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6화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갑자기 기념 음반에 대한 이야기를 알렉산드라가 꺼내자마자 난 에르네스트를 살폈는데,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어도 그가 약간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와 기념 음반을 내긴 싫은 건가 싶어서 순간적으로 오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런 유치한 감정은 잠시 찾아왔을 뿐이다.
난 곧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천천히 되짚어볼 수 있었고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평소엔 그렇게까지 깐깐한 편은 아니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완벽주의자였다.
나도 만만찮은 편이었지만, 어떤 면에선 그가 나보다 조금 더 심한 부분도 있었다. 오죽하면 앙코르도 잘 하지 않을 정도일까.
물론 연주자로선 훌륭한 태도였고 그 완벽주의가 그를 지금 이 위치까지 데리고 오기도 했기 때문에 딱히 무어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한다.
그를 이해하는 심정과 기념 음반에 대한 내 욕심. 두 가지를 저울에 놓고 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중요한 건 연주회 그 자체였지 기념 음반 같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번엔 그의 완벽주의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에르네스트를 바라본 나는 그의 가지런한 옆얼굴을 보며 약간의 의심을 느꼈다.
정말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연주자로서 이 제안을 거절한 걸까.
그의 논리엔 헛점이 전혀 없었다.
기획자로서 잔뼈가 굵은 알렉산드라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납득해 버렸다.
알렉산드라야말로 기념 음반에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그녀가 바로 포기해 버릴 정도로 에르네스트의 태도엔 딱 부러지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난 그가 이 상황을 조금 불편하게 여긴다고 느꼈다. 알렉산드라의 제안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방법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잖아요.’
잠시 수그러들었던 유치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지금은 장난을 쳐 봐도 될 것 같다.
알렉산드라도 전혀 반박하지 못했던 논리를 내가 옆에서 흔든다면 에르네스트도 당황해하겠지.
에르네스트가 이렇게 나올 줄 미리 알았던 것처럼, 내가 은근히 그에게 반론을 펼쳤을 때 그가 어떻게 나올지도 예상이 되었다.
마치 정해진 연극을 하듯 살짝 놀아볼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너희 다른 레퍼토리 많잖니? 아무거나 하면 안 돼?”
아나스타샤가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아무거나로 만족할 사람들이었다면 지금 이런 회의 등도 모두 불필요하다.
당장 스튜디오로 가서 아무렇게나 음반을 녹음하고 내일 바로 연주회를 한다고 해도 나와 에르네스트는 문제없이 무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연주자들이다.
하지만 단순히 무대 위에 올라 틀리지 않고 연주하거나, 틀리지 않고 녹음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정해진 시간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함이고,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민과 집중이 앞으로 연주자인 스스로를 발전시킴을 믿는 것이다.
아나스타샤도 그 점을 모르지 않을 텐데,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음 같아선 조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더 감정을 감추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약간 화가 난 것 같다.
일단 말려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에르네스트가 한발 빠르게 그녀를 타박했다.
“아무렇게나 기록된 음악이 우리가 죽고 나서도 세상에 떠돌게 하라고?”
“그렇게 심각하…….”
가볍게 이야기하려는 것 같던 아나스타샤는 거기에 날 지원군으로 끌어들이려는 듯 내 쪽을 바라보더니,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수했음을 이제야 그녀 스스로 알아차린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던 걸까.
뒤늦게 수습하려는지 당황한 얼굴로 다 비어 버린 주스잔을 만지작거리던 아나스타샤는 이윽고 내게 물어왔다.
“너도 같은 생각이니? 타티아나.”
평소 말 한마디도 쉽게 하지 않는 성격이면서, 오늘은 왜 실수했는지 모르겠다.
난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어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심각한 사람이라서요.”
“……미안해, 타티아나. 넌 원래 그랬지.”
그녀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자신이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나 역시 믿기지 않는 건 마찬가지라서 더 이상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을 파악한 아나스타샤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에르네스트에게도 말했다.
“너도 원래 그랬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음반 한 번 안 만들었잖아.”
그걸 왜 이제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다. 아나스타샤의 목소리엔 미안해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그냥 농담으로 받아 준다면 좋을 텐데,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허리를 쭉 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이제 와서 더 진지해져 봐야 분위기만 무거워질 뿐이다.
일단 에르네스트의 입을 여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는지, 아나스타샤는 그가 대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졌다.
“시간이 갈수록 성숙해지는 디스코그래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런 의미가 있으려면 그만큼 진지해야겠지.”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 기획 이야기 말고. 네 평소 이야기를 묻는 거야. 진지하게 음반 하나쯤은 만들어 보지 그랬니?”
지금 에르네스트의 커리어를 생각해 본다면 이미 음반을 몇 개쯤 냈어도 괜찮을 정도이긴 했다.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뛰어난 음악성 앞에서 나이란 정말 숫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만약 그가 음반을 낸다고 한다면 유명 음반 제작사들이 몇 군데라도 덤벼들겠지.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하지 않았……
“만든 적 있어.”
“……뭐? 언제?”
“전에.”
화들짝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눈을 마주하자마자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난 알 수 있었다.
작년 여름방학이 끝나기 직전 그에게 받았던 선물.
근래 들어선 다른 음악들을 그와 함께 하느라 자주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실 알게 모르게 그가 연주했던 리스트의 세 곡은 내게 있어선 레퍼런스처럼 뇌리에 들어서 있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별다른 내색 없이 다시 내게서 눈을 돌려 아나스타샤에게 향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공유점이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그도 조금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설마하니 이제 와서 그때 왜 그랬지 하고 후회하는 건 아니겠죠?
난 조금 뒤숭숭했던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음을 느꼈다.
작년의 그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경 써서 만든 음반은 내 손에 들어와 있다. 그건 내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때 이미 우린 서로가 어떤 길을 걷고 있었는지 가르쳐 주고 납득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린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으니까.
우선 가장 가까운 지점은 이번 연주회, 그리고 다음은 국제 콩쿠르다.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 음악을 교류하길 원하는 그는 당연히 준비되지 않은 기념 음반 등으로 우리의 레퍼토리를 소진하는 걸 꺼려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의 거절 속에서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런 것이었다.
조금 더 그의 생각을 이해하게 된 난 조용히 웃으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음반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고, 아나스타샤는 그런게 있었다면 왜 말해 주지 않느냐고 묻는 중이었다.
“언젠데? 너 작년에도 시간 없었잖아?”
“대충 이맘때였어.”
“무슨 곡이었는데?”
“그게 지금 중요해?”
에르네스트는 이쯤 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듯 말을 잘랐다.
작년에 그가 음반을 한 장만 만들어서 내게 주었다는 사실을 아나스타샤에겐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때 당시에 바로 말해 주었다면 모를까 시간이 한참이나 흐른 지금 이야기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요즘 아나스타샤는 우리가 음반을 주고받은 이야기를 음악가적 관점에서 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저번 주말에 이야기를 나눠 본 후로 그건 보다 확실해졌다.
난 그녀의 이야기를 살짝 피하면서 에르네스트와의 관계에 관한 개입은 피해 달라 전했지만, 그걸 이해하고도 아나스타샤는 무시하고 있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어쨌든, 난 좋은 기획이라 생각했어.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야.”
그녀는 나와 에르네스트가 함께 듀엣 연주를 하고, 기념 음반까지 만드는 것을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 생각해서 지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그건 학교 친구들이 흔히 할 수 있듯 흥미를 중심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장난을 치려 하거나 놀리려는 의도도 없다. 미처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진지함이 그녀의 눈빛에 어려 있었다.
지금 정말로 심각한 건 나와 에르네스트가 아니라 아나스타샤 쪽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나스타샤.”
“응?”
“제가 생각해 봤는데…… 빠르게 준비할 수 있는 독주곡들만 모아서 내는 건 어떨까요?”
“독주곡? 전부 다?”
“하고자 하는 분들만요. 저도 앙코르로 준비했던 곡이 몇 곡 있으니…… 그중 몇 곡을 음반에 싣는 건 긴 준비 없어도 충분한 완성도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듀엣곡이라면 나와 에르네스트의 레퍼토리에서 또 추려 내어 다시 완성도를 끌어올려 놓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더 들어간다.
그러니 그걸 포기하고 당장 가능한 방법에 집중하자는 타협안이었다.
물론 이렇게 기념 음반 기획을 진행하면 알렉산드라의 첫 기획과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그녀가 말한 조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난 알고 있다.
어제 샬롯과 점심시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들었던 것처럼, 학교에 떠도는 소문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다른 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건 이미 이 연주회에 에르네스트와 함께 듀엣 연주자로 초빙되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에 어울려 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
에르네스트가 연주자로서 내놓은 이유가 분명 타당한데도 억지로 무언가 할 생각은 없었다.
“알렉산드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 질문에 알렉산드라는 예상과 다르게 이야기가 흘러감에 조금 난감해했지만, 이미 에르네스트에게 설득당한 후라서 그런지 차선책이라도 잡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듀엣과 퀸텟으로 나누어져 있던 연주자들을 이제 일곱 명의 솔리스트로 보며 한 명 한 명에게 독주 연주에 대한 의향을 물어보았다.
현악기 연주자들 중에선 게오르기만이 필요하다면 돕겠다고 말했고, 피아노 연주자들 중에선 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에르네스트도 지금은 아예 기념 음반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알렉산드라는 살짝 실망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곁가지에 크게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세 대의 피아노로 시작될 화려한 신곡의 초연과 퀸텟 연주의 1부, 그리고 듀엣으로 이루어질 연주회는 아무 문제 없이 준비되고 있었다.
괜한 이야기로 어색하게 만들어서 메인에 영향을 끼칠 순 없다는 걸 아는 알렉산드라는 빠르게 이야기를 정리했다.
“상황은 충분히 납득했으니 연주회 후의 행사 기획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죠. 제가 다음엔 더 좋은 걸 준비해 오겠습니다.”
“……감사해요. 알렉산드라.”
“아뇨, 저야말로 타티아나에게 감사하죠.”
내가 가급적 협력해 주려는 걸 눈치챘는지 알렉산드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그녀의 주도로 연주회 메인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정확하게 시간에 맞춘 큐시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방송까지 되는 연주회이다 보니 일반적인 연주회보단 조금 더 치밀한 스케줄이 필요했다.
“…….”
난 알렉산드라의 설명에 집중하면서도 옆으로 살짝 아나스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괴고는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 얼굴 아래에 돌고 있을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설마…….’
갑자기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날 과보호하는 편인 그녀가 소외감 같은 걸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바보 같은 생각은 1초 만에 수십 번이나 반박되면서 저 멀리 사라졌다.
요즘 들어 에르네스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긴 했지만, 피아노를 끼지 않고 마주하는 시간은 여전히 아나스타샤가 훨씬 많다.
그리고 난 몇 번이나 지금은 누군가와 사귀거나 할 생각이 없다고 그녀에게만큼은 전했다.
기억이 없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주기도 했고, 우리 사이에 다른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소외감을 느낀다면 나와 시간을 더 만들려고 할 테지, 에르네스트를 자꾸 엮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계속 내 유예를 끝마치길 바라는 걸까. 그 유예의 끝이 어떨진 나도 모르는데.
그녀는 그걸 앞질러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
“그럼 이따가 피아노를 세팅…… 왜?”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에르네스트의 곡을 리허설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나스타샤가 날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난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오래전 유예와 함께 잊어버렸던 무언가는 떠오르려 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하지만 난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은 딴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회의에 집중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