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1화
에르네스트는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밖에 잠깐 줄을 서면서 안을 들여다보니 이미 많은 학생들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에서 혼자 있는 아나스타샤도 발견했다.
발렌티나는 어딜 간 걸까? 그녀는 종종 급식이 싫다면서 나가서 먹는 일도 많았으니까 여기 없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면 아나스타샤도 데려가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만약 그런 제안이 있었더라도 아나스타샤가 거절했을 것 같다.
그녀는 착하고 배려가 깊은데도 그 배려가 약간 극단적으로 향해서 겉도는 상황이 종종 있었으니까.
그런데 혼자 있어도 어쩜 저렇게 그림이 되는지 모르겠다.
옆에 카메라만 있으면 광고를 찍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 주변에 학생들이 가서 앉지 않는 건 이 감상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게 아니란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에 언젠가 이야기하길 아나스타샤는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녀도 사람이니 외로움을 탄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데…….
“에르네스트.”
“응.”
“저쪽으로 갈까요 우리.”
“그러려고 했어.”
여기 아나스타샤와 친한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하다.
에르네스트는 내가 부연적으로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두 사람은 자주 티격태격하곤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들인 것이다.
간단하게 식사를 받아서 아나스타샤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자연스레 난 그녀 옆에 앉았고 에르네스트가 맞은편으로 갔다.
막 빵을 찢어 입에 넣던 아나스타샤가 방긋 웃었다.
“조금 늦었죠.”
“…….”
그녀는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내가 올 걸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맞은편의 에르네스트와 함께 짧게 기도하고 식기를 들었다.
수프로 살짝 입을 축이고 나니 빵조각을 넘긴 아나스타샤가 내게 물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생각보다요?”
“수업 끝나자마자 둘 다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거든. 연습실에 가 있지 않으려나 했는데…… 맞니?”
사실 우리가 갈 만한 동선을 예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그 추측이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가 거기에 조금 더 살을 붙여 물었다.
“듀엣 연습 했던 거야?”
“그랬어요.”
“뭔가 좋은 게 있었나 보네.”
급하게 연습하러 가서 상황이 안 좋았다면 연습이 길어졌을 테니까, 금방 갔다 온 걸 보면 빠르게 확인만 하고 온 게 아니냐는 것 같았다.
난 사실은 이러저러하다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다.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자 그는 식기를 든 채 가만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사전에 아무 말도 없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해 준 것이 그를 지키기 위함이란 걸 이해하는 것 같았다.
조금 지나서 그는 다시 식기를 움직이더니, 어색하지 않을 만큼만 시간이 흐른 후에 우리 사이로 말을 던져넣었다.
“오늘 오후에 합동 연습 할 거야. 아나스타샤.”
“어…… 오늘?”
“스케줄 있어?”
“글쎄…… 오늘은 나도 내 연습이나 할까 했는데.”
오늘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나스타샤는 살짝 빼려고 했지만, 우리에겐 그렇게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에르네스트는 특히 더더욱 그랬다.
“너희가 주말에 연구했던 거 빨리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늘은 나한테 협조해 줘.”
“타티아나가 노트 가지고 있는데.”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노트로 해결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가 슬쩍 이유를 자기 쪽으로 돌리며 설명했다.
“노트는 옵션이고, 확인은 연습실에서 직접 해야지. 피아노 없이 하면 오해할 일이 많아.”
아무리 잘 정리된 악보와 노트가 있더라도 한 번 듣는 것이 빠르다.
아나스타샤 역시 그 부분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이니 에르네스트의 요청을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알았어.”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늘은 셋이서 공동 연습을 하면서 곡을 조금씩 더 보완하게 되었다.
내일은 연주회 미팅이 있는 날이니까 오늘 만약 결과물이 좋으면 내일 제대로 시연해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누아 랑베르의 호평을 받은 곡이 어떤 곡일지 모두들 궁금해하는 부분이 많았다.
시간이 2주일도 안 남은 시점이니 이젠 정말 보여 줄 때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연주회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사소한 잡담을 나누기도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그중에서도 빠르게 일어난 건 아나스타샤였다.
“먼저 일어날게. 나 잠깐 챙겨야 할 게 있어서.”
같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곧 각자 연습 때문에 떨어져야 하니 먼저 할 일이 있다면 빨리 움직이는 것도 상관없긴 했지만, 난 약간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다.
에르네스트와는 같이 식당을 나와선 복도에서 헤어졌다.
“나도 바로 레슨받으러 갈게.”
“아, 그런가요? 그러면 나중에 봬요.”
“응.”
그는 가볍게 대답하더니 살짝 뒤돌며 덧붙였다.
“이따 봐.”
먼저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난 잠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오후에 레슨도, 정해진 연습도 없다.
보통은 개인 연습만 하는 날이기에 바로 연습실로 가곤 했지만, 난 지금 잠깐 바깥바람이 쐬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오자 가을바람이 휙 불어온다.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잠깐만 있다가 머리가 식으면 들어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시원한 것이 기분 좋았다.
“…….”
자판기에서 주스도 하나 뽑은 난 근처 벤치에 앉았다. 늘 하듯 요령 있게 동전으로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다.
식사 내내 내색하지 않고 잘 행동한 거지?
그리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이에도 내 머릿속은 아까 에르네스트를 마주했던 기억으로 잔뜩 어지럽혀져 있었다.
“아…….”
에르네스트를 따라갔던 건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에르네스트가 반을 빠져나가는 걸 나도 모르게 봐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냥 식사하러 가는구나 할 수도 있었지만, 난 이상할 정도로 급하게 움직이는 그를 보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살그머니 뒤를 밟았다.
그리고 곧장 연습실로 들어서는 그를 보고는 마지막으로 갈등했다.
난 식사도 거르고 연습실에 가서 만족할 만큼 피아노를 연습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종종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것처럼 건반을 찾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충동은 피아노에 반쯤 미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이곳에서도 꽤 유별난 축에 속했고, 당연히 그런 충동에 휩싸였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창피할 테니까.
그런 걸 잘 알면서도 그가 연습하는 것을 엿들어도 되는 걸까.
양심은 굳이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을 몰래 듣는 건 나쁜 짓이라고 날 설득한다.
하지만 연주자로서의 호기심과 친구로서의 관심은 내 발을 서서히 연습실 쪽으로 이끌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도 아니고. 나만 알면 되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자기합리화하면서 난 연습실 앞에 섰었다.
“……”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후회했다.
듣지 말걸.
그 연주는 얼마 전 단어 마피아 게임에서 에르네스트가 입으로 했던 말을 피아노로 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올리거 리보비치가 누군지도 모르고 왜 알아야 하느냐고 반문하던 그가 갑자기 올리거의 곡을 연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언급이 많아 음악가로서 들어 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 바로 흥미를 잃었어야 했다.
이 곡은 그에게 그리 어울리는 곡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연주하고 있었다. 조금 더 클래시컬하게 자신의 뉘앙스를 담아서.
왜 갑자기 그 곡을 연주하고 싶어졌는지, 그 이유는 아무리 단순하게 음악 그 자체만 듣는 나라도 알 수 있었다.
‘이미 한 번 넘어갔는데…….’
에르네스트는 모르겠지만 난 이미 그가 단어 마피아 게임을 구실삼아 한 일을 알고 있다.
아나스타샤에게 분명히 전해 들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사실 난 답을 정하거나 아니면 어제 마주했을 때 조금이나마 표현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난 모든 것을 없던 일인 것처럼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관념이 너무 흐릿하여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에르네스트가 굳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는 앞으로 있을 연주회와 콩쿠르 등을 두고 우리 관계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을 터다. 그 부분은 분명히 이해한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확고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걸 그도 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친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선 너무나 확고하다.
정말 난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를 위해서 대신 죽어 줄 수도 있었다.
올리거의 신곡에서 나온 가사를 루슬란 오빠는 그저 관용어구 같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내게 있어선 진실될 수 있는 말이었다.
다시 쌓아올린 내 음악은 아깝지만, 그래도 이젠 예전과 같이 어둡고 진득한 미련은 없다.
편집증도 많이 옅어져 있었다. 허락받은 만큼 할 수 있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괜찮았다.
하나 아쉽다면 세연과 박 교수님에 대한 일 정도인데, 그건 내가 정도 이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오래된 죄인은 이렇게 잊히는 게 옳다.
난 정말로 친구들이 앞으로도 연주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 기회를 여기에서 멈추더라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2년 전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내 운명에 대한 생각에서 뻗어 나온 것이었다.
피아노를 할 운명이 아니었던 인간 타티아나로서 이곳에 있는 이유가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라면 그건 꽤 괜찮은 이유였다.
그렇게나 사랑하기에, 난 친구들에게 경어를 사용한다.
“…….”
러시아어에서의 경어가 얼마나 큰 거리감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난 그 사이를 좁히려 하지 않았다.
그 거리감을 친구들도 느끼고 있으리라.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친구들이 내게서 최소한의 벽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삶이 너무 좋아서, 사람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누리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언젠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면, 혹여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운명을 거스르게 될까 봐.
난 꼭 좋은 영향만을 끼치고 싶었다.
아마 친구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많이 다르겠지.
‘많이…… 많이.’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이 날 구성하고 있었고, 난 평범한 사람들 같은 생각과 바람을 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평범함이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그리고 평범함을 추구하는 쪽이 검은 새를 위한 일이 될 것이란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학습으로 이루어진 평범함은 기계적인 기만이고 거짓에 가깝다는 걸 난 자각하고 있다.
진실된 난 분명 이상한 사람이다. 늘 무심코 느끼는 어떠한 종교적, 철학적 강박증이 항상 평범함에 앞선다.
그것은 실재하는 기적에 기반하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것을 강박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것이 굉장히 슬프고 미안하지만, 아마 치료 같은 것이 가능한 상황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지금 난 다른 사람들이 더 슬퍼하진 않도록 생활하고 있었다.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날 칭찬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죄책감이 너무 많이 들었다.
“…….”
에르네스트가 연주하는 곡은 대중가요임에도 그의 목소리가 담긴 하나의 노래로 들려온다.
너무나 맑고 투명한 그 소리는 방음벽도 뚫고 내게 와 닿았다.
지금까지처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연습실 문에 귀를 기울였고,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서 있을 힘도 없어져서 난 그 앞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정말 널 어떻게 대해야 할까.’
유예의 끝이 가까워져 온다는 건 느껴진다. 난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난 스스로에 대해 더더욱 잘 알게 되었고, 평범한 일일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련했다. 애초에 내가 유예한 일들이 모두 평범한 것들 뿐이라는 걸 일찍 깨달았다면 그게 쉬워서 미뤄둔 것이 아니란 것쯤은 알았을 텐데.
단순히 좋니 싫니로 따져서 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간단했겠지.
이건 내가 그간 믿고 따라왔던 것들을 어떻게 여길지에 대한 문제였다.
모든 것들을 그저 강박이라 생각하며 지금부턴 기계적인 평범함이라도 따르려 한다면 이기적일지언정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이미 난 세상의 수많은 기준들을 초탈하여 자유로웠고, 뜻대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게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닐 것이란 직감이 섬뜩하게 찾아온다.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해서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감각은 아니었지만, 그 근간은, 너무 아끼기에 멋대로 할 수 없다는 아주 기본적인 이유에서 시작되고 있다.
난 그게 내 솔직함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에르네스트의 모든 표현을 모르쇠로 대하는 게 맞는진 잘 모르겠다.
“…….”
복잡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니 머리가 뜨겁다. 아까 들었던 피아노 소리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돈다.
혼자서 가만히 그 맴도는 선율을 보고 있자니, 목덜미 근처가 간질거려서 모르쇠도 벅차다.
난 작은 한숨을 내쉬며 주스 캔을 입에 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