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7화
오후에 다시 연습실 앞에서 에르네스트와 만났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저번 주 있었던 단어 마피아 게임이 떠올랐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장난에 걸리고도 똑같이 장난으로 받는 대신 정면으로 상대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태연한 표정이었지.
어쩐지 나만 바보가 된 것 같단 기분에 얄밉단 생각이 들다가도, 실제로 내가 바보가 맞으니 이 상황이 된 게 아닌가 싶어서 맥이 빠지기도 했다.
들쑥날쑥한 기분으로 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타티아나?”
“…….”
하지만 이럴 때도 그를 무작정 피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건 점점 더 나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인데다가, 그와 함께 해야 할 공동의 작품은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연주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진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결 차분해진 난 무대에 선 기분으로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잠시 생각에 잠겨서.”
“무슨 생각?”
“연습이요. 오늘은 듀엣 연습만 할까요?”
에르네스트는 작곡가로선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을 더 다듬어 완성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연주자로선 나와 함께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야 하기도 했다.
애초에 시간이 부족한 우리는 하나씩 집중해서 결과를 만들어 낸 후에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연습하기도 했고, 에르네스트가 써 준 곡을 정말 제대로 짚고 가려면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도 자리에 있어야 했으므로 당장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는 오늘 오후에 퀸텟 리허설이 있어서 우리랑 연습할 시간도 없다.
그런 이유가 있는데다가 내가 주말간 정리한 내용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치챈 에르네스트는 그럼 오늘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웜업부터 하죠.”
연습실에 들어서서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난 슥슥 손목을 풀고는 건반을 연주했다.
어떤 사념도 없이 화성의 아름다움만 그려 내는 피아노 소리는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다시금 자각시켜 준다.
그렇게 내가 손을 풀고 나니 다음은 에르네스트의 차례였다.
그 역시 가볍게 각 조성별 스케일로 건반을 몇 번 오르내리는 것으로 손 풀기를 마쳤다.
빠른 속도와 정확성은 살아 있는 교과서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깔끔했다.
손 풀기를 마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난 마음의 시선을 음악 쪽으로 집중시키려고 노력하며 약간의 오기를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냐는 듯 괜히 소매를 들어 보기도 하고 넥타이를 만져 보기도 하더니, 고개를 갸웃하고는 웃었다.
“…….”
나 정말 뭐 하는 걸까.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난 무표정하게 피아노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옆에서도 에르네스트가 피아노로 집중력을 쏟아 넣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또렷한 그 집중력은 잠시 후 분명한 음악으로 변화했다.
우리가 늘 연습하던 헝가리 광시곡 2번이다.
그동안 여러 번의 완성을 거치면서 이젠 정말 리허설이 아니라 곧장 무대에 올려도 될 정도로 숙련된 곡이었지만, 우리는 어떠한 곡의 완성이 곧 끝을 의미한다 여기지 않고 계속해서 더 파고든다.
저번 연습 때도 말을 그리 많이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 부분을 연습해 온 우리는 이번 주 처음으로 헝가리 광시곡을 연습하는데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연주할 수 있었다.
난 이전보다 훨씬 더 아카데믹하게 접근해서 에르네스트의 흐름을 쫓아갔다.
기분을 따르면 음악까지도 변덕스러움에 흔들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절대 그래선 안 될 일이고, 에르네스트라면 내 실수를 순식간에 알아차릴 것이다.
다행히 난 감정을 정갈하게 다잡고 음악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여럿 안다.
그간 몇 번이나 버릇처럼 해 오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면서 터득한 방법들이었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보다 엄격하게 건반을 대했다.
에르네스트 역시 내가 건반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힘을 싣자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바짝 신경을 쏟는 듯했다.
한 번의 멈춤이나 재시작 없이 그대로 실전과도 같은 10여분 정도의 연습을 마치고, 에르네스트가 내게 물었다.
“어땠어? 타티아나.”
이만한 연주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연주였다.
우리 연주를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헝가리 광시곡 2번 같은 난곡을 이런 수준까지 끌어올려서 연주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건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이런 훌륭한 연주를 마치고 나면 절로 마음이 들뜬다.
조금 농담을 할 만한 기분이었다면 같이 듀엣 피아노 연주자로 데뷔하지 않겠냐고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멋대로란 생각이 들어서 담백하게 답했다.
“좋았어요.”
“나도. 네가 이전에 의견 줬던 부분들을 신경 쓰니까, 그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알겠더라고.”
“보다 깊이 있고 다정한 음악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저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곡처럼 들리지만, 헝가리 광시곡 2번은 그보다 훨씬 깊은 애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곡이다.
에르네스트 역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특정한 감수성을 넘어선 관념의 디테일한 간극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간극은 이렇게 음악을 교류하면서 좁혀 나갈 수 있었고, 난 오늘 또 그와 한 걸음, 이 곡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를 다시 바라보더니, 곧 내게 말했다.
“나…… 아니, 내 피아노 소리를 싫어하게 된 것 같진 않아서 다행이네.”
주말에 연구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지 않아서 조금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 모르더라도 이렇게 피아노 소리를 들어 보면 파트너를 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난 차분하게 피아노 소리를 컨트롤하려 했지만, 새어 나가는 것들이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그를 싫어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르네스트는 약간의 안도를 느끼는 것 같았다. 난 비로소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에르네스트.”
“……?”
“주말에 아나스타샤와 연구했던 건…… 나중에 그녀가 있을 때 제대로 셋이서 보도록 해요. 그게 낫지 않겠어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난 오늘 그와 서로 살짝 맞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훨씬 더 차분하게 이야기하니 에르네스트도 타당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게 낫겠지. 셋이서 해야 하는 곡이니까.”
일단은 연주자로서 서로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조금은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난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것 없이 일단 견고한 연결고리가 있음에 차분해질 수 있었고, 에르네스트는 당장 자신의 음악이 평가되고 피드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조금 덜었기 때문인지 당장 피아노에 엎드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난 오늘 일정을 돌이켜보며 그에게 물었다.
“레슨은 언제인가요?”
“30분 정도 남았네.”
“그럼 연습은 여기까지 할까요? 잠깐 주무신다면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안 잘 거야.”
에르네스트는 그렇게 말하며 날 바라보았다. 은근히 고집스러운 어투다.
자겠다고 하면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싫다면 나도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그때까지 한 번 더 어떠신가요?”
이미 충분히 긴장도 풀렸고 그를 대하는 데에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와 대화를 길게 나누기보단 피아노를 교류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제안하자 에르네스트도 바로 다시 피아노 쪽으로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그럴까. 라싼은 스킵하고 프리스카부터?”
“전 초반을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데요.”
“그럼 그렇게 해도 좋고.”
그렇게 한 번 더 연습하기로 했던 우리는 말없이 연달아 계속 연습을 이어 나가다가 에르네스트의 레슨 시간을 넘고 나서야 그만둘 수 있었다.
시간 약속에 엄격한 구세프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선했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내일 돌아오지 않으면 성난 구세프 선생님에게 죽은 걸로 알아두라며 농담을 하며 일어섰다.
“그런 상황이 되면 대신 혼나 드릴게요. 절 불러 주세요.”
말만으로도 고맙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경쾌하게 웃었지만 난 진심이었다.
***
레슨 없이 귀가한 난 오후 내내 개인 연습실에서 홀로 연습했다.
에르네스트도 레슨 이후 자기 음악에 집중하고 싶을 테고, 아나스타샤는 퀸텟 리허설로 바쁠 테니 오늘은 각자 스스로를 갈고 닦는 날이었다.
무념무상으로 연습실에 틀어박혀 얼마 있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2시간 넘게 흐르고 해가 다 져 있었다.
바람이 추워질수록 해가 드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갔다.
슬슬 가을이 깊어 간다는 기분이 듦과 동시에 우리 연주회 날짜도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가을이 정점에 달했을 때 무대에 설 준비를 우리는 꾸준히 하고 있었다.
문제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아마 이번에도 성공적인 연주회가 가능하겠지.
난 이제 그런 낙관을 가질 수 있었다. 피아노에서 손을 놓고 연습실 구석에 엎드려 있는 벨카를 쓰다듬어주면서 잠깐 쉬고는 본관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 전에 잠깐 공부나 하고 있을까 했는데,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루슬란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오빠는 내가 연습하던 걸 듣고 있었는지 수고했다는 듯 가벼운 미소를 건넸다. 난 고개를 까딱이며 미소를 받고는 물었다.
“쉬고 계시나요?”
“응. 일이 없네.”
“후후, 차라도 끓여 드릴까요?”
“아까 마셔서 괜찮아.”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난 간만에 저녁 전까지 오빠와 텔레비전이나 볼까 싶어서 소파 옆에 앉았다.
지금 시간대는 딱히 재미있는 예능 방송을 할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퇴근한 사람들을 위한 데일리 뉴스가 거의 대부분 채널에서 나오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길 포기한 오빠는 그냥 뉴스나 보기로 했는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
우리 남매는 한동안 말없이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서로 치열한 하루를 마치고 나서 느긋하게 보내는 시간이었다.
멍하니 뉴스를 지켜보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알기 위해 아침에 뉴스를 종종 챙겨 보는 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한나절 사이 생긴 일들도 꽤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서 뉴스는 연예계 가십을 다루는 순서로 넘어갔다.
한 유명 팝 가수의 결혼 소식이 발표되었는데, 그 화면을 보자마자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어.”
한 사람의 이름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
올리거 리보비치 코롤레프. 젊은 팝 가수들 중에선 정말 노래를 잘하는 편이라 금방 유명세를 탄 사람이었다.
클래식 음악밖에 모르는 내가 팝 가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흥미가 없는데도 너무나 잘 알 것 같은 기분.
기록하지 않은 무언가가 노트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굉장히 당황스러워할 테지.
하지만 난 가끔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간 몇 번이나 겪기도 했고 이제 내겐 평범한 일이었다.
멍하니 있던 내가 갑자기 관심을 보이자 루슬란 오빠도 텔레비전을 유심히 보더니 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았다는 듯 말했다.
“기억……하겠네 당연히. 네가 좋아하는 가수니까.”
“그렇죠.”
기억이 돌아온 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내가 여전히 변함없이 대해서 그런지 루슬란 오빠는 내가 예전 일들을 기억한다는 것에 대해 아직도 가끔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난 빙그레 웃으며 장난치듯 말했다.
“음, 그런데 제 기억이 왜곡된 건가요? 아니면 저분이 바뀐 건가요? 기억 속엔 저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푸하하하, 저 사람도 나이를 먹었잖아. 그러니 결혼발표도 하고.”
“그렇겠네요…….”
좋아하던 가수의 결혼 발표 소식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오빠는 약간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지만, 난 그리 특별한 생각이 들진 않았다.
검은 새라면 조금 더 애석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 심정을 이해하고 예전 노래들을 떠올리면서도 차분하게 있을 수 있었다.
하나 꼽자면 나이를 먹으면서 수염을 기르고 갑자기 이미지를 바꾼 게 아쉬울 따름이다. 예전엔 더 잘생겼던 것 같은데.
간만에 떠올린 기억과 그 간극 등을 느끼며 앉아 있는데, 이어서 올리거의 신곡이 발표되었다.
결혼하면서 내놓은 신곡이라 그런지 노래는 좋았는데 가사가 대단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내용의 가사를 저렇게 열창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기본적으로 난 클래식 음악만을 편식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팝 음악을 아예 듣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각 음악 장르마다의 가치는 분명히 존재할 테니까.
그런데 듣던 루슬란 오빠가 결국 한마디 했다.
“신곡 가사가…… 시적이네.”
“직설적이라 이해하기 쉬워서 좋네요.”
우리 둘 다 느낀 감상은 그 정도였다.
그런데 오빠는 내 말이 조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딱히 시비를 거는 건 아니지만 다시 생각해 보란 투로 오빠가 말했다.
“죽어줄 수도 있다는 가사 자체야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직설적으로 이해하면 안 될걸.”
“관용어구로 보시는 건가요?”
“보통 그렇지 않나?”
“보통은 그렇겠죠.”
일반적으론 당연한 말이다. 루슬란 오빠가 옳다.
하지만 난 올리거의 신곡 가사를 예카테리나에게 말했던 적도 있었다.
그것을 난 어둡고 비정상적인 감정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진심이라 하더라도 결코 평범하게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니까.
하지만 신곡을 부르고 있는 올리거는 열정에 가득 차 세상 사람 모두에게 전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떤 기분인 걸까. 난 그것이 조금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