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7화
알렉산드라는 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스케줄을 다시 하나하나 확인시켜 주었다.
곡을 정확한 템포로 연주해서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사를 포함한 입장과 퇴장에 소요되는 시간, 그리고 무대 교체에 드는 시간까지 모든 것이 고려되어 있었다.
잠깐 설명만 들어 보더라도 알렉산드라가 얼마나 노련하고 능력 있는 콘서트 디렉터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까다로운 스케줄을 보면서도 약간은 안심했다. 이 계획대로라면 분명히 문제없이 모두 가능하리란 확신을 가진 덕분이었다.
잠시간의 회의가 끝나고, 그다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켜 줄 때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준비하도록 하죠.”
“예.”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세 명의 피아노 연주자들은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마지막 조율에 들어갔다.
악기에 대한 조율이 아닌 우리 음악에 대한 조율이다.
“어제 했던 것 기억하지?”
“응.”
“기억해요.”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에르네스트가 이 무대를 위해 작곡한 곡은 우리 손을 몇 번 거쳐 갔다.
주말간의 연구와 해석에 대한 제안, 그리고 에르네스트의 빠른 피드백 등이 이루어진 이 곡의 완성도는 보다 뚜렷해져 있었다.
거기에서 오늘 에르네스트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 했다.
이 리허설은 우리가 연습실에서 하던 연습이 아닌, 청중들을 두고 하는 실전 무대와도 같은 리허설이다.
당연히 느껴지는 바가 다르고 우리가 얻어 낼 수 있는 바가 다르다.
주위를 슥 둘러본 에르네스트가 진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거기에서 조금 더 단단하게 연주해 보려고 해. 크게 바뀌는 건 없으니 내가 먼저 이끌게. 너희도 들어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그대로 따라와 줘.”
“갑자기?”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거라고 봐.”
어떠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그저 감각적으로 소리를 듣고 따라와 달란 말에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에르네스트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곡에 대한 자신감. 우리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 상황을 마주하며 느끼는 고양감. 그 모든 것들이 그의 눈빛에 섞여 휘몰아친다.
난 약간 빨려들듯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에르네스트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이어 말했다.
“난 우리가 충분히 이 곡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어떤 변화라도 뒷걸음질 치는 일은 없을 거야.”
“악보도 못 외웠는데?”
“그건 2주 동안 해 보면 될 일이지. 정 안 되면 그냥 악보 보면서 해도 되고.”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암보를 하지 못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긴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무턱대고 그가 보다 나은 길을 찾아 애드리브를 보여 볼 테니 따라와 달란 이야기였지만, 우린 당황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
말없이 서로 시선을 공유하던 에르네스트는 피식 웃으며 아나스타샤에게 말했다.
“아무튼, 믿을게. 아나스타샤.”
“왜 이러니? 부담되게.”
“장난치지 말고.”
얼마 전 서로 살짝 다투었던 일을 에르네스트는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나스타샤는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흘겼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의 확실한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곧 피아노 준비가 끝나면 이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을 테니까.
에르네스트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자 아나스타샤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투로 퉁명스레 말했다.
“장난 같은 건 안 쳐. 내가 너희들 창피하게 할 것 같니?”
그녀는 늘 진지하게 피아노를 대했고 순간의 연주가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며 어떤 반향을 이끌어오는지 충분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난 어제 있었던 연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을 드러내며 에르네스트와 대립하면서도 그가 대결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자 조화를 잃지 않았다.
금방 선을 넘어갈 것 같다가도 다시 되돌아온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식으로 이 곡을 다루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았다.
아니면 이 또한 작곡가인 에르네스트의 안배였던지.
“이렇게 하면 되겠죠?”
그렇게 우리가 짧게 조율을 마치고 나니 알렉산드라가 다가와서 말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세 대의 피아노가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으니 이 큰 합주 연습실도 꽉 차는 기분이 든다.
연주회 관계자들도 모두 자리를 만들며 벽 쪽으로 붙어 있었다.
촬영 장비도 다시 세팅하나 싶었지만, 이 리허설은 딱히 촬영할 계획이 없는 것 같았다.
북적거리는 연습실 안 상황을 살핀 에르네스트는 이 모든 것을 지휘한 알렉산드라에게 감사를 보냈다.
“빨리 준비되었네요. 고맙습니다. 알렉산드라.”
“음…… 에르네스트. 그런데 미리 알려 줄 게 있어요.”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처럼 안 되어서 미안하다는 투였다.
“전부 스타인웨이로 세팅하려 했었는데, 한 대가 조율이 안 되었다고 하네요.”
“그럼 한 대가 다른가요?”
“예. 저기 있는 저 피아노. 뵈젠도르퍼예요. 괜찮을까요?”
세 대의 피아노 모두 똑같은 검은색의 그랜드 피아노였지만, 우리가 보는 방향에서 가장 멀리에 있는 한 피아노는 확실히 여기에서 봐도 조금 달랐다.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한 대가 다른 것에 대해 생각하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뵈젠도르퍼도 정말 좋은 피아노였지만 스타인웨이의 맑은 음색과는 조금 다른 음색을 지니고 있어서 갑자기 이렇게 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지 미리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음색이 어떻든 연주를 못 할 건 아니었다.
그 차이를 따질 정도로 예민하게 굴 거라면 애초에 이 좁은 연습실이 아니라 큰 무대에서 정말 완벽하게 모든 조건들을 다 갖춘 다음에 연주하고자 해야 한다. 장소의 차이가 훨씬 더 클 테니까.
애초에 부족한 조건들을 놓고도 최선의 연주를 해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다.
에르네스트도 무대에선 완벽주의자이지만 리허설 땐 말 그대로 연습의 목적에만 충실하는 사람이다.
그는 약간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허설이니 괜찮지만, 사운드에 대해선 예상에 미달할…….”
“제가 해 볼게요.”
그는 기준을 조금 낮추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난 우리에게 주어진 이 조건을 어떻게 하면 가장 유리하게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고, 결론은 내가 맡는 것이었다.
“저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꽤 다뤄 본 기억이 있어요.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내 머릿속엔 아직 그 피아노의 음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에르네스트나 아나스타샤 역시 뵈젠도르퍼를 딱히 못 다루거나 하는 건 아닐 테지만 가장 최근에 비슷한 모델을 만져 본 사람이 맡는 편이 나았다.
걱정하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웃으며 말하자 알렉산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시겠다면 다른 문제는 없어요. 지금 바로 리허설 시작해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알렉산드라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연습실 안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이런저런 준비들로 들려오던 소음도 모두 사라졌다.
우리 세 연주자의 세계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데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곳은 좁은 연습실이었지만, 이젠 청중들을 앞에 둔 무대이기도 하다.
어서 음악을 귀에 넣어 달라는 굶주린 열기가 곳곳에서 스멀거리며 인다.
그 열기를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에르네스트는 옅게 웃으며 우리를 돌아보았다.
“가 볼까?”
“예.”
건반을 연주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세 대의 피아노를 향해,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
스푸마토 콰르텟의 리더 바이올리니스트 게오르기는 자신의 리허설이 아님에도 긴장과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연주자의 진짜 실력은 어디에서 느낄 수 있는가.
거기에 대해선 사람들마다 대답이 모두 다르지만 게오르기는 합주 집단을 이끄는 입장에서, 여러 연주자가 합주를 할 때 그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고 믿고 있었다.
저 세 명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한 번에 모여서 연주하는 건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오르기는 세 사람을 지금까지 봐 온 피아니스트들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집단으로 생각하며 곧 시작될 연주에 신경을 기울였다.
“…….”
각자 피아노 앞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이 시선을 교환한다.
이미 문화부 장관이 보는 앞에서도 한 번도 떨지 않고 연주를 했었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상태를 점검하고 진지하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지켜보고 있는 청중들 사이에서도 그 준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어떠한 신호 없이 첫 음이 울리며 음악이 시작되었다.
‘처음 듣는 곡…….’
에르네스트가 이 구성을 위해 작곡한 곡이니 처음 듣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신선함은 게오르기가 예상했던 수준을 한참이나 뛰어넘고 있었다.
당연히 열여섯 살밖에 안 되었으니까 누구를 사사했든 그 그림자가 깃들어 있어야 했다.
아니면 추구하고 목적으로 했던 작곡가의 느낌이라도. 지금까지 있어 왔던 모든 음악가가 그러했다.
전대 음악가들의 흐름을 붙잡고 해체해서 보다 발전시켜 나가는 역사를 지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의 음악에선 특정한 한 작곡가를 떠올리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어느 부분에선 라흐마니노프의 색채감이 느껴지다가 리스트 특유의 비르투오시즘이 엿보인다.
중점이 되는 음악적인 구조 자체는 전통적인 러시아의 화성학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 주된 리듬은 오래된 민속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굉장히 세련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게오르기는 미처 다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건 그가 피아노를 전문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에르네스트가 그만큼 정말 많은 것들을 섭렵하여 자신의 음악관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하나로 하려면 중구난방이 되기 마련이기도 할 텐데, 에르네스트는 아주 노련하고 영리하게도 그중에서도 개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선율들은 옆으로 나누어 다른 두 피아니스트들에게 독립적으로 맡겼다.
마치 오케스트라에서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가 한곳에 모여서도 조화로운 소리를 이룰 수 있듯, 에르네스트가 그려낸 이 곡에선 다채로운 특성을 지닌 피아노 소리가 뭉쳐 들어도 어지럽게 얽히는 대신 세세하게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수준 높은 음악이었다.
‘이걸 겨우 2주 만에 썼다고……?’
물론 그 모티브는 조금 더 예전에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처음 음표를 쓰기 시작한 것이 2주 전이라면 에르네스트는 말할 것도 없이 천재다.
이미 에르네스트는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각광 받는 천재였지만 그건 피아니스트로서의 위상이었다.
만약 이 곡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어떻게 될까.
게오르기는 미처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영예가 그에게 주어지겠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에르네스트라는 이름은 음악계에서 유명세를 떨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에르네스트의 음악적 역량에 집중하며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였다.
“…….”
주제가 급변하면서 에르네스트가 이끌던 흐름이 다음으로 넘어왔다.
타티아나는 그 음악을 부드럽게 쥐고는 스르륵 당겼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는 물론이고 듣고 있던 게오르기도 그 힘에 잡아당겨지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에르네스트에게만 집중할 때가 아니란 걸 실감했다.
순간적으로 섬뜩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타티아나의 연주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에르네스트가 앞서 보여 주었던 것과는 또 다른 수준의 실력이었다.
‘말이 안 되는 수준이야.’
그 실력이 에르네스트와 나란히 놓아도 차이가 없을 정도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또 한 번 타티아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에르네스트야 직접 곡을 쓴 작곡가이니 이 음악에 대한 해석이 깊고 연습할 시간도 더 있었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타티아나가 이토록 소름 돋는 호소력이 느껴지는 연주를 자연스레 해내고 있다는 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가히 초인적인 표현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연주자인지 새삼 느끼면서 게오르기는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와 함께하는 피아니스트, 아나스타샤였다.
‘지금이 더 잘하는 것 같은데?’
게오르기는 아나스타샤와 퀸텟을 이루면서 그녀를 정말 고평가하게 되었지만, 그조차 과소평가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 연주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기교에 도가 튼 프로 연주자들도 기겁할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 거기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의 향연은 모든 사람들을 휩쓸리게 만든다.
주어진 곡에 따라 연주자들의 역량이 변화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아나스타샤가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내보이려고 한다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 정도가 어느 순간 살짝 넘어서면서 단지 솔리스트의 퍼포먼스에 가까워지려는 찰나, 적절하게 에르네스트와 타티아나의 음악이 그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협주곡을 이루어냈다.
이 순간을 살아가는 어린 연주자들은 서로의 불꽃을 모아 그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음악이다.
세 대나 되는 피아노를 사용할 정도이니 간결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는 강렬한 에너지의 격류가 충분히 그 가치를 드러내고 있었다.
겨우 열여섯 살의 연주자들이 할 수 있는 음악인가 싶었다가도, 열여섯 살이기에 할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