 줄었죠.”
과거를 모른다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새로워 보이는 세계에서 무엇을 좋아했는지, 무엇을 싫어했는지 모르는 상태로 아무것에나 손을 뻗을 수 있을까.
타티아나에게서 처음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아나스타샤는 그것이 정말 어려운 이야기라는 걸 느꼈다.
물론 신경 쓰지 않고 하나하나 신선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기억해 나가도 되겠지만, 타티아나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그것을 굉장히 어렵게 여겼다.
그렇지만 이젠 아니다.
과거의 기억과 취향 등을 모두 떠올렸고, 실제로 그건 지금 타티아나에게서 조금씩 묻어나고 있었다.
굉장히 사소한 차이이지만 아나스타샤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 과거와 기억에 속박된 건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여전히 저는 아나스타샤가 답답해하는 타티아나란 말이죠.”
타티아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약간 어려워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편안하고 분명한 목소리였다.
“전 제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느껴요. 14년이란 길이는 제 전부를 덮어씌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지난 2년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만큼 제게 충분히 특별하고 소중했거든요.”
“…….”
“자아라는 것이 어디에 위치하는진 몰라도 제 시간의 흐름은 2년 전 그 순간부터 이어지고 있어요.”
평소 타티아나는 철학이나 심리학 심지어 신학 같은 서적들도 많이 탐독하는 편이다.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하는 공부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타티아나가 무엇을 알아내었는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명확했다.
타티아나는 누군가에게 맹목적으로 끌려가거나 종속되는 삶을 살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따라 책임지게 될 것이란 걸.
다시 한번 아나스타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타티아나가 이야기했다.
“그러니 갑자기 제가 연주자 타티아나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 주변을 볼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스스로를 연주자라고 말하는구나.
요컨대 갑자기 평범한 열여섯 살이 될 일은 없으니 지금은 이전처럼 대해 달란 부탁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고, 평소에도 타티아나가 그런 사이를 바란다는 건 아나스타샤도 잘 안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은근히 이야기를 돌리고 기억에 속박되지 않는다며 부정하면서도, 에르네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자각이 없더라도 아나스타샤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