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98화 (798/1,277)

##  798화

그간 여러 번의 리허설이 있었지만 이렇게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내 파트 자체엔 그리 걱정되는 부분이 없었다. 그건 갑자기 뵈젠도르퍼 그랜드 피아노를 쓰게 되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 정도의 조건은 곧바로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곡과 피아노를 이해할 수 있었고 무얼 하든 큰 문제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살짝 걱정하는 점은 아나스타샤와 에르네스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부분이었다.

각각 개성이 강한 피아노 연주자 세 명이 모여서 균형을 잘 맞추는 건 아무리 작곡가가 밑그림을 잘 그려놓았다 하더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심지어 아나스타샤에게 주어진 파트는 기교적인 한계를 풀어 놓은 것들이 많았다.

복잡한 아르페지오 연주 사이에 악센트를 넣어 표현하는 선율은 연주자의 역량에 따라 난이도가 정말 들쑥날쑥하게 변화하기 좋은 부분이었다.

얌전하게 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정말 끔찍할 정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구간으로 변모한다.

처음엔 아나스타샤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하지만 조금 익숙해지고, 이 곡의 끝을 보고 난 뒤엔 정말 고삐 풀린 말처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붙잡지 않으면 금방 놓쳐 버릴 정도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맡겨진 파트를 어느 하나도 사양하지 않고 연주할 것이란 걸 이전에 눈치챈 에르네스트는 연주 전에 미리 당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연주에 임해선 말했던 그대로 행했다.

에르네스트가 앞장서서 먼저 이끌어나가는 리듬과 밸런스는 지금까지 했었던 그 어떤 연습 때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작곡가만이 할 수 있는 레퍼런스 연주다. 그걸 듣고도 따르지 않을 연주자는 없었다.

그리고 나 역시 옆에서 그를 도와 곡의 전체적인 틀을 바르게 잡았다. 뵈젠도르퍼의 낮고 중후한 음색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리 잘 알고 노력한 덕분인지 아나스타샤의 화려한 연주는 음악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준비된 궤도로 따라 흐르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 음악의 수준은 이전에 했던 것보다 몇 계단은 더 높은 곳에 올라서 있었다.

내가 듣기에도 썩 괜찮았던 이번 연주는, 듣고 있던 다른 청중들에게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 냈다.

“와우.”

“브라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우리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어나선 기립박수를 보내왔다.

현악기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촬영 관계자들 등도 거기에 모두 함께했다.

십수 명의 박수와 환호였지만 이 연습실을 가득 채우기엔 충분했다.

어지러워질 정도로 큰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나스타샤.”

“응?”

“인사해야죠.”

너무 에너지를 많이 쏟아내서 탈력감을 느끼는지 아나스타샤는 앉은 채로 멀뚱히 날 바라보다가, 내가 손을 내밀자 붙잡고 일어났다.

곧 에르네스트도 내 옆에 섰고, 우리는 나란히 고개를 숙였다.

알렉산드라가 웃으며 다가와선 악수를 건넸다.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어요. 정말로. 대단하시네요. 에르네스트.”

자신의 귀로 듣는 것을 믿는 음악가로서 알렉산드라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는 에르네스트와 악수를 마치고는 이어 나와 아나스타샤에게도 순서대로 악수를 권했다.

“타티아나, 그리고 아나스타샤도.”

“감사합니다.”

일단 콘서트 디렉터나 다른 관계자들에겐 이 곡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정을 받은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오니 인정을 뛰어넘은 격한 찬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깜짝 놀랐네 진짜…… 이걸 연주회 서곡으로 내보낸다고? 사람들 기절하겠는데.”

“우리가 그다음 순서란 걸 생각하니 나야말로 기절하겠어.”

“아, 맞다.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콰르텟의 바이올린 연주자 게오르기와 다리아가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였지만 그 내용은 사실 우리가 들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눈을 마주치자 게오르기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첼로 연주자 솔렌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 정도로 특색 있는 음색들을 내긴 어려웠을 텐데. 써낸 작곡가나 실현해낸 연주자나 둘 다 대단하네요.”

“정말 저번 회의 때 완성했던 것 맞아요? 이렇게 연습할 시간이 있었나?”

“전 지금까지 피아노 여러 대로 하는 연주는 그냥 선율을 늘려놓았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 들어보니까 이건 정말로 협주곡이네요.”

다른 악기들이 섞이는 연주와 달리 피아노가 여러 대가 되는 합주는 자칫하면 그저 시끄러운 소음만 늘어놓는 일이 되곤 한다.

선율의 개수만 늘리다가 결국 모두 엉켜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그간 여러 건반악기를 다뤄 본 음악가로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자신의 곡은 철저하게 각 피아노가 분리되면서도 한 지점을 향해 연주하도록 구성해 두었다.

노련하면서도 뛰어난 솜씨였다. 그건 같은 피아노 연주자인 내 의견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기도 했다.

여러 칭찬들이 이어지자 에르네스트가 다시 한번 깔끔한 태도로 감사를 표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만큼 좋은 음악이었으니까. 당연하죠. 설마 자신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죠?”

“자신은 있었죠…… 하지만 결국 평가는 들려줘 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하하하, 말만 들어 보면 이미 온갖 일을 다 겪어 본 베테랑 작곡가 같네요. 이 정도로 철두철미하면 평생 실패라곤 없었을 것 같은데.”

“저도 실수 정도는 합니다.”

세상에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듯 에르네스트가 말하자 솔렌은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웃었다.

솔렌은 평소 약간 딱딱하게 보이긴 하지만 칭찬이 필요할 땐 결코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솔렌은 친근하게 에르네스트의 어깨를 툭 치더니 이어 말했다.

“로마 대상 심사위원이 괜히 극찬했겠습니까? 걱정 마시죠. 피아노에 대해 그렇게까지 잘 알진 못하는 저희도 지금 감탄 중이잖습니까?”

어떤 저명한 음악가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그 음악이 다른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음악을 평가하기 위해선 많은 사람의 기준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의 평가는 아주 귀중했다.

프로 첼로 연주자인 솔렌과 다른 음악가들도 이 피아노로만 구성된 곡을 듣고는 칭찬을 해 주고 있었다.

그건 이 음악이 피아노라는 한 악기에 종속되어 특정 소수를 위해 뛰어난 음악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란 의미였다.

그 옆에 서 있던 촬영팀의 프로듀서 데니스도 한마디 보탰다.

그는 피아노를 세팅하느라 촬영이 어려워져서 이 리허설을 찍지 못한 것이 심히 후회되는 듯 보였다.

“일반 청중 대표로 말씀드리죠. 이 곡은 분명히 에르네스트를 작곡가 반열에 올려놓고 유명세를 한층 더 끌어 올릴 겁니다. 물론 다른 두 분도.”

“감사합니다.”

“연주회 당일이 기대되는군요. 정말로.”

그 뒤로도 에르네스트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난 그가 작곡가로서 응당 누릴 수 있는 칭찬들을 많이많이 듣길 바라며 살짝 그 곁에서 물러나 자리를 피해 주었다. 정말 그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으니까.

아나스타샤는 어디에 있나 보았더니 그는 게오르기와 한창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퀸텟의 피아노 연주자이기도 했으니 게오르기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잠깐 시간이 난 사이 물을 마시며 한숨 돌리고 있는데, 다리아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혼자 다른 피아노 쓴 거죠? 타티아나. 진중하게 깔아주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맞아요. 뵈젠도르퍼였죠. 잘 들리셨나요?”

“그럼요! 전 피아노 소리에 그리 예민하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들렸어요. 다른 연주자들에게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특색이에요. 타티아나는 표현력이 정말 대단하네요.”

피아노의 음색 차이는 아주 낮은 곳에서부터 사람들의 무의식에 파고든다.

때문에 전문적으로 피아노를 다루지 않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막연하게 그 느낌을 알 뿐이다.

난 겉으로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 그 미세한 진동의 차이를 구분하고 컨트롤하는 데에 늘 심혈을 기울여왔다.

다리아는 그 부분을 정확하게 느낀 듯했다.

바이올린만 다뤄 온 그녀는 피아노를 잘 모른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악기를 떠나서 귀가 굉장히 좋은 것 같았다.

내가 기쁘게 칭찬을 받아들이자 다리아 역시 환하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피아노를 바꿔 가면서 활용할 수 있다니, 앞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하겠어요.”

“우연히 생긴 기회라 해 본 건데 잘 되어서 다행이에요.”

“우연? 무슨 말이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에게 난 똑같은 피아노 세 대를 준비하지 못해서 한 대를 다른 것으로 준비하게 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다리아는 깜짝 놀라면서 피아노 쪽을 보았다가,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의도했었던 효과가 아니라 오늘 즉석에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 정말?”

“예. 괜찮을 것 같아서…….”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녀는 갑자기 악기가 그렇게 바뀌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특색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날 신기하게 여기는 같았다.

하지만 늘 다른 무대에서 다른 피아노를 마주해야 하는 우리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그런 유연함은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였다.

피아노 연주자들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는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다리아와 이야기해 주는 사이, 옆에선 웃음이 터지고 몇 번이나 다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떠들썩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로 들떠 있었다.

가만 보니 와인을 더 따라 마시기도 했는데, 이대로 회의고 뭐고 바로 파티라도 하러 갈 기세다.

마치 시작도 안 한 연주회가 성황리에 끝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잘 되었네요.’

기념 음반을 에르네스트가 거절해서 조금 어색해졌던 느낌은 온데간데없었다.

멀리서 보니 에르네스트도 조금 더 풀어진 얼굴로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단지 무대에 올릴 곡들을 리허설만 했을 뿐인데도 이런 분위기라면 앞으로도 분명 잘 될 것 같았다.

“좋네요. 일단 다들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알렉산드라가 잔뜩 들떠 있는 모두를 조금 진정시키고는 테이블 쪽을 가리켰다.

어차피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 분명하니 계속 서 있는 것보단 앉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처음 회의가 시작했던 상태로 다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는 제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멋진 곡을 이번 연주회에서 초연할 수 있게 되다니, 여러모로 의미가 깊겠네요. 프세볼로트 장관께서도 기뻐하시겠어요.”

“장관님이?”

“아무렴요. 방금 그 연주가 전국에 방송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반향이 얼마나 클지. 이 연주회를 주최한 분들이 앞으로도 에르네스트를 가만두지 않겠는데요?”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번 겨울에 했었던 송년 연주회처럼 이번 가을 연주회 역시 텔레비전으로 방송된다.

그때도 에르네스트는 정말 많은 인터뷰 요청 등을 받곤 했었는데, 이번엔 아예 작곡가로서 대중들에게 데뷔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얼마나 주목받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건 음악계 전체로 놓고 보아도 정말 큰 뉴스가 될 일이었다.

여러 곳에서 에르네스트를 찾겠지. 그런 생각만 해도 난 기분이 좋아졌다.

이미 결정되다시피 한 미래를 예언하듯 이야기하는 알렉산드라를 보며 에르네스트는 가볍게 웃더니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말했다.

“저 혼자선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하핫, 당찬 모습이나 완벽주의적 면모도 좋았는데, 이렇게 실력을 보여 주고 나서 보여 주는 겸허나 의리도 보기 좋네요. 에르네스트. 제가 지금까지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나 왔지만, 당신은 멀리 가겠어요. 정말로.”

그 또한 예언보단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 난 그녀의 말에 적극 동조하고 싶었다.

그렇게 연주회의 시작을 알릴 서곡의 리허설이 끝나고, 그 뒤로 이어진 회의도 계속 분위기가 좋았다.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염려나 걱정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모두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연주회의 성공은 결정된 일이나 다름없었고, 그다음으론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퀄리티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생각하는 아이디어만 한가득이었다.

게오르기는 이참에 모두 결정해 놓자는 듯 이야기했다.

“알렉산드라. 차라리 그 곡을 내면 어떻습니까?”

“무슨 말이죠? 게오르기.”

“기념 음반 생각하고 있었잖습니까? 그냥 방금 전 그 곡을 실어도 될 것 같은데.”

이 정도 수준이라면 충분히 괜찮지 않겠냐는 듯 그가 제안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라가 대답하기 전에 곧장 다리아에게서 반박이 나왔다.

“게오르기. 무슨 말인진 알겠지만 이건 신곡이잖아. 기념 음반은 메인이나 앙코르를 담는 쪽이 낫지.”

“신곡인 게 메인이 안 될 이유가 있나?”

“에르네스트 입장도 생각해 봐. 신곡을 기념 음반에 내고 싶겠어? 전문 레이블에서 내야지.”

“아.”

게오르기는 바로 납득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곡가는 자신의 곡에 대해 결정해야 할 일이 많다. 헌정에 대한 여부, 그리고 출판이나 초연 녹음 등까지도.

그 모든 것은 전부 자유롭게 맡겨져 있는 바였지만, 에르네스트가 만약 작곡가로서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싶다면 그가 속한 에이전시의 도움을 받아 작품 목록을 만드는 편이 나았다.

“…….”

그런데 그는 그 전의 곡들도 하나도 출판하거나 음반으로 내지 않았다. 내게 헌정했던 겨울의 표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작품들이 쌓이고 나면 한 번에 만들려는 걸까.

지금까진 출판 등에 욕심을 내지 않고 있지만, 이번 연주회로 그가 작곡가로서 조금씩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된다면 분명 출판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곡을 헌정받은 사람으로서 내 이름도 출판된 악보에 올라가게 되겠지.

‘언젠가는 녹음하겠다고 불러줄까?’

헌정받은 사람이 초연과 녹음 등을 맡는 일도 흔하다.

난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그때를 생각하면서, 가만히 에르네스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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