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92화 (792/1,277)

##  792화

가만 앉아 있으니 생각이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벤치에서 살짝 일어난 나는 그 근방을 서성였다.

서 있으니까 바람이 조금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바람처럼 조금은 쿨하고 시원시원한 내 머리 한편에선 이런 생각도 든다.

그냥 에르네스트가 보이는 표현들을 모두 이해했으나, 우리는 친구로 있는 것이 좋겠다고 솔직하게 말해 버리는 것도 방법 중 하나였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사이가 아주 멀어져 버리진 않을 것 같다.

적당히 친구 사이로 지내는 남녀관계는 꽤 흔했고 이상적이란 생각마저 든다.

“…….”

그러나 그냥 친구로 지내자고 말하면 모든 게 간단히 정리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먹을 수가 없었다.

조금 멀어졌나 싶었는데 금방 다시 가까운 곳에서 맴도는 피아노 소리가 날 붙잡는다.

그 실력만이 대단했던 게 아니다. 그 곡을 연주하는 이유, 그리고 그 속에서 들려왔던 표현력이 날 숨막히게 했다.

이런 걸 듣고도 모른 척하면 나쁜 짓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로 쉽게 알은척하고 관계를 정리하려 드는 것도 안 될 일이란 생각 또한 들었다.

난 멍하니 서서 주스 캔을 들어 보았다. 언제 다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한 바퀴 돌아서 어디 저 머나먼 곳에 다녀오더니 이젠 점점 더 막 나가기 시작했다.

정 그렇다면 아나스타샤가 말했던 것처럼 가볍게 사귀어 보고 헤어져서 친구로 남는 건 어떨까? 그러면 미련이 안 남을까.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하던 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었다.

난 어떠한 관계를 장난처럼 끝낼 생각으로 시작하는 건 정말 무례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에르네스트를 대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이 많다 보니 정말 별생각을 다 한다.

‘어차피 그 애도 지금은…….’

일단 지금 혼자서 이러고 있어 봐야 정신만 없으니, 확실한 점들만 짚어 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에르네스트는 간접적으로 내게 표현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대답을 원하고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

그건 그가 어리숙하고 소극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야망적이고 자존심도 세며 자신의 일에 확신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지금 당장 나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고 싶었다면 머뭇거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까 보았던 그는 본래 정열적인 세레나데인 노래를 편곡해 연주하고 나서도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때라 생각한다면 바로 내게 그 뜻을 알려 주더라도 별 이상할 것 없는 타이밍일 텐데, 에르네스트는 무언가 신중하게 준비하는 사람처럼 내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바랐기에 난 따라 주었다.

‘이유가 따로 있을까.’

내가 예상할 수 있는 이유는 연주회와 콩쿠르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건 그 자신의 집중이기도 했고 날 흔들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는 아마 내가 평범한 사람들 이상으로 음악에 미쳐 있다고 보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화가 나네.

갑자기 왜 불쑥 심통이 나는진 모르겠지만 장난을 칠 생각이 들진 않았다.

내가 다루는 음악의 크기를 그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가 음악가로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너무나 기쁘고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었다.

“…….”

건반악기 연주자로서의 재능뿐만이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역량까지 그는 정말 과거 존재했었던 여러 대가들처럼 음악가로서 다방면에 걸쳐 실력을 쌓아나가고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진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내 바람은 그저 그가 예전부터 그러했듯 앞으로도 늘 오롯이 빛나는 것뿐이다.

그 어떤 일에도 변함없이 자신의 일을 멋지게 해나갔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문제가 될까 걱정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그래서 난 연습실 앞에서, 그에게 확실하게 올리거의 신곡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못 박고 그가 그런 음악에 집중하지 않도록 했다.

대중가요라서가 아니라 그 가사에서 느껴지는 헌신적인 뉘앙스가 에르네스트의 음악에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좋은 방향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건 아니야.’

심지어 그는 내가 그 곡을 정말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아마 아나스타샤가 한 말 때문이겠지만, 그건 큰 오해였다.

난 이 곡의 가사에 흥미가 조금 있었을 뿐이지 그 이상 고평가하진 않았다.

심지어 그 가사도 서정적으로 좋아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쓴 것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이제 올리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에르네스트는 묘하게 내 취향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서 난 확실하게 별로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 두니까 안심하는 모습이 조금 귀엽긴 했다.

“…….”

무의식중에라도 장난 같은 건 하지 않도록 하자.

에르네스트가 혹시나 오해할 만한 부분에 대해서만 풀어 주고, 나머진 그의 템포에 맞춰 주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바람이 슬슬 차다. 이제 들어갈까 싶어서 식당에서 나오는 문 쪽을 바라보니, 마침 그곳에서 나오던 한 학생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전교생 얼굴을 거의 다 아는 난 편입온 지 한 달도 안 된 그녀의 얼굴과 이름도 알고 있었다.

샬롯 린스키. 뉴질랜드에서 온 유학생이다.

“타티아나 선배님.”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그녀가 다가온다. 나 역시 그녀와 만나자 기분이 좋아졌다.

“반가워요 샬롯. 식사는 맛있었나요?”

“예! 저 여기 와서 제일 좋은 게 밥인 것 같아요.”

“음악 교육이 아니고요?”

“제일 좋은 게 여러 개면 안 되나요?”

엉뚱한 대화가 오가도 좋았다.

학기 첫날 그녀와 만난 이후로 우린 그 후에도 몇 번 교내에서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대화들의 대부분은 친구 사이에 나누는 주제보단 내가 그녀의 학교생활과 적응 등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마다 샬롯은 늘 기쁘게 웃는 얼굴로 좋은 이야기만 했다.

친구들이 착하다고 하고, 선생님들이 훌륭하다고 하고, 연습실이 마음에 든다고 하고 어떤 날은 벽에 있는 얼룩이 좋다고 했다.

먼 나라에서 혼자 왔음에도 긍정적으로 잘 적응하려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서 난 그녀를 조금은 신경 써서 보는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앗, 지금 절 불쌍하게 보시는 건가요!?”

그런데 식당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보며 말하려 하자 샬롯은 빠르게 내 말을 낚아챘다.

그리고 친구가 없어서 혼자 있는 게 아니라며 주장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까 밥은 친구들이랑 같이 먹었으니깐요. 그다음에 저 혼자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예요.”

“그런가요?”

“설마 안 믿으시는 건 아니죠?”

“아뇨, 믿어요.”

사실 그녀의 친구 관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지금 혼자 나와 있는 건 내가 먼저였으니까.

다행히 샬롯은 그 부분에 대해 묻지는 않고 약간 솔직한 어투로 오늘의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애들이 다들 가수 이야기만 해서…… 오늘은 뭔가 어울리기 힘들더라고요.”

“아, 올리거 리보비치?”

“네. 그런 이름이었어요.”

“샬롯은 모르나요? 유명한 분인데.”

“저…… 러시아의 클래식 음악가라면 백 명도 댈 수 있지만 대중음악은 잘 몰라서요.”

“아…….”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자신이 파고드는 특정 장르가 아니라 하더라도 유명 아티스트들을 몇 명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면 모를 만도 하다.

에르네스트처럼 알 만한 사람이 모르기도 하는데, 샬롯 정도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직 문화적으로 잘 모르는 부분들이 있을 수 있죠.”

“가끔 이래요.”

그래도 이곳에서 유명한 가수를 자신만 모르는 것 같이 느껴지는지 샬롯은 조금 멋쩍게 웃었다.

비단 클래식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문화들도 익혀 가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난 그녀에게 도움이 될 만한 팝 음악 아티스트라도 몇 명 소개해 주고 싶었지만, 문제는 나도 클래식 외의 문화엔 그리 조예가 깊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14년을 살았어도 접한 게 한정적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문화적 식견에 대해 논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빨리 다른 주제로 옮겨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이, 샬롯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아, 맞다. 선배님 연주회 하신다면서요? 소식 들었어요!”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의 홍보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얼마 전 촬영감독 데니스 프로듀서가 포스터 촬영도 해 갔고,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는 티켓 판매와 광고에 대한 본격적인 실무적 이야기를 저번 주 즈음부터 하기 시작했었다.

꽤 빠른 스케줄이긴 했지만 본래 계절 특집 연주회는 이렇게 하는 일도 잦았다.

가을 연주회를 한여름에 예매 시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그렇게 시작된 연주회 홍보는 생각보다 꽤 성공적인 것 같았다. 나도 잘 몰랐던 티켓팅 상황을 샬롯이 대신 말해 주었다.

“티켓을 구하려 했는데 온라인 수량은 다 매진이었어요. 꼭 현장에 가서 티켓팅 성공할게요!”

“음, 보러 와 주실 거라면 한 장 드릴까요?”

“예? 정말요?”

난 연주회 관계자로서 받은 티켓이 몇 장 있었다. 샬롯에게 줄 여유 정도는 된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진심으로 기뻐했다.

“와, 정말 기뻐요. 가격이…….”

“티켓값은 생각하지 마세요.”

돈 받고 팔 것이었다면 애초에 여유분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난 절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투로 가볍게 이야기했다.

“우선 지금은 가지고 있는 티켓이 없지만, 내일이라도 전해 드릴게요.”

“감사해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샬롯은 무슨 소리냐는 듯 황망해했지만 난 정말로 그녀에게 고마웠다.

이름 있는 연주자들이 하는 것도 아닌 선배들이 하는 가을 연주회는 그냥 안 봐도 그만이었다.

꼭 이렇게 와 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난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은근히 연주회 티켓에 대한 걱정이 있다가 그 걱정이 사라져서 좋은지 샬롯이 한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연주하는 분들도 모두 같은 학년 친구분들이죠? 사실 전 지금도 신기해요. 그때 뵈었던 아나스타샤 선배님하고…… 예전부터 알았던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가 이젠 학교 선배와 친구로서 연주회에 나가는 사람이라니.”

유독 에르네스트의 이름을 말할 때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걸 느끼고는 살짝 물어보았다.

“뉴질랜드에서도 알고 있었나요?”

“물론이죠. 피아노 치는 사람 중에 에르네스트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요?”

“후후, 그래요?”

“아, 물론 최근엔 타티아나 선배님이 더 핫하지만요!”

샬롯은 갑자기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신경 쓰였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이 학교에 오기 전부터 나도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바로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였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 즐겁기도 하고, 선망하는 눈빛을 받으니 부끄럽기도 했다. 난 너무 그렇게 보진 말란 뜻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에요. 지금 잠깐 그럴진 몰라도 곧 에르네스트가 더 대단한 모습을 보여 줄 거예요. 앞으로는.”

“어…… 진짜인가?”

“?”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따라서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더니 샬롯이 그제야 자신이 한 행동을 깨달았는지 깜짝 놀라며 양손을 휘저었다.

“아, 죄송해요. 혼잣말이었어요.”

“왜 그러시나요? 궁금한 점이라도?”

아직 편입 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아이니까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지 풀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내가 정말 어지간해선 뭐든 해 줄 생각이 있다는 걸 아는 샬롯은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내게 물어왔다.

“그게…… 에르네스트 선배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한참이나 말을 돌리기도 했고, 아직 샬롯의 러시아어 문법이 완벽하지 않아서인지 잘 이해가 안 간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샬롯.”

“러시아어로 어렵게 말하려니 너무 어렵네요.”

당연히 어렵게 말하려니까 어렵죠.

하지만 샬롯에겐 쉽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그다음에도 바로 말하지 못하고 내 기분을 살핀 후에야 이윽고 그녀는 다시 조금 더 분명하게 말했다.

“반 친구들이 그러는데…… 아, 그러니까 특정한 누구가 아니라 그 분위기 같은 게…….”

“예, 분위기가요?”

“두 분이 사귀고 있다는 의견이 많아서요.”

한 달이면 이제 학교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다 파악할 시기라는 걸 나만 모른 걸까.

“혹시 알고 계셨나요?”

샬롯은 이런 질문이 실례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조금 주저하지만, 한편으론 직접 내게서 사실을 듣고 싶은 것 같았다.

난 교내에서 은근히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미 오래된 일이다.

2년 전 학기 초에 있었던 일도 있고, 그간 그와 함께 해 온 일도 많았으니까.

다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서 에르네스트의 평판이나 내 생활 등에 악영향을 주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 누군가 묻지도 않는데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거나 사실을 밝히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생각하여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샬롯은 내게 직접적으로 묻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학교 후배와 하는 건 처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