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799화 (799/1,277)

##  799화

회의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아 끝났다.

우리 연주자들의 준비가 충분히 연주회 기간에 맞추어서 되어 가고 있음은 이미 확인되었고, 나머지 부분들은 실무를 담당하는 관계자들이 해야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드라가 서류철을 덮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앞으로 미팅은 두어 번 정도 더 하겠네요. 그리고 다음 주엔 드레스 리허설을 진행할 겁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무대 확인도 하고 연주회 직전의 모든 것을 마무리 짓도록 하죠.”

이제 이렇게 모여서 아이디어를 내고 의견을 주고받는 일은 거의 끝났다.

모든 의상을 갖추어 입고 정말 실전처럼 하는 드레스 리허설이 다가왔다는 건, 곧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검토하며 상황을 확인한 알렉산드라는 다시 우리를 돌아보더니 웃었다.

“훌륭한 연주자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러 번 연주회를 기획해 봤지만 이번만큼 기대되고 가슴이 떨리는 적은 처음이네요.”

그녀의 말에 게오르기가 낄낄거리며 농담했다.

“오, 알렉산드라도 그렇습니까? 전 저만 그런 줄 알았지 뭡니까.”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럴걸요.”

“날짜가 빨리 다가왔으면 하고 바랐던 건 처음이긴 해요.”

웃음소리가 한데 섞이며 부드러운 바람으로 변한다.

이 순풍이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걱정될 것 하나 없었다.

끝까지 좋은 분위기에서 회의를 마치고 우리는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다른 연습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이대로 돌아가면 된다.

회의가 끝났다고 빅토르에게 연락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막 바이올린 케이스를 정리해서 나온 다리아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다음에 봐요, 타티아나.”

“예, 다리아.”

다리아에 이어 솔렌과 게오르기까지 그렇게 사람들을 보내고 나자 이윽고 빅토르와 소로킨이 우리 앞에 차를 이끌고 나타났다.

나와 아나스타샤 그리고 에르네스트가 차례대로 차량에 오르자 빅토르자 우리 쪽을 보며 물어보았다.

“오늘 연습은 잘 되셨나 봅니다?”

“어? 어떻게 아셨나요?”

“아까 전화하시는 목소리가 굉장히 밝더군요. 이젠 딱 목소리만 들어도 알죠.”

난 그냥 회의가 끝났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거기에서 벌써 눈치를 챈 모양이다. 역시 오랫동안 함께했던 덕분일까.

평소 그는 내가 음악가로서 하는 일을 달리 묻거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난 간략하게 아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까지 미지수로 남아 있던 곡을 리허설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거든요. 이렇게만 잘 하면 연주회에서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이 드네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이 정도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지 빅토르가 웃으며 다시 앞쪽을 바라보았다.

내 스케줄을 전부 꿰뚫고 있는 그는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안다.

때문에 내게 혹여나 문제가 생길까 근래 조금 더 신경 써 주는 것 같았는데, 이렇게 잘 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긴장을 풀 수 있었던 것 같다.

빅토르를 안심시켜 놓은 나는 아까 했었던 리허설과 그 반응을 떠올리면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창밖을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을 마주했다.

연습실에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었다.

아직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지금 기분 정도는 살짝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기분 어떠신가요? 에르네스트.”

“어…… 좋지 당연히.”

에르네스트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약간 얼떨떨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냥 무작정 좋아해도 될 상황일 텐데.

연주회가 끝나기 전까진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로 침착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참 에르네스트다웠다.

난 조금 더 그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걸 표현하고 싶어서 그의 옆에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이젠 정말 연주자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충분히 주목받으실 거예요. 아까 알렉산드라가 말씀드렸죠?”

“그랬지.”

“후후, 기대되네요.”

그렇게 말해 주고 나서야 에르네스트는 웃음을 보였다. 그가 좋아해 주니 나도 기뻤다.

잠시 신호등에 걸려 멈춰 있던 차가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옆을 보니 반대편의 아나스타샤는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미 반쯤 졸고 있었다.

아침잠은 많지만 낮에 조는 일은 잘 없는 그녀가 이렇게 피곤해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잠깐 눈 좀 붙이세요. 아나스타샤.”

“응? 응…….”

아나스타샤는 중얼거리더니 곧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이번 리허설 준비로 꽤나 지치기도 했고, 연주 자체에 에너지도 너무 많이 쏟아부은 것 같았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졸고 있는 그녀가 조금 더 편한 자세였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차 안에선 한계가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가는 것뿐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인터넷을 켜자마자 바로 맨 앞에 드러나는 페이지에 문화부 주최의 가을 연주회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이미 인터넷 예매가 다 끝났을 정도로 시작하기도 전에 흥행하고 있는 원인 등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였다.

“…….”

예상했던 대로 기사의 대부분은 에르네스트에 대한 이야기나 나와의 듀엣에 대한 추측 등이었다.

수많은 의견들을 보면서도 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이런 이야기도 가능하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눈에 조금 거슬리는 내용도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쓴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에 대해 넘겨짚어 억측하며 연주회의 폭탄이 될 것이라 예상하는 내용이었다.

대충 읽어내리던 난 다시 집중하면서 천천히 보았다.

그 근거는 꽤 다양했다.

우선 에르네스트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유명하지 작곡가로선 무명이나 다름없었으며, 또 어쨌거나 열여섯 살에 불과하단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세 대나 되는 피아노를 사용하는 곡들이 몇 곡 있긴 하지만 대부분 흥행하지 못했던 점을 들며 이 구성의 불리함에 대해 내세우기도 했다.

그 내용들 자체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완성된 음악이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그만한 완성도도 이루어 낸 음악인 까닭이다.

우린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낼 수 있었다.

난 이 기사를 낸 사람이 우리 연주회에 꼭 와서 보길 바랐다.

상상도 못했던 음악을 마주하면, 그다음으로 어떤 기사를 쓰게 될지 정말 궁금했다.

약간은 심통이 나서 그런 생각 등을 하고 있는데, 자기 스마트폰을 보던 에르네스트가 갑자기 이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 봐?”

“예?”

한창 기분 좋을 그에게 이런 기사를 보여 주기 싫어서 난 빠르게 페이지를 뒤로 넘겼다. 가십 등을 다루는 페이지가 화면에 떴다.

난 눈에 보이는 대로 읽어내리면서 말했다.

“어…… 연예계 기사예요.”

내가 말해 놓고도 황당했다. 우리 중에서 이런 기사에 관심을 보이는 건 이 자리에 없는 발렌티나 정도였다.

서점에 가더라도 그녀는 트렌드에 민감한 잡지 등을 자주 본다.

정반대로 난 학교에서 친구들이 돌려 보는 잡지에도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고.

그런데 이제 와서 어색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서, 난 괜히 허세를 부리며 말했다.

“뉴스라면 이것저것 보는 편이라서요. 그, 너무 음악만 파고들어서 세상일을 모르는 것도 문제잖아요?”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에르네스트는 뜻밖이라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몰래 보려던 건 아니지만 내 스마트폰 화면도 살짝 본 것 같았다. 그가 재차 물어보았다.

“그래서 평소에 가십 등도 챙겨 보는 거야?”

“아뇨, 별로.”

“?”

“그렇게 챙겨 보는 건 아니고…… 그냥 눈에 띄어서요.”

뭔가 분위기에 휩쓸려서 허세를 부렸지만 이제 와서 가십을 챙겨 본다니까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뒤늦게 변명하듯 이야기하자 에르네스트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갑자기 막다른 골목에 갇히게 된 기분이다. 난 거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일단 대화를 그에게 패스했다.

“에르네스트는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당연한 것 아냐? 난 당연히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 생각했는데. 네 입장이라면 어떻겠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는 바로 대답했다.

난 거기에 곧바로 동의하려다가, 내 입장으로 놓고 보니 사실 난 평소에 그렇게 신경 쓰면서 살지도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샬롯과 대화했을 때 교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난 동요하거나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샬롯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했었지. 아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당연히 평범해 보이는 대답을 하고 넘기는 게 낫다는 계산까지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를 마주하고 있는 내 입에선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럴 리가.”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스스로 증명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것도, 그런 것들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모두 불가피한 일이다.

실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관념을 믿는 것뿐이라면 결국 잘 모르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 무엇도 나 스스로를 정확하게 일컫지 못한다.

난 형체 없는 관념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다만 증명할 수 있다면 그리한다. 그것이 날 객체로서 오롯하게 했다.

에르네스트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던 때였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게 어디 있니, 타티아나.”

“아, 깨셨나요.”

“응.”

조용히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귀가 밝은 아나스타샤는 그 내용을 그냥 듣고 넘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가끔 이렇게 그녀는 한참이나 어린 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 하기도 했다.

“누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가서 따져야지. 가만히 있으면 되니?”

“하지만…….”

“음악은 그렇게 똑부러지는 애가 왜 아직도 자기 일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지 몰라…….”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단지 그 사람이 지닌 내 이미지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겠지.

그리고 어쩔 수 없다고 말했던 게 어떤 의미였는지 오해를 풀려고 했을 터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난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잣대가 잘 흔들리지 않는 편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한마디에 휘청하고 흔들리는 걸 느꼈다.

아나스타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까 난 약간 심각해졌다.

지금까지 못 미더운 모습을 많이 보인 건 맞지만, 지금도 그런 걸까?

“저 그렇게 바보같이 보이나요……?”

“내가 그렇게 말했니?”

“아마도요.”

“음…….”

아나스타샤도 내가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옆의 에르네스트에게 얼른 넘겨 버렸다.

조금 치사한 회피였지만 아까 전에 나도 똑같은 방법을 에르네스트에게 한 적이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 볼까?”

“나?”

“너랑 정반대의 이야기를 타티아나가 하고 있잖아? 그래서 네 결론은 뭔데?”

“……이런 이야기에 결론이 어디 있어? 각자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그는 그야말로 교과서적인 대답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나스타샤는 더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이미 이야기에 어느 정도 매듭이 지어져 버렸다는 걸 느꼈는지 작게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녀는 좌석 뒤로 조금 더 깊게 몸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생각이 달라도 결국 둘 다 비슷하다는 게…….”

“뭐?”

“아무것도 아냐.”

둘이라는 건 나와 에르네스트를 뜻하는 걸까. 하지만 무엇이 비슷하다고 본 것인지 난 잘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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