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95화 (795/1,277)

##  795화

일단 제안을 던진 알렉산드라는 기획 당사자인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만 보지 않고 다른 관계자들의 분위기도 모두 살폈다.

행정과 실무 등을 담당하는 인원들과 촬영 중인 데니스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지만, 내용을 듣고도 모두들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바로 진행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저마다 작게 속삭이는 것이 보인다.

기한이 촉박하긴 하지만 연주회와 동시에 준비한다면 늦지 않는다.

알렉산드라는 이미 그런 계산을 모두 마쳤기 때문에 난처하다는 의견이 나오진 않을 거라 예상했다.

“…….”

다음으로는 무대에 직접 오르는 사람들이다.

같은 무대에 오르는데도 두 사람만 집어서 기념 음반을 만들겠다는 기획이니 듣기에 따라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그것을 잘 케어하고 설득하는 게 알렉산드라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이미 예상했던 대로 게오르기는 짧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노련한 음악가인 그는 이런 연주회에서 왜 두 피아니스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려고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건 콘서트 디렉터인 알렉산드라만의 의지가 아니라 보다 위쪽에 있는 인물들의 의지 또한 담겨 있었다.

게오르기는 충분히 납득했다는 눈빛으로 웃으며 의자 뒤로 몸을 기울였다. 결정난 것에 대해선 따라 주겠다는 표시였다.

다른 현악기 연주자들도 특별한 이견이나 불만은 없어 보인다. 알렉산드라는 그 모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보냈다.

남은 건 세 사람.

알렉산드라는 피아니스트들을 돌아보았다.

‘저 두 사람이 걱정인데…….’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난관은 아나스타샤와 타티아나였다.

갑작스러운 제의더라도 에르네스트라면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했지만, 저 둘에 대해선 알렉산드라도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눈을 마주한 아나스타샤는 조금 놀랐던 감정을 금세 지워 버리곤 옅게 웃었다.

이런 상황도 예상했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비즈니스적인 이해와는 달랐다.

어떠한 일에 대한 자기 의견이나 호불호는 제쳐 놓고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납득하는 표정이다.

알렉산드라는 뭔가 아나스타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수백 가지쯤 떠올랐지만 단 하나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사이 아나스타샤가 먼저 말했다.

“그거 괜찮네요.”

가볍게 웃는 그녀는 일견 유쾌해 보인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다시 제대로 설득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나스타샤. 제가 이런 기획을 이야기한 건…….”

“아, 전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해요. 알렉산드라.”

괜히 불안해하면서 말하지 말라는 듯 아나스타샤는 설득을 다 듣지도 않고 깔끔하게 이야기하더니 옆을 돌아보았다.

잠시 친구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알렉산드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렉산드라는 이 아이가 약간 어려웠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어른스러워서 대하기 좋지만, 터놓고 편하게 이야기하기엔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콘서트 디렉터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아나스타샤 또한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한다.

왜 자신은 빠졌냐고 직접적으로 묻고 설득당하는 대신 아나스타샤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유들을 추려내었다.

“음반에 사인까지 해서 판매하면 불티나게 팔리겠어요. 그런데 일곱 명의 사인이 있으면 그건 너무 과하죠. 에르네스트의 신곡을 연주회의 메인으로 내세우는 게 아니니 세 명도 이상하고. 2부에 나설 두 명이 적당해요.”

“……그렇게 생각합니까?”

“예.”

아나스타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회에 쏟을 역량을 필요 이상으로 음반에 집중시키면 음반에도 무게가 실리고 부담스러움이 생긴다.

기념은 말 그대로 기념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기념 음반의 성공엔 적당히 가벼운 무게감이 중요했다.

그 점을 정확히 짚어낸 그녀는 생각할수록 잘 될 것 같다는 듯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좋아하겠죠? 몇백 장이 아니라 몇천 장도 될 것 같은데.”

“제가 지금까지 여러 연주회를 해오면서 알게 된 예상 판매량이 있어서.”

“그것도 그런가요? 음, 제 생각엔 다 살 것 같은데.”

정말 아무 불만 같은 건 없는 건가?

겉으론 승낙하더라도 속으로 불만이 있으면 안 되기에 알렉산드라는 아나스타샤를 유심히 살폈지만, 친구들의 음반 기획을 축하하고 정말 잘 되길 기원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거짓된 마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쓸데없는 긴장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알렉산드라도 힘을 조금 풀었다.

‘자, 그러면…….’

우선 당사자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게선 동의를 얻어냈다.

이 동의 자체가 은근한 종용이 될 테니 알렉산드라로선 든든한 지원을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 타티아나의 대답을 듣고 설득하면 된다. 알렉산드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을 알아차린 타티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 표정엔 고민이 가득했다.

알렉산드라는 그녀가 이 기획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고 싶었다.

타티아나는 유연하고 협조적이며 최선을 다하는 좋은 연주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연주자 경력도 그리 길지 않건만, 불과 얼마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예술감독 직을 맡아서 훌륭하게 수행했을 정도로 그녀에겐 카리스마적인 음악가의 면모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기획은 기념 음반으로 단지 음악을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듀엣으로 무대에 오른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를 기념하는 의미가 굉장히 컸다.

기념 음반에 대한 예상 조사를 한 것도 연주회의 주최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을 한 무대에 초빙한 것부터 클래식 음악계의 주목도를 끌어 올리기 위한 비즈니스적인 이유가 대부분이었으니 진지할 건 아니었지만, 타티아나가 이 기획을 탐탁잖게 여겨도 전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심지어 타티아나 본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배경인 베르체노프도 생각해야 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면 자유롭게 해 주는 것 같지만, 필요 이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개입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경호원들을 몇 명이나 이끌고 다니는 아가씨다. 무슨 말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렉산드라가 이 기획을 꺼내 놓은 데엔 타티아나가 생각보다 쉽게 일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르네스트와 듀엣 연주를 할 때의 그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그 모습은 단순히 같은 무대에 불려와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함께 해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타티아나는 두 사람이 어떻게 비치는지 충분히 알고도 승낙할 수도 있다.

알렉산드라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목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고민하던 타티아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긍정적인 목소리였다.

“전 그것도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수익적으로도 인지도를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렉산드라가 살짝 미끼를 흘렸다. 호사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었다.

아무튼 좋은 대답이 나왔다.

정말 쉽게 진행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알렉산드라가 이어 말하려는 찰나, 타티아나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동의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희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음반에 대해선 준비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무대에 올리는 곡을 녹음하시면…….”

“그건 그가 반대할 테죠.”

“예?”

무슨 소린가 싶어 되물은 알렉산드라는 곧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 해도 납득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알렉산드라가 예상하기로 이 기획에 있어서 제일 난관은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 두 사람뿐이었다.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하겠다고 한다면 반드시 따라와야 했다.

그동안 지켜보면서 알렉산드라는 그 부분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애초에 세상 누가 거절할까 싶었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았을 때, 알렉산드라는 당혹감을 느꼈다.

“전 이번 무대 완성에 완벽을 기하면서, 그보다 못한 음악을 남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에르네스트는 담담하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같이 올곧은 태도였다.

어디에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납득만 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주최는 원하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만족할 테고 알렉산드라는 성공적인 연주회 감독으로 남는다.

청중들도 원하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할 테고, 타티아나도 그것을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에르네스트가 가장 원하는 상황이어야 하지 않나?

알렉산드라는 그냥 대놓고 묻고 싶었다. 타티아나가 하겠다는데 싫어요? 진심으로?

“아니, 잠시만요. 에르네스트…… 내가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지금 반대하는 건가요?”

“정확히 이해하셨는데요.”

“장난치지 마시고…… 정말로요? 당신이 하겠다고 하면 타티아나도 할 생각이신 것 같은데? 그렇죠, 타티아나?”

혹시나 싶어 다시 타티아나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가 하겠다면요.”

언뜻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반응할 것이란 걸 이미 한참 앞에서 예상하고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에 따르듯 에르네스트가 이야기했다.

“다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무대 프로그램과 같은 듀엣 곡을 녹음할 생각이라면 하지 않을 겁니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그를 설득하려던 알렉산드라는 거꾸로 그에게 설득을 요구했다.

“왜죠?”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원이 무대의 것보다 좋다면 그건 청중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일이고, 그 반대라면 보다 완성도가 낮은 음악을 사인까지 해서 파는 격이니까요.”

“…….”

수십 년도 넘게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해 가며 연주회를 성공시키고 이 자리까지 오른 알렉산드라였지만, 이렇게 말문이 막힌 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연주자들은 무대 위에 음악엔 진지하더라도 기념 음반 등은 비즈니스적인 부분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기에 말이 잘 통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두 사람을 설득할 타당성으로 그런 숫자들을 놓고 이야기하려 했지만,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는 그조차도 연주회 전체의 완성도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라 여기고 있었다.

뭐라 할 말이 없는 대답이었다.

“…….”

어떻게 생각해도 당장 에르네스트의 논리를 파고들 여지는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한참이나 어린 그에게 압도되었다.

원래 그가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연주회를 할 때도 무대에 완벽을 기하곤 앙코르도 잘 하지 않는다지.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런 그의 성격을 이미 충분히 꿰뚫어보고 있는 타티아나도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 동안 할 말을 고르던 알렉산드라는 사람들이 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원하는지 알 것 같단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청중들이 그래도 그걸 원한다면요?”

“제가 안 팔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에르네스트…….”

“저도 무턱대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때문에 음반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대 프로그램과 다른 곡을 넣어야 한다고 봅니다.”

앙코르를 하지 않는다는 논리와 똑같은 논리로 기념 음반이고 뭐고 아무것도 서비스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무대의 음악은 무대에서 끝내고 더 필요하다면 다른 곡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뜻.

알렉산드라는 콘서트 디렉터로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 정도로 진지하게 임해 준다면 지지하는 게 당연했다.

알렉산드라의 눈빛이 바뀐 것을 확인한 에르네스트는 이내 약간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촉박하죠.”

2주 전엔 세상에 없던 곡을 작곡해서 오겠다고 큰소리 치기도 했지만, 그건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니라 충분한 계산 끝에 가능성을 따져보고 내세운 일이었다.

그런 그도 지금은 일을 더 만드는 게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잠깐 나눈 대화만으로도 에르네스트에게 설득당했다. 음악가로서의 이유가 있다면 기념 음반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사람. 에르네스트에게 그가 생각을 달리하길 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너희 다른 레퍼토리 많잖니? 아무거나 하면 안 돼?”

“…….”

주스잔을 기울이다가 다 마셔 버린 걸 보고는 옆으로 휙 치운 아나스타샤가 가벼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에르네스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