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0화
타티아나는 두 친구를 각자 집 앞에서 내려 주고 싶어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모스크바 시내를 너무 돌지 않길 바랐다.
그냥 아나스타샤의 집 앞에서 둘 다 내려 주면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겠다고 하니 타티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도 이렇게 헤어진 적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 이상할 건 없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도로를 달려 이윽고 차량은 아나스타샤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차례대로 내려 차 옆에 서자 타티아나가 열린 창문 사이로 인사를 건넸다.
“이따 연락할게요, 아나스타샤.”
“응.”
“에르네스트는 조심히 돌아가시고요.”
“알았어.”
타티아나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평소 그녀는 전혀 외로움 같은 걸 타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헤어질 때면 종종 마음이 약해진 얼굴을 보이곤 했다.
에르네스트의 집까지 돌아가는 건 그를 위한 일일 뿐만 아니라 타티아나를 위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로 올라탈 순 없었다.
“잘 가요, 두 분.”
“응. 내일 봐.”
담백하게 인사를 마친 타티아나가 창문을 올렸고, 곧 그녀를 태운 검은 벤츠는 다른 차량들 사이로 파고들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르네스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옆을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목 근처를 스트레칭하다가 그와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버리곤 약속이라도 한 듯 뒤돌아 걸어갔다.
주변은 분주했지만 아나스타샤와의 사이는 고요할 뿐이었고, 그렇게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한 가운데에서도 수많은 대화들이 오가는 기분이었다.
뭔가 현실과 관계없는 다른 어딘가를 거니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서 에르네스트는 짝다리를 짚고 서서 기다렸다.
아나스타샤가 올라가면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지하철로 갈 생각이었다.
“…….”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움직이지 않고 잠시 그의 옆에서 똑같은 자세로 바라보다가, 한마디 툭 던져왔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할래?”
“…….”
그냥 듣기에 꽤 무섭게 들리지만 이미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막연함이 없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와 가까운 찻집으로 향했다.
찻집 안에도 사람들이 많았지만 에르네스트는 요령껏 구석진 곳의 빈자리를 찾아내서 아나스타샤와 마주 보고 앉았다.
“메뉴판이 아예 놓여 있네?”
“먼저 봐.”
직원은 어디쯤 있나 보았더니 다른 손님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사이 메뉴를 미리 골라 놓으면 될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잠시 가게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아나스타샤는 메뉴판에서 무엇을 마실지 골랐다.
슬슬 다 골랐나 싶어서 다시 테이블 쪽을 보고 바로 앉자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에르네스트.”
차 마시자고 하더니 이제 본론에 들어가는 건가?
에르네스트가 예상하는 주제는 여러 가지였다.
일단 요 근래 합주에서 아나스타샤가 해석에 변화를 가져오면서 약간 컨트롤하기 어려워진 부분, 그리고 조금 더 길게는 타티아나와 관련된 이야기.
그 밖에도 연주회에 관련된 이야기 등 할 말은 많았다.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나스타샤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우리 이렇게 차 마셔도 되니?”
“네가 마시자고 했잖아…….”
“아니, 파파라치가 사진 찍어 가면 어떡해?”
“어이가 없네.”
회의 때 유명세니 어쩌니 이야기 나오고, 그다음엔 가십 이야기했더니 갑자기 그런 걱정이 든 거야?
진짜 유명 연예인이 된 것도 아닌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아나스타샤를 에르네스트가 황당하단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농담이었다는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이런 건 변하지 않아서 좋아.”
“뭐 마실 건지나 골라.”
퉁명스레 이야기하자 아나스타샤는 바로 디카페인 차를 한 잔 고르고는 에르네스트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에르네스트는 커피를 고르고 직원을 불렀다.
주문을 마치고 나니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더 진지해졌다.
다시 직원이 차를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짧게 시간을 정해 놓고 그사이 무거운 이야기들은 다 해 버리자. 그런 암묵적 합의가 두 사람 사이에 스쳐 지나갔다.
먼저 화두를 던진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오늘 분위기 좋더라.”
“그랬지.”
“솔직히 말해 볼래. 어느 정도 반응 기대했었니?”
“기대는 무슨 기대야. 일단 연주하고 보는 거지.”
“또 그런다. 너 예전 같았으면 다들 반쯤 기절했어야 성에 찬다고 했을…….”
옛날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나스타샤는 키득거렸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천방지축에 가까웠던 그때를 생각하면서 창피해하기보단, 지금 스스로에게 만족하기로 했다.
“그때였다면 이런 곡을 쓰지 못했겠지.”
“……그래?”
“너도 이렇게 연주하지 못했을 테고.”
그건 아나스타샤도 마찬가지여야만 했다.
그녀는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긴 슬럼프에 빠져선 피아니스트로서도 일반적인 학생으로서도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충분히 만족할 만했다.
하지만 바른 소리를 하고 나서 고개를 드니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리 흡족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향상심을 늘 품고 있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갈망이 아니다. 진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의 눈빛이다.
에르네스트 역시 지금 만족하고 있다고 되뇌고 있지만, 조금만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처럼 되는 게 정말 잘 없다.
지금 우리 괜찮지 않냐고 말하는 건 정말 멍청한 소리겠지. 에르네스트는 입술 안쪽을 살짝 씹으면서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건너편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화났니?”
“아니? 내가 왜.”
“그냥 그런 것처럼 보여서.”
화가 아니라 다른 답답함의 종류였는데 에르네스트는 이걸 무어라 말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렇다고 아무 비슷한 말을 덧붙여서 쓴다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속이고 아나스타샤에게 오해를 만드는 일이 될 것 같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아나스타샤는 마치 가까이 슥 다가오듯 테이블 위로 길고 가늘게 말을 건네왔다.
“아까 알렉산드라가 듀엣 연주로 기념 음반 내지 않겠냐고 했을 때, 하지 그랬어?”
그가 고민했었던 부분을 아나스타샤는 정확하게 짚어냈다.
당시엔 칼같이 자신의 논리로 거절했지만, 그 논리는 절반 정도의 이유였다. 나머지는 조금 더 사적인 이유들이 뭉쳐 있었다.
여러 이유 따위 다 집어치우고 말하자면 타티아나와 듀엣 음반을 내는 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주회고 기념 음반이고를 따질 게 아니었다. 단지 그 자체만으로도 그에겐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바라고 집중하는 대로 따라 주었다.
그 자체에 후회를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아나스타샤가 그의 사사로운 본심대로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다.
에르네스트는 거꾸로 물어보았다.
“넌 그걸 원하는 것 같더라.”
“응? 뭐…… 그렇지.”
“나야말로 물어볼게. 왜 그러는 건데?”
“왜 그러냐고?”
아나스타샤는 그를 경쟁자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와줄 이유 역시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계속 견제하고 못살게 굴더라도 에르네스트는 모두 이해하고 감당할 생각마저 있었다.
차라리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마저 있었으니까.
뭐든 좋으니까 평소처럼 농담으로 넘겨주었으면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웃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냥 나 좀 편하게 해 주면 안 돼?”
그러나 아나스타샤의 칼날처럼 예리했던 승부욕은 지금 굉장히 무뎌져 있었다.
예리하게 갈아두었지만 한 번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녹이 슬어버린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할 말을 잃고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나스타샤는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이 이상 말해서 스스로를 더욱 경멸했으면 좋겠니?”
“……아나스타샤.”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편하게 해 달란 그녀의 말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빨리 에르네스트가 선택을 내려 달란 뜻이고, 또 하나는 그 후 타티아나의 태도와 방향성을 봐야 아나스타샤도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단 뜻이었다.
전략적인가 싶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수동적인 태도였다.
아나스타샤도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는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작년만 해도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아니, 심지어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랬다.
아나스타샤는 몇 번이고 에르네스트와 경쟁관계임을 이야기하며 경고해 왔다.
잠시 생각하던 에르네스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멋지다고 생각했어.”
시선을 피하던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놀란 표정이다.
에르네스트는 조금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던 이야기를 마저 이어 나갔다.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가장 공정한 부분을 찾아서, 그리 큰 의미가 없더라도 어쨌든 간에 승부를 보겠다고 했던 게…… 난 그게 마음에 들더라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피아노가 뭐 어쨌다고 자존감의 지표로 삼고 대결의 척도로 삼는가? 정말 좋아한다면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어야 했다.
여러 방법으로 서로를 방해하고 유리한 일만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에르네스트는 몇 명만이 가능한 방식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때문에 어려운 방식일지라도 어울려 주었다.
“그런데 이젠 하기 싫어?”
“…….”
“내가 알아버려서?”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에르네스트를 떠밀게 된 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말없이 있던 그녀는 고개를 젓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에르네스트. 넌 지금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대결하자고 하길 기다리나 본데.”
그녀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리고 빙그르르 원을 그린다.
다른 손으론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아나스타샤가 이어 말했다.
“네가 안 순간부터 대결은 시작된 지 오래야.”
“……뭐?”
“그리고 난 타티아나의 옆에서 그 애가 누구 손을 들어주는지 계속 지켜봤고.”
두 사람 사이엔 큰 인식적 차이가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스스로의 준비도 안 되었음을 느끼며 언젠가의 때를 기다렸던 것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쭉 지켜보면서 승점을 매겨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나스타샤는 훨씬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예전엔 자신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에르네스트와 승부를 매듭짓는 것으로 약간의 계기를 필요로 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가 테이블 위에 지그재그로 손을 그었다.
“세 명이 한 음악을 연주할 땐 듀엣 사이에 끼어들어 고립된 기분을 느꼈지.”
“…….”
“네가 의도한 게 아니란 건 알아. 그런데 난 그렇게 느낀다고.”
에르네스트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면 이번 연주회에 그녀를 끌어들인 건 정말 그녀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절망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그녀가 화를 냈던 건 단순히 자신을 실력이 아닌 인맥으로 끌어들여서뿐이 아니라, 이렇게 되리란 걸 어렴풋이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실수한 거야?
이미 그녀가 화를 낸 시점에서 실수한 것은 명백했고, 그 후엔 어쩔 수 없으니 잘 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였지만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아나스타샤는 이미 심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에르네스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아나스타샤. 그냥 말하지그래.”
“…….”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타티아나는 이해하지 않으려 하거나 피해 버리려고 할 사람은 아니다. 그건 아나스타샤가 더 잘 아는 일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몇 개나 되는 굴레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묵하고 있었다.
사회적인 굴레 따위는 그녀를 이렇게까지 속박하지 못한다.
아나스타샤를 이렇게 굳어 버리게 만든 건 어떠한 트라우마의 얽힘과 비슷한 것같이 느껴졌다.
하나 예상되는 게 있긴 했다.
“하나만 물어볼게. 혹시 그 애가 올 봄에 쓰러졌던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타티아나의 위클리 기념 파티를 했을 때, 쇼팽 소나타 1번을 연주했던 타티아나는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때 마지막까지 타티아나가 기대어 있었던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때 단지 그녀가 잠깐 잠들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아나스타샤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있었고, 나중에 타티아나가 깨어나지 않자 가장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자기 어깨 위에서 친구가 혼수상태에 빠진 일은 정말 트라우마로 느낄 법도 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뿐이겠니?”
에르네스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보다 아나스타샤는 훨씬 예민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지금 에르네스트와 바로 맞붙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 있는 것 또한 이유 없이 그러진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금까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그건 그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말없이 두 사람은 상념에 잠겼다. 직원이 차를 가져다준 후에도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차 식겠다.”
괜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아나스타샤가 말했다.
그녀는 앞서 이야기는 신경 쓰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그제야 두 사람은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찻물이 목을 축이고 내려간다.
차가 나왔으니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아나스타샤가 손가락을 세워서 테이블을 쿡 찔렀다. 힘없이 건드리던 것과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연주회는 잘 될 거야. 내가 꼭 그렇게 되도록 할 테니까.”
“그래.”
아나스타샤가 어떤 기분으로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다고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더 이상 자존심 상하지 않고 싶어 한다는 것 정도는 이해했다.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얼마 남지 않은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