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93화 (793/1,277)

##  793화

샬롯은 뒤늦게 내게 이런 질문을 한 게 후회되는지 그냥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직접 듣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헉,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런데 샬롯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

내가 대답은 않고 역으로 질문할 줄은 몰랐는지 샬롯이 뜨끔해했다.

학교의 분위기 등으로 둘러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떠보려 한 점이 들켰다는 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미안함 다음은 고민이다. 샬롯은 대답을 잘 해야겠다고 여겼는지 내 눈을 피하면서 잠시 생각했다.

조용히 기다려 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타티아나 선배님은 일단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아닌가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난 샬롯의 주변 친구들이 나와 에르네스트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가 많았다면 그런 이야기에 휩쓸리고 따라가는 것도 당연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부분은 그런 관계성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까.

난 조금 놀라며 그녀의 답을 확인시켜 주었다.

“맞아요. 아직 우린 친구 이상으로 이렇다 할 사이가 아니니까.”

“역시 그랬군요.”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그게…….”

난 그게 정말 궁금했는데 샬롯이 내놓은 근거는 특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있잖아요? 그때 바이올린과 학생분과 이야기하시는 자리에 있었는데…… 협연 요청을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어요. 타티아나 선배님은 음악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구나 하고…….”

“겨우 그것만으로요?”

“겨우 그것뿐이지만 꽤나 분명하게 느껴져서요.”

그건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다.

합주 과제가 있는 연주자들은 파트너를 교내에서 찾는 일이 많고 난 그런 것에 따로 벽을 치지 않는 편이다.

때문에 그때도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그 후에 연주회 일정이 생겨서 이젠 진짜 제안을 해도 함께 하기 어렵겠지만.

그런데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샬롯은 내가 만약 소문처럼 에르네스트와 사귀는 관계였다면 내가 그렇게 행동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관찰력이 좋네.

이렇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어디서도 크게 손해를 보지 않는다. 연주자로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떠한 현상이나 감정 등을 모사하고 연기해야 하는 연주자들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관찰력이란 음악성을 이루는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였다.

난 샬롯이 앞으로도 꽤 유능한 음악가로서 성장하지 않을까 가늠해 보았다. 한 번쯤은 정말로 연주를 들어 보고 싶다.

그런데 그녀는 눈이 좋아서 실수를 안 하는 대신 입으로 실수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아, 관심이 없다는 게 무뚝뚝하시단 말은 아니에요! 학교 안내도 해 주시고…… 전 타티아나 선배님처럼 친절한 분은 못 봤으니까요. 정말이에요. 그, 그러니까…… 제 말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게 아니라 남자들에게 그렇단…… 아니, 그렇다고 여자들을 좋아하신다는 건 아니고…… 으아, 정말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하게만 나오네요.”

“아하하, 무슨 말인진 알겠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샬롯은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두서없이 이야기한 걸 내가 정말 이해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눈을 깜빡였다.

난 열네 살의 샬롯이 생각한 부분에 대해 반론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음악가라는 점을 가장 상위에 두곤 한다.

그 밑의, 보다 구체적인 관계에 붙은 이름들은 사실 잘 모르겠단 생각이 크다.

옅은 미소와 함께 난 그녀의 말을 다시 긍정했다.

“제가 그런 관심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어…… 남들 다 좋아하는 이야기 같은 건 시시하다고 생각하신다거나……?”

“시시하진 않죠. 그 또한 평범한 이야기고, 그런 이야기들은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혼자 멍하니 상념에 잠겨서 떠올리던 생각들 중엔 샬롯과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씩 정리되는 것들도 있었다.

난 음악을 우선시하는 건 맞지만 삐딱하게 뒤틀려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음을 느끼기에, 호들갑스럽게 굴지 않고 신중하게 지켜보는 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잘 모르겠다는 듯 샬롯이 바라보았고, 난 지금은 이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절 제대로 봐 주신 것 같아 기쁘네요.”

서로 음악으로 교류해 본 것도 아니고 그냥 이야기만 몇 번 나눴을 뿐인데도 이만큼 알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난 샬롯에 대해 사실 그렇게 잘 알지 못하는데…… 늘 학교에 대한 이야기만 하지 말고 조금씩은 사사로운 이야기도 더 해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시간도 즐겁다는 듯 웃고 있자 샬롯은 아까 전과는 달리 조금 여유를 찾은 모습으로 말했다.

“타티아나 선배님은 뭔가…… 다른 사람들이랑은 다른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니까요.”

“그게 아니라…….”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도 러시아어로 하려니까 어려운지 샬롯은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그녀가 쉽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추리를 내놓았다.

“혹시…….”

“예?”

“집이 엄해서?”

이 아이가 보기엔 내가 당연히 그렇게 보이려나?

난 한참을 웃었다. 딱히 연애금지령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으니 전적으로 내 자유다.

하지만 이미 내 경호원들에 의해 전 학생에 대한 조사가 끝나 있을 테고, 만약 소문이 소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성을 띄게 되면 아마 가장 먼저 루슬란 오빠가 나설지도 모르겠다.

봄 이후로 내게 간섭을 덜 하려고 하긴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조심해야 할 것 같긴 하다.

“그것도 맞는 말이에요.”

“역시…….”

역시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은 건 샬롯이 그래도 날 친밀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그녀를 친근하게 안아 주며 웃었다.

날씨가 선선해서 그런가, 잠깐 나와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그사이 사람의 온기가 크게 느껴진다.

더 오래 있다가 감기라도 걸린다면 정말 웃을 수도 없는 일이 된다. 난 먼저 샬롯에게 말했다.

“슬슬 몸이 차네요. 전 이만 들어갈까 해요.”

“아, 저도요.”

내가 들어간다면 딱히 혼자 나와 있을 이유는 없는지 샬롯도 곧장 날 따라왔다.

학교 안으로 향하면서 난 문득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오늘 이야기 다른 친구분들께도 이야기하실 건가요?”

“아뇨?”

그녀가 나와 에르네스트에 대해 신경 쓰고 있던 소문에 대한 진실을 알았으니까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어본 것이었는데, 샬롯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었다. 난 나대로 그녀가 이대로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잘 생각했어요. 샬롯이 그 소문에 반대하면 아마 친구분들은 재미없다고 생각할 거예요. 사람들은 재미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길 좋아하거든요.”

내 말에 샬롯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너무 시니컬했나.

하지만 난 유학생인 샬롯이 괜히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길 원치 않았다.

샬롯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소문의 당사자인 선배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어요. 재미있다고 생각해도 되나요?”

“어쩔 수 없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가십을 원천차단하고 에르네스트와의 관계성을 딱 매듭지어놓는 건 정말 큰 결정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샬롯은 경이롭다는 눈빛을 하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이해 가지 않는 듯했다.

“그런 면도 정말 달라요.”

“무슨 말이죠?”

“다른 사람 같았으면 사실이 아닌 소문을 은근히 즐기거나 아니면 넌덜머리를 내는게…… 아니에요, 아무튼 이렇게 이야기만 해도 여러 가지 배우는 느낌이에요.”

뭔진 모르겠지만 그게 사람 관계에 대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언젠가 연습실에서 만나길 바라면서 난 샬롯에게 이야기했다.

“저한테 음악 외엔 배우지 마세요.”

“……예?”

“전 제가 많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사샤에게도 했었던 이야기다.

음악을 찾아 매몰되어 있던 그때도 난 인간으로서 굉장히 결여된 부분이 많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모든 것을 위임받고 보다 폭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지만 인간적으로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말을 샬롯은 칭찬처럼 사용했지만 내겐 조금 아프게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평범하지 않고 틀렸다고 해도 난 받아들이고 감내하려 한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선택들을 후회하기엔 시간이 아까우니까.

어리둥절해하는 샬롯을 보며 난 평범한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다.

“앞으로도 잘 지내실 거라 믿어요. 다음에도 또 보면 인사해요.”

샬롯은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엔 약속했던 대로 에르네스트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함께 큰 연습실로 향했다.

우리가 피아노 세 대를 위한 리허설을 할 때면 곧장 찾는 곳이었다.

언제나처럼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연주자로서 임할 준비를 마쳤다.

아직 암보하지 못한 악보를 챙겨 들고, 주말 동안 연구했던 부분들을 체크한다.

이 리허설은 에르네스트에게 제시하는 의견서이기도 하니 되도록 완벽하게 잘 해야 한다.

실수를 한다면 그 실수조차 에르네스트가 우리의 의견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

천천히 준비를 하던 도중 옆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 역시 의자에 앉아선 자신의 악보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리를 꼬고 턱을 받친 그 옆모습은 무슨 조각상 같았다.

음악을 확인하러 온 자리에서 무례하게도 난 그와 나누었던 대화와 샬롯과의 짧은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트도 지금 우리가 어떤 균형 위에 올라서 있는지 잘 안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그 균형을 자기가 유리한 대로 이용하거나 써먹으려 한 적 없이 늘 균형을 지키는 데에 협조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러는 걸까. 그간 늘 뇌리 저편으로 미뤄두기만 했던 생각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아, 아니에요.”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르네스트가 물어보았다. 난 다시 시선을 악보 쪽으로 던졌다.

지금 드는 생각들은 일종의 방해가 되는 잡념들이었다.

그러나 에르네스트가 밤잠을 설쳐 가면서 이 대곡을 준비한 의도 중엔 그 잡념 중 일부가 힌트로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 곡을 봤을 땐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연주회에 세 명이 동시에 초빙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곡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뜻 외에도 굉장히 깊은 의도가 잠재되어 있음이 연구하면 할수록 드러났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해 볼까.”

우리 세 명은 동시에 일어나 피아노 앞에 앉았고, 서로의 선율을 엮어가며 하나의 음악을 이루어 나갔다.

표제음악이 아니라 주제가 확실하진 않았지만, 이 음악에 주제는 내게 바치는 곡도 아니었고 에르네스트가 돋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곡도 아니었다.

당연히 아나스타샤를 위한 곡 또한 아니다.

우린 서로에게 무조건적으로 바라는 것이 없었다.

강조에 대응하고, 협조하면서도 반목하며 대립했다가도 조화를 이룬다.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서 만들어 나가는 이 거대한 흐름은 그가 그리는 어떠한 그림과도 닮아 있었다.

난 그 그림의 일부를 구성하면서 맡은 색들을 채워 넣었다. 그 위로 다른 색이 곧바로 덧칠되기도 하고, 그렇게 다채로운 음색들이 드러났다.

잠시 내 파트가 쉬는 사이 난 지금까지 그려온 전체적인 그림들을 바라보며 잠시 감상에 잠겼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을 찾아냈다.

‘아나스타샤……?’

에르네스트가 이 곡을 작곡한 이유가 우리 세 명의 활동에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균형도 아주 적절하게 나누어져서 전혀 치우침이 없었다.

하지만 잠깐 물러서서 듣는 사이 나는 그간 몰랐던 것을 깨달았다. 에르네스트는 아나스타샤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평범하게 생각할 법한 연애감정이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되레 위험인물 취급에 가깝다. 그러나 점잖게, 공정하게 에르네스트는 그녀를 대했다.

아나스타샤가 새빨간 불길처럼 타오르면서 연습실 전체를 불태우려 하면 그는 곧바로 그 불길의 방향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연주자가 이루는 곡에서 곧잘 보이는 대결 양상이었지만 내가 두 사람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난 그 엄청난 연주에 반쯤 넋을 놓았다. 하마터면 내 건반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곤 제때 합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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