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86화 (786/1,277)

##  786화

월요일 아침. 일찍 학교에 도착해 보니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주말 내내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을 교실은 그 며칠 사이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들어가서 앉으면 나까지 그 멈춰 있는 시간 안에서 굳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가만히 햇살이 들어오는 교실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중앙을 가로질러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들어오면서 교실 안의 시간이 흘러가도록 했다.

하나, 둘, 셋. 여러 개의 창문들을 모두 활짝 여니 순식간에 교실은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

“…….”

그런데 창문을 열어두니 금세 추워졌다.

환기도 어느 정도 되었다 싶어서 난 다시 창문들을 닫고는 의자에 앉았다.

냉기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너무 큰 공간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피아노가 있는 공간이라면 그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겠지만, 악기가 없는 무력한 연주자인 내게 이 공간은 혼자 앉아 있기엔 너무나 컸다.

아나스타샤나 발렌티나는 언제 오는지 메시지를 보내 볼까 하다가, 딴짓을 하기보단 교실의 용도에 맞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난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혹시라도 빠트리면 안 되니 어젯밤에도 확인하고, 오늘 아침에도 두 번은 확인했던 노트였다.

평범하게 여러 용도로 쓰는 이 노트는 주말간 아나스타샤와 했었던 음악 연구로 인해 몇 페이지나 잔뜩 필기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페이지는 그 전부가 작곡가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

번호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질문들을 난 다시 천천히 읽어내렸다.

그 하나하나가 이틀 동안 했던 연구에서 미처 찾지 못하고 빠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었다.

이 퍼즐 조각의 생김에 대해 나와 아나스타샤는 상당히 근접하게 유추해 내고 있었지만, 그 결정적인 그림에 대해 에르네스트에게 묻고 찾아 맞출 생각이었다.

가만히 질문들을 보면서 혹시 이상한 것이 있는지 다시 확인하던 난 갑자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너무…… 일방적이지 않나?’

에르네스트는 분명 이 곡의 작곡가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 친구이며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갑자기 헷갈린다.

이렇게 질문들을 정리한 노트를 턱 하고 그의 앞에 내려놓으면 그가 어떻게 반응할까?

어제 마지막으로 쓸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막상 교실에 와서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짜증을 내거나 귀찮게 여기진 않겠지만, 난감해하진 않을까. 이건 작곡가로서의 그에게도, 그리고 친구로서도 잘못된 방식이 아닐까.

지금까지 우린 항상 피아노 앞에서 음악을 교류하고 의견을 나누어 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서면으로 무언가 하려니 너무 어색했다.

문제는,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다.

머릿속 한편에선 이 방식이 그와의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선을 긋게 될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심지어 이건 전화를 하기 전 무의식적으로 내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난 왜 이렇게 하길 원했지?

그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직전에 아나스타샤가 내게 우리의 관계들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

물론 그건 내가 느끼기에 어떠한 답안을 바라서 나누는 토론이 아니라,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가뿐히 나올 수 있는 주제에 가까웠다.

때문에 난 살짝 피해 나갔고, 아나스타샤 역시 적당히 우스갯소리로 넘어가 주었다. 주말에 있었던 수다다운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 것과는 별개로 내가 에르네스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잘 못 잡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펼쳐진 공책을 보니 머리가 아팠다.

음악 이야기를 이렇게 사무적으로 하고 싶어질 정도로 방어적이 되었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어쩌지…….’

그냥 지금이라도 주말에 들었던 건 아예 못 들은 걸로 할까? 나랑 아나스타샤가 나눈 비밀 이야기니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그가 알 방법은 없다.

내가 평소처럼만 한다면 그도 평소처럼 대해 줄 것이다.

적어도 에르네스트가 직접 무언가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먼저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결심이 점점 평소처럼 하는 것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를 싫어했더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을거란 걸.

‘객관적으로 보지 마…….’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난 양손을 모아 쥐었다.

버릇처럼 여러 상황을 가정하며 객관적으로 선택을 나누어 놓으니 점점 더 생각이 복잡해져 갔다.

그냥 기분대로 쿨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못 미덥게 처신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난 막 부스러져 가는 스스로에 대한 판단력을 다시 부여잡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일단은 노트를 집어넣고 스마트폰이나 보면서 정신을 분산시키려던 때였다.

“나름 일찍 왔는데.”

“안녕, 타티아나. 좋은 아침!”

교실 뒷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섰다.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였다.

적적하게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가 평소 같았으면 가장 반겼을 두 사람이지만, 지금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했던 내게 가장 복잡하게 다가오는 친구들이기도 했다.

어떻게 같이 들어오게 된 거지? 언제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보기에 우선 분위기는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머리가 일을 하지 않는 사이 입이 알아서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좋은 아침. 같이 오셨네요?”

에르네스트는 엄지손가락으로 뒤편과 아나스타샤 사이를 대충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앞에서 만났어.”

“아침부터 얼마나 웃겼는데. 사샤가 널 데리고 일찍 왔다고 의기양양해하던 게…….”

“그냥 애가 하는 말이잖아. 그만 좀 해.”

“어디 사샤가 그냥 애니?”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앞에서 만나선 계속 농담을 주고받으며 올라온 모양이다.

내 옆까지 온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나스타샤는 내 바로 옆. 에르네스트는 창가 쪽 뒤편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그렇게 혼자 살짝 떨어져 앉는 걸 택하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뭔가 신경이 쓰였다.

나도 모르게 그대로 그쪽을 바라보려다가 다시 차분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평범하게. 전혀 신경 쓸 일 같은 건 없는 것처럼 대할 참이다.

몇 초 정도 흘러 조금 차분해졌을 때, 난 에르네스트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것도 평범한 일이겠지만, 이건 아나스타샤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토요일에 있었던 대화는 그 방에서 모두 끝난 주제로 여기서 꺼낼 이야기가 아니란 의미였다.

물론 아나스타샤는 여자들끼리 한 대화를 이런 곳에서 이어 나갈 사람이 아니었지만, 일단은 내가 처음 말문을 열고 싶었다.

“주말은 잘 보내셨나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나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어투였다. 마음에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가방에서 무언가 꺼내다 말고 날 보더니 대답했다.

“응.”

“특별한 일이라도?”

“글쎄, 딱히. 너희처럼 같이 있을 일도 없고…… 그냥 혼자서 곡 쓰고 연습했지.”

“아.”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써 내고 그것을 로마 대상의 심사위원인 브누아 랑베르에게 보여 아주 좋은 평가까지 받아 냈지만, 그렇게 큰 일을 해내고도 에르네스트는 주말에 쉴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심사평을 받고 할 일이 많았던 걸까.

자신의 성과를 자축하며 조금은 편했으면 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물론 에르네스트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가 물었다.

“넌? 타티아나. 주말에 아나스타샤와 있었던 거지?”

“예, 계속.”

“둘이서 내 곡을 얼마나 뜯어보았을지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

그가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 염려했던 건 비단 랑베르의 심사평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엄청난 음악가의 평가만큼이나 우리가 할 연구도 에르네스트에게 있어선 일종의 부담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선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조금은 고마웠다. 그만큼 우리를 진지하게 생각해 주고 있단 것이니까.

음악가 사이의 신뢰와도 비슷한 그 단단한 결속을 이렇게 종종 느낄 때면, 난 가끔 목이 멜 정도로 기뻤다.

그래도 울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 대신 웃었다. 그 역시 기뻐하도록.

“후후, 괜찮아요. 곡 자체에서 문제를 발견하진 못했으니.”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줘 볼래.”

“……예? 무엇을요?”

“질문 목록 말야.”

“??”

가볍게 안부나 묻고 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연습실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하려고 생각했던 난 갑자기 그가 질문 목록 이야기를 꺼내자 굉장히 당황했다.

그건 아나스타샤와 단둘이 있었을 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난 그 후로 에르네스트에게 전화를 한 적도 없으니 그가 알 방법이라곤 하나뿐이었다.

“이미 들었나요?”

“아나스타샤가 그러던데. 즉석에서 전화로 물어보려다가 내 주말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따로 정리했다고.”

옆을 보니 아나스타샤가 그렇지 않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가볍게 이야기한 것 같다.

물론 맞는 이야기다.

우리가 이틀간 열심히 만들어서 이제 에르네스트에게 보여 줄 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아침에 만나자마자 이야기할 만도 했다.

하지만 아침에 혼자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난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그냥 분위기를 타서 줘도 되나?

이미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얼떨결에 끌려가는 것 같은 모양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 흐름을 벗어나서 갑자기 내 멋대로 싫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이상하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에르네스트의 시선은 내 앞 책상으로 향했다.

펼쳐져 있는 노트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멀리서도 이미 알아본 것 같은 눈치였다.

나도 모르게 급히 말했다.

“그, 아직 다 되지 않아서요.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래?”

“예.”

내 말에 에르네스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의 아나스타샤는 조금 의아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도 대화에 끼어들어서 이 노트를 왜 내가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하진 않았다.

잠깐 대화가 툭 끊어진 사이,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며 각자 월요일의 시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오후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이 노트가 곧 내 과도한 경계심과 직결된 증명과도 같은 것이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고, 점점 더 에르네스트에게 보여 주기 힘들었다.

그에게 보여 주는 순간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르네스트 입장에선 내가 주말 내내 아나스타샤와 연구한 것들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오전 교과들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에르네스트는 다시 내게 물었다.

“오후 레슨 있어?”

“없어요.”

“그럼 연습할 거지? 연구 목록 가지고 와서.”

“음…… 그래야죠?”

“……?”

같은 음악을 하는 연주자와 항상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 생각하며 난 시간대만 맞으면 늘 함께 연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에 대해선 날 오래 봐 온 에르네스트도 이미 잘 파악하고 있을 텐데, 내가 갑자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는 약간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난 일단 이 상황을 해결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우선 식사하러 갈게요. 조금 이따가 이야기해요.”

“……알았어.”

어색하게 자리를 뜨면서도 난 내가 그를 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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