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4화
러시아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 총괄을 맡은 콘서트 디렉터 알렉산드라는 늘 회의를 하는 연습실에서 노트북을 보며 그간 조사해 온 자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맞은편에선 스푸마토 콰르텟의 인원들이 혹시 있을 연습을 대비하는지 현악기를 점검하고 활대로 소리를 내기도 해서 부스럭거리기도 하고 신경이 쓰였지만, 알렉산드라는 노트북의 화면에만 집중했다.
‘예상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야.’
노트북에 보이는 여러 숫자들은 그녀와 그 위 문화부 관계자들의 예상을 한참이나 상회하는 수치를 보이고 있었다.
홍보에 대한 반응은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물론이고 별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도 흥미를 이끌어낼 정도였고 음악계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들이나 기자들도 이 연주회가 굉장히 흥행할 것이란 것을 눈치채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연락을 해 오곤 했다.
역시 에르네스트라는 이름이 가지는 위상은 굉장했다.
겨우 열여섯 살의 소년 연주자일 뿐이지만 이미 10년 가까이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 온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피아니스트였다.
보통 어린 연주자들을 향하는 기대는 시간이 갈수록 식어 가는 경향이 있는데, 에르네스트의 경우엔 어찌 된 것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 가기만 했다.
그만큼 그가 보여 주는 실력이 무시무시하단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신예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의 성장도 굉장히 빨랐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처음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그 엄청난 배경이나 뛰어난 외모 등이었다.
타티아나는 셀러브리티로서 여느 언론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조명에 이끌려서 타티아나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은 다음으로 그녀의 본격적인 실력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연주회에 직접 갔다 온 사람들의 리뷰는 그야말로 찬양과 같은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까다로운 클래식 애호가들의 귀를 어느 한 명 빠짐없이 만족시키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직접 그녀의 연주를 들어 본 알렉산드라는 이런 리뷰들조차 타티아나의 가치를 절반도 채 못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타티아나는 피아노를 다루어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 그 자체를 이끌어 공간을 휩쓰는 강렬한 피아니스트였다.
스피커로 들었을 때도 어마어마한 실력자였지만, 현장에서 들었을 때의 느낌은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피아노의 정령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최근 러시아에서 뚜렷한 두각을 드러내는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두 사람은 저번 차이코프스키 우승자인 예카테리나와 더불어 굉장히 많이 언급되는 피아니스트에 속했다.
게다가 더더욱 호사가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장면이 상당히 자주 보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중앙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연말에 듀엣 연주를 한 적이 있었고 그 외에도 자주 함께했다.
두 천재 피아니스트의 향방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정말 많았고, 때문에 1부에 두 사람의 듀엣이 들어가는 이 연주회 역시 굉장히 주목받을 수 있었다.
물론 콰르텟과 아나스타샤 역시 그녀가 만나 본 사람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연주자들이었지만, 알렉산드라는 콘서트 디렉터로서 비지니스적으로 접근하자면 두 사람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콰르텟은 자신들의 악기를 정비하고 알렉산드라는 노트북을 보면서 서로의 회의를 준비하고 있을 때, 기다리던 세 사람이 함께 연습실에 도착했다.
알렉산드라는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놓으며 인사했다.
“어서 와요. 타티아나, 에르네스트. 아나스타샤.”
“안녕하세요.”
타티아나가 살갑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교복 차림의 세 사람은 학교에서 온종일 수업을 듣고 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말끔했다.
그 모습을 본 스푸마토 콰르텟의 연주자들 역시 들고 있던 악기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모두들 좋아 보이네.”
“누구누구처럼 감기 걸린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콰르텟 멤버들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세 명뿐이었다.
빠진 사람을 알아차린 타티아나가 게오르기에게 물었다.
“카일이 보이지 않네요. 감기에 걸리신 건가요?”
“날씨가 추워졌는데도 반팔 티셔츠 입고 다녔으니까. 자업자득이지. 자기가 아직도 20대인 줄 안다니까?”
“엄청나게 억울해하던데. 아직 영하권도 아닌데 감기에 걸리는 게 말이나 되냐면서.”
남은 세 사람은 킬킬거리면서 카일을 놀렸지만, 사실 연주자가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못 한 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내일 당장 연주회 당일이었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대형 사고인 것이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한참 있었으니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타티아나는 중얼거렸다.
“괜찮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 심하진 않으니 걱정 말아요. 타티아나. 다음 미팅 때까진 무조건 나을 테니까.”
게오르기는 농담조로 말하면서 타티아나를 안심시켰다.
뒤편에서 약간 걱정되는 눈빛을 하고 있던 아나스타샤도 게오르기가 눈짓하자 미소를 보였다.
그간 미팅 땐 한 명도 빠지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한 명이 빠져서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알렉산드라는 일단 앞장서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그러면 회의를 진행하도록 하죠. 카일의 경우엔 안 되었지만 큰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일단 이 분위기는 좋은 소식으로 풀어 볼까요?”
세 명의 피아니스트와 세 명의 현악기 연주자가 모두 알렉산드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노트북을 빙글 돌려 모두에게 보여 주면서 경쾌하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연주회 온라인 예약이 모두 매진되었습니다.”
“오, 벌써?”
“얼마 전에 오픈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먼저 알아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연주회 준비에만 다들 열중했는지 막상 티켓에 대해선 다들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었다.
기뻐하는 세 명의 콰르텟 멤버들을 보다가, 알렉산드라는 다른 세 명 쪽도 보았다.
얼마나 놀라고 좋아할지 약간 기대되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에르네스트는 노련한 연주자처럼 나름 흡족하지만 책임감을 느끼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아나스타샤도 비슷했다.
타티아나만이 그나마 순수한 미소로 싱긋 웃으며 알렉산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이 애들은 도통 평범한 반응을 보일 때가 없네.
그것도 비범함의 일종이겠지만, 가끔은 어린애처럼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어른들이 제일 좋아하고 있으니 상황이 조금 우습다.
어쨌든 알렉산드라는 오늘을 축하할 준비도 다 해 온 상태였다.
“모두가 축하를 나누어야 하죠. 타티아나.”
“그렇네요. 후후.”
“그래서 이걸 준비했습니다.”
“?”
모두가 의문을 표하는 사이 알렉산드라는 테이블 옆 종이백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유리병을 꺼냈다.
그 형상을 알아본 게오르기가 물었다.
“샴페인입니까?”
“갑니다.”
“자, 잠깐만!! 그걸 여기에서 터트…….”
게오르기가 호들갑을 떨며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알렉산드라가 이런 자리에서 샴페인을 잔뜩 흔들어서 터뜨릴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코르크를 쥐고 비틀면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샴페인을 열었다.
게오르기가 조금 창피한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터트리시는 줄…….”
“그런 것 좋아하신다면 다음엔 해 드리죠. 게오르기.”
“아닙니다.”
그가 정색하자 좌중에 웃음이 번졌다.
테이블에 샴페인이 등장하자 그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들뜬다.
사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딸 예정이었는데, 알렉산드라는 미리 조금쯤은 괜찮다고 생각하며 모두에게 제안했다.
“아무튼 성인들은 한 잔씩 드리죠. 우리 학생 연주자분들은 포도주스로 괜찮을까요?”
“예, 좋아요.”
잠시 후 모두의 앞에 놓인 잔들이 세팅되어 샴페인과 포도주스가 채워졌고, 여섯 명의 연주자들은 각자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티켓 완매를 축하하며!”
크게 외치며 잔을 부딪히고 목을 축인다. 알렉산드라도 샴페인을 한 모금 넘겼다. 달콤한 맛이었다.
그 후론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갔다. 대부분 연주회의 흥행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다 나간 건 아니야. 온라인만 매진이니까.”
“나도 알거든?”
솔렌과 다리아가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알렉산드라는 샴페인을 한 모금 더 머금은 후 테이블 위를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이건 정말 훨씬 더 성대하게 축하해도 될 정도로 좋은 일이었다.
“원래 이런 종류의 연주회는 잘 나가는 편이지만…… 이번엔 특히 괄목할 만한 속도로 예약이 되더군요. 홍보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연주자 분들의 티켓 파워도 한몫했겠죠.”
그런데 게오르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우린 티켓 파워랄 게 없는데요.”
“저기 세 명 덕분이겠지.”
“그도 그런가?”
알렉산드라는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두가 알았다.
에르네스트라는 피아니스트 한 명만 이 자리에 있었어도 아마 완매엔 별 문제가 없었으리란 것을.
그리고 그다음으로 영향을 크게 준 건 타티아나였다.
근대에서부터 클래식계의 인기는 솔리스트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짙었다.
이번엔 솔로 프로그램이 없는데도 이 정도였다. 그러나 음악가 집단은 그리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만큼 좋은 무대에 설 수 있어서 기쁘다는 표정들이었다.
“아무튼…… 열심히 준비한 만큼 많은 분들께 좋은 무대를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 기쁘군요.”
게오르기가 진지하게 말했고, 그 말을 받아 에르네스트도 보답하듯 이야기했다.
“저희가 준비한 곡도 이제 무대에서 선보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어요.”
“준비한 곡이라면…… 에르네스트의 곡 말입니까?”
“우리 세 명의 곡이죠.”
에르네스트는 짧게 정정해 주고는 잔을 기울이며 덧붙였다.
“어제 자체적으로 리허설 해 봤는데…… 디테일만 약간 보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거의 완성 단계입니다.”
“그 결과물을 오늘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럴 생각입니다.”
“무척 기대되는군요.”
두 사람은 한때 프로그램을 놓고 경쟁하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상당히 친해진 모습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웃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노트북 화면을 힐긋 바라보았다.
거기엔 연주회 티켓의 현황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이터들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중 하나에 대해 알렉산드라는 지금 말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서곡으로 나올 곡도 되었고…… 1부의 듀엣곡들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죠?”
“완성에 완성을 거듭해나가고 있죠.”
“그래서 말인데.”
이번 이야기는 에르네스트뿐만이 아니라 타티아나의 의견도 필요하다.
알렉산드라의 목소리가 향하자 아나스타샤와 이야기하고 있던 타티아나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약간 진지하게, 알렉산드라가 이야기했다.
“이전에 연주회 이후 청중 서비스로 어떤 것들을 제공할지 아이디어들을 낸 적 있었죠?”
리셉션이나 사인회 혹은 선물 등, 무대가 끝나고 나서도 청중들을 위한 서비스는 연주회마다 다양하다.
그중엔 비용을 감수하고 청중들에게 제공하는 무료 서비스도 있고, 혹은 원하는 상품 등을 판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상품 판매 쪽을 생각 중이었다.
“그때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음반을 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야기에 집중하던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다른 연주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알렉산드라로선 지금이 최적이었다.
타티아나는 약간 당혹스럽다는 듯 물었다.
“음반이요? 어떻게……?”
“제가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조금 해 봤는데……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의 듀엣 연주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더군요.”
조사 표본이 그리 많진 않지만 결과는 거의 압도적으로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이 정도로 열렬한 반응을 그냥 무시하고 넘기는 건 공연 기획자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여기 모여 있는 프로 중 한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라는 두 사람에게 제안했다.
“연주회의 모든 프로그램을 음반으로 만들기엔 일이 너무 커지니까 두 분만 레코딩해서 몇백 장 정도만 사인 음반으로 낼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그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고 시간을 필요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