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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783화 (783/1,277)

##  783화

차라리 발렌티나라면 모를까, 아나스타샤가 이 정도로 연애사에 관심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증거까지 가지고 와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니 많이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난 살짝 주제를 회피해 나갔다.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정도로 다른 이야기라면 아나스타샤와 얼마든지 솔직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만, 친구들에게 향하는 내 감정은 그녀에게만큼은 솔직하게 말하기 어려웠다.

내 감정은 사실 좋아한다는 말랑말랑한 감정보다는 더 무겁고 어두운 쪽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예카테리나에게 한 번쯤 털어놓은 적 있었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난 사실 누구에게도 이런 내 강박적인 생각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이유와 기적을 느끼는 나로선 어쩔 수 없이 느끼는 것들이긴 하지만, 되도록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다시 내 기억에 관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틀었고, 이해력이 빠른 아나스타샤는 내가 아직 그녀와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기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보였다.

“타티아나…….”

그간 가볍게 날 부추기기도 하고, 무언가 관계성에 결착을 짓고 싶어 하던 아나스타샤는 조금 미안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냥 괜찮다고 말하려던 난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친구들과의 관계를 복잡하게 생각하는 만큼,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결코 흥미 위주로 쉽게 생각하여 움직이거나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로 내는 내 이름의 잔향이 옅어져 갈 즈음, 아나스타샤는 그 뒤로 무어라 말을 이어 붙이려 입술을 달싹였다.

난 그 작은 움직임에서도 수많은 집념과 갈등을 읽어 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그 이상 자신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늘 너무 많은 걸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천천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또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했네요. 미안해요.”

“아니야. 괜찮아.”

“아버지나 오빠는 제가 기억 이야기를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혼자서 생각이 많다 보니 가끔 아나스타샤에게만 이런 말을 하게 되네요.”

내가 겪는 문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정신과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그건 아버지와 오빠의 걱정을 심화시킬 뿐이다.

비상시를 대비한 약들이 자하르에게 맡겨져 있다는 건 이미 내가 걱정의 중심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난 긴 시간을 거쳐 검은 새에게 허락을 받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혼란스럽지 않았다.

개인적인 선택에 대한 문제 같은 건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선 가족들에게 말한 적은 전혀 없고, 내 기억 문제에 대해 아는 단 한 명의 친구인 아나스타샤에게만 말하게 되는 것 같았다.

사실 그녀에게만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알리려 했을 때 막았던 것도 아나스타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아마 다른 친구들에게 말해 봤자 서로 정말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괜한 걱정만 잔뜩 샀을 것 같다.

특히 에르네스트는 더더욱 거리를 두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만 해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

이 자리에 없는 친구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아나스타샤와 눈을 마주했다.

내 일방적인 이야기를 들어 주고 내 편이 되어 주었던 그녀는 빙그레 웃더니 물었다.

“생각이 많니?”

“아마 보편적인 사람들이라면 할 필요가 없는 생각들이요.”

“예를 들면 어떤 거?”

“글쎄요…… 음.”

난 가끔 상념에 잠겨 스스로의 존재 의의나 운명 등에 대한 생각을 하곤 하지만, 사실 지금 아나스타샤와 나누던 이야기와 결부되던 생각은 훨씬 더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었다.

다음 주에 에르네스트 얼굴을 어떻게 보면 되는 걸까.

“아녜요. 아무것도.”

난데없이 든 생각에 나도 모르게 얼버무렸다.

생각이 딱 멎는 기분이다. 이건 평범한 사람들이 할 만한 고민인가? 아닌가? 난 지금 그 자체를 구분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혼자서 머리 아파하고 있자 아나스타샤는 무슨 생각을 하냐며 더 묻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듯 대충 끝맺은 아나스타샤는 실없이 웃더니 아까부터 있었던 이야기들의 흐름도 천천히 거두어들이며 정리했다.

“나야말로 오늘은 미안했어. 난…… 어쩌면 네가 기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제가요?”

난 약간 황당했다.

에르네스트의 표현 자체는 기쁘기도 했다.

검은 새의 기억이 뒤섞인 내가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느껴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아나스타샤가 유도한 결과라는 건 무척이나 이상했다.

내 상황을 이해하는 그녀가 시간을 더 벌어 주었으면 벌어 주었지, 갑자기 급하게 당기려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오늘 그녀는 일종의 충격요법을 준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행동과 달리 생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나 보다.

아나스타샤는 손가락을 들어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까 그랬지? 그 애가 기뻐하는걸 보고 싶냐고. 아니? 난 그런 건 솔직히 관심 없어.”

빙빙 돌던 손끝은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와 날 가리켰다.

“난 그냥 네가 기뻐했으면 좋겠어. 그게 다야.”

잔뜩 당황스럽게 해 놓고선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고 반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약간 어색함과 미안함이 담긴 미소로 날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거짓이나 다른 의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정말 내가 기뻐하기만을 원한다면, 나 역시 그녀가 기뻐하기를 원한다.

일단 이 자리에 필요치 않은 이야기는 그만두자는 뜻으로 난 다리를 끌어올리며 그녀와 마주 보았다.

“전 지금이 좋은걸요. 이렇게 아나스타샤와 이야기도 하고. 음악 연구도 하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는 듯 아나스타샤가 빙그레 웃었다.

주말에 그녀의 집에 놀러와 함께 식사도 하고 음악가로서의 역량도 키워 나가는 이 시간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

영원히 이런 시간이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학교도 가야 하고 연주회도 해야 하는 숙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기에 좋은 시간은 잠깐밖에 이어지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그럴수록 더더욱 이 시간에 집중하면서 여기에 없는 다른 것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충실한 것이 기본적 예의라는 걸 새삼 떠올린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나 하자는 듯 농담조로 물어왔다. 우리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네가 만약 기억상실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내 가치를 억지로 찾아내고 싶진 않았기에 떠올리지 않았던 생각이지만, 넘겨받은 기억만으로 돌이켜 본다면 아마 그렇게 평화롭진 않았을 것 같다.

검은 새는 늘 불안에 시달리며 분노를 가득 쥐고 있었고 좋아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나와 달리 어떤 사람이었을지 상상하긴 어려웠다. 부정적인 생각은 되도록 하고 싶지도 않았고.

단지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중앙음악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을걸요?”

“뭐? 그건 안 돼!”

일단 피아노에 대한 지식과 재능 등은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검은 새가 피아노 연주자로서 성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 중 하나인 중앙음악학교에 가는 건 불가능했을 테고, 아나스타샤나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없었던 일이 되었겠지.

언젠가 내가 없는 중앙음악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리처드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야기 덕분에 내 자신에 대한 가치를 보다 긍정적으로 느끼면서 이 시간과 자리에 위치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른 건 순리대로 가는 것이 좋지만 중앙음악학교에 오게 된 건 정말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내 고집으로 이루어진 진로이긴 하지만…… 모두 포기할 테니 하나만 하게 해 달라고 부렸던 그 고집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 되었다는 것에 얼마나 큰 감사를 느끼는지 모른다.

아나스타샤도 내가 학교에 없는 건 상상하지도 못하겠다는 듯 도리질하더니 조금 억지를 썼다.

그녀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모습은 상당히 귀엽다.

“그냥 사고 없이 우리 학교에 왔다고 치면?”

“글쎄요…… 그래도 제 본래 성격대로라 하더라도 아나스타샤와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으리라 생각해요.”

“본래 성격이 어땠…… 아.”

단편적으로나마 들었던 것이 있는지 아나스타샤가 약간 어색해했다.

나도 조금 어색했지만, 그래도 없는 소리를 그녀 기분 좋으라고 해 준 것은 아니었다.

분명 다정한 아나스타샤는 검은 새를 가만두지 않고 무엇이든 도와주려 했겠지.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배시시 웃자 아나스타샤는 약간 아리송한 눈빛을 했다.

새삼 내가 진짜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안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의구심을 가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떠올리는 건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였다.

발렌티나나 에르네스트, 리처드와 한승우,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내가 끌어들인 수많은 관계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묻는 눈빛.

쿨한 성격의 검은 새가 나처럼 오지랖을 부리고 책임감을 느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어찌 될 일인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에르네스트같은 경우엔 어땠을까.

시험 삼아 사귀어 보기라도 하라고 아나스타샤가 말했을 때 진짜로 실행에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농담으로라도 불성실하고 예의가 없는 행동이니 난 다시 죽어도 못 하는 행동이겠지만.

“……잘 모르겠네요. 어려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또 이 방을 나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이 새어 나간다.

난 괜한 생각으로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기억이 있든 없든 아나스타샤와 친해질 수 있다면 전부 된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데, 아나스타샤는 내 마음도 모르고 뭔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가끔은 본 성격도 보여 줘 봐. 애들 깜짝 놀라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마음대로 그게 되나요?”

“안 될 건 뭐니?”

진짜 만약 그런 순간이 오면 다른 분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가 첫 번째예요.

난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하며 그녀를 어떻게 하면 놀라게 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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