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0화
지금 가장 만나선 안 될 사람이 연습실 앞에 서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문손잡이를 잡고 한동안 굳어 있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문을 닫고 생각할까 싶었지만, 안 그래도 놀란 것 같은 타티아나를 두고 그냥 문을 닫아 버릴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태연한 척 상황을 확인하기로 한 에르네스트가 삐딱하게 문에 기대어 섰다.
타티아나는 뭔가 연습실 안을 살짝 보려다가 그만두고는 에르네스트에게 물었다.
“제가 혹시 방해가 되었나요?”
“무, 무슨 방해?”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발소리라도 들렸나 해서요.”
중앙음악학교의 연습실들은 모두 같은 게 아니라서 가끔 방음 설비가 노후된 연습실은 복도에서 학생들이 걷는 소리가 울려서 들어오기도 한다.
타티아나는 혹시나 그래서 에르네스트가 연주를 그만두고 나왔나 걱정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전혀. 네가 있는 줄 몰랐어. 그래서 놀랐잖아.”
가까스로 일단 상황을 수습하면서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의 표정을 살폈다.
자주 웃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땐 조금 서늘한 분위기의 타티아나는 지금도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읽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연습실 방음이 어느 정도지? 복도에 들리긴 했겠지만 설마 무슨 곡인지까지 들었나?
아니, 들었다 하더라도 에르네스트가 임의로 편곡했기 때문에 아마 완전 다른 곡이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르네스트는 여러 가정들을 세우면서 각 상황에 따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미리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티아나에게서 기다리던 질문이 떨어졌다.
“연습 중이었나요?”
“어? 무슨 연습?”
“방금 치시던 곡 있잖아요.”
왜 관심을 보이지?
가장 대답하기 까다로운 상황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에르네스트는 마지막까지 시치미를 뗐다.
“연습은 아니고 그냥.”
“아…… 그렇군요. 조금 놀랐어요. 에르네스트가 가요를 편곡 연주하셔서.”
“…….”
다 망했다.
생각하던 대답들은 모두 날아가 버렸고 에르네스트는 머리가 텅 빈 기분을 느꼈다.
요즈음 계속 복잡하기만 했는데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어서 차라리 신선했다.
음악가로서의 심지가 곧은 타티아나였지만 지금은 의아함을 느끼며 에르네스트의 오늘 한나절을 되짚어 추론하는 듯 보였다.
아침만 해도 올리거 어쩌구가 누군지도 몰랐었는데 갑자기 신곡을 왜 연주했냐고, 혹시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에 연습 중이었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에르네스트에게 남은 방법은 그렇다고 답하곤 집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나스타샤 때문인가? 하지만 다른 사람을 탓할 것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연습실에 온 그 자신의 실책이 제일 컸다.
변명을 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니 이전까지 생각했었던 모든 계획과 템포 등이 박살 나는지라 반쯤 넋을 놓은 채로 서 있자 타티아나가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시나요?”
“뭘?”
“혹시 나름대로 클래시컬하게 편곡했는데 제가 바로 알아맞혀서 놀라셨나요?”
에르네스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로 음악가로서의 심지가 곧은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타티아나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에르네스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덥썩 붙잡았다.
“아, 그렇지. 맞아. 꽤 변화를 많이 줬는데 신기하네.”
“후후, 기본에 충실한 기법은 어디 가지 않던걸요.”
“그랬었나.”
이 와중에도 그는 타티아나가 자신의 연주를 제대로 들어 준 것 같아서 은근히 기뻤다.
어떤 식으로 편곡해서 곡의 형태를 살리고 피아노의 틀에 맞추어 냈는지, 방음벽을 넘어 잘 들리지 않았을 텐데도 그녀는 분명하게 모든 것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기쁜 건 기쁜 것이고 상황을 넘겨야 하는 건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냥 쳐 본 거야. 여기저기에서 말이 많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꽤 빅뉴스였던 만큼 후속 기사들이 계속 나오는지 오전 내내 반에선 올리거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때문에 에르네스트가 흥미를 가지고 곡을 찾아봤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그 광경을 타티아나 역시 지켜봤을 테니 지금 적당히 이야기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곡이 잘 나오긴 한 것 같지?”
그런데 바로 맞장구칠 거라 생각했던 타티아나는 묘하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다. 뭔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조금 머뭇거리던 타티아나는 이윽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글쎄요? 전 이번 곡은 솔직히 별로라고 생각해요.”
“……??”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침에만 해도 다른 아이들과 그 주제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나스타샤도 확인해 주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올리거의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람 맞냐고 묻자 타티아나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가 이 유명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모든 이유들 때문에 에르네스트는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결국 이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갑자기 타티아나는 그 전부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잠깐만…… 아침에…….”
“그건 올리거 리보비치에 대한 이야기였죠.”
타티아나는 정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정정했다.
신곡이 좋다고 한 적은 없었다. 에르네스트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런데 혼자서 생각에 파묻히다 보니 타티아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건 음악 쪽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이제 그것도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
“사실 그것도 몇 년이나 지난 예전 일이에요. 올리버 리보비치도 이젠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결혼하기도 했고.”
약간 생소함을 느끼며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본데 있는 것과 별개로 성격이 까다롭지도 않고 호불호도 뚜렷하지 않은 편인 타티아나는 의외로 대범한 모습을 종종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무엇이든 어지간하면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확실하게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거의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
심지어 거리를 잔뜩 두면서 부칭까지 붙여 길게 칭하고 있었다.
항상 경어를 쓰는 그녀라 하더라도 좋아하는 가수를 이렇게 말하진 않는다. 정말 싫어진 모양이다.
속으로 조금 놀라면서 에르네스트는 그냥 넘기려다가, 그래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가 결혼해서냐고 묻지 않은 건 에르네스트에게 마지막 이성이 남아 있었던 덕분이었다.
“왜? 노래가 별로라서?”
“아뇨, 턱수염을 길러서요.”
“?”
진짜 이유인지 아니면 일종의 핑계인지 분간이 안 가서 에르네스트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설명을 더 해 주길 바랐지만, 타티아나는 그 이상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정말 그 이유로 싫은 건가.
그녀의 취향을 하나 더 알았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타티아나가 너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전 그 사람 이제 별로인데, 에르네스트는 마음에 드셨나 봐요?”
“내가 왜?”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연습실에 오셨잖아요? 곧장 식당으로 가셨나 했는데 안 계셔서 와 본 건데요.”
그러면서 그녀는 양옆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점심 식사나 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그녀는 에르네스트가 식사도 않고 사라진 게 못내 신경 쓰여서 찾아다닌 것 같았다.
타티아나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듣고 보면 대단한 일이었다.
거의 초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능력을 생각하며 짐작해 보면, 점심시간이 막 되어서 교내의 모든 악기 소리가 멎은 한순간의 타이밍에 연습실 너머로 새어 나오는 피아노의 진동을 찾아낸 것 같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이 넓은 교내에서 에르네스트가 있는 장소를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정확하게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괜히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기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에르네스트는 지금 입을 열면 그 모든 심정이 섞인 이상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가까스로 목 아래에서 단어들을 정리했다.
일단 지금은 타티아나가 그전에 물었던 질문, 그러니까 올리거 어쩌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해 답하는 것이 먼저였다.
거기에 대해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즉각 대답했다.
“엉망이던데?”
“……그래요?”
“어떻게 곡을 이렇게 썼나 싶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해 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포기했어.”
“그 곡 작곡가가 아마 대중음악계에선 가장 유명하신…….”
“그게 누군지 내가 알아야 해?”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타티아나가 관심을 보이니까 궁금해졌을 뿐, 이제 그녀가 싫어한다면 에르네스트가 딱히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말을 너무 오만하게 막 한 것 같긴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엄격한 타티아나도 핀잔을 주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아하핫, 아하하하.”
그 직감은 적중했다.
평소 같았으면 가급적 존중해 달라고 말했을 타티아나겠지만, 지금은 갑자기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언가 서로 마음이 맞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웃어 주기까지 할 줄은 몰랐던 터라 약간 놀랐지만, 그래도 최악은 피했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게 웃으며 타티아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도와 부탁이 섞인 눈빛이 그를 옭아맨다. 에르네스트가 살짝 굳어 있는 사이 타티아나가 재차 물었다.
“곡은 고쳐 써 보려 해도 쓸 수가 없었고…… 가사는 어떤가요?”
“그건 어떻게 살릴 생각조차 안 해 봤는데.”
“후후, 그럼 됐어요.”
그제야 타티아나는 입을 가리며 고개를 내렸다.
그녀에게서 시선이 거두어지자 에르네스트는 비로소 숨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고압적이지 않고 일방적이지도 않다. 타티아나는 그런 태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와 마주할 때면 가끔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그를 속박하는 감정의 격류를 느꼈다.
따뜻한 웃음 속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것들이 에르네스트를 하여금 쉽게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
타티아나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복도의 중심에서 옆으로 돌았다.
그저 먼 복도를 보려는 것 같았지만, 타티아나의 옆모습을 보는 에르네스트는 그녀에게 지금 말을 걸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내일 일간지에 내 이름 실리는 거 아니지? 유명 작곡가 비판했다고.”
“그럴 리가요. 저희끼리 이야기인데.”
가벼운 농담이 희미해져 가던 그녀와의 흐름을 다시 붙잡았다.
타티아나는 다시 에르네스트 쪽을 바라보고 섰다. 곧은 자세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아깐 자연스레 복도를 따라 걸어갈 것 같던 그녀는 지금은 누가 밀어도 꼼짝도 않을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같이 식당으로 내려가자고 나설 때까지 그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자 어떻게 할 거냐며 타티아나는 싱긋 웃었다.
에르네스트는 그제야 문가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잠깐만 기다려 줘.”
“예.”
뒤로 돈 에르네스트는 연습실의 불만 끄고 문을 닫으려다가, 안으로 들어가선 열려 있던 피아노의 건반 덮개를 닫았다.
다시 돌아 나오니 타티아나의 어깨가 슬쩍 흔들렸다.
그제야 방향이라는 것이 생긴 사람처럼 그녀는 스르륵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