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1화
두 사람을 내려 주고 모스크바의 도로를 달려 집으로 향하는 길.
그사이 도시는 어둑어둑해지고 가로등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꽤나 두터웠다.
평일엔 늘 교복만 입는 편인 나는 이렇게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계절을 느끼기도 했다.
저번 주와 비교하면 날씨가 갑자기 차가워진 것 같긴 하다.
점점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멍하니 거리와 가로등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난 가방 속에서 태블릿 컴퓨터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지금까지 가을 연주회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한 회의 자료와 데이터 등이 담겨 있었다.
알렉산드라가 보내 준 스케줄표를 다시 훑어보고 큐시트를 확인하면서, 난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2주 전만 해도 윤곽도 없던 연주회는 이제 또렷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첫 단추인 에르네스트의 서곡을 시작으로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피아노 퀸텟과 여러 연주가 1부를 이룰 테고, 그다음 2부는 헝가리 광시곡을 필두로 한 음악적 연계가 피날레까지 이끌 예정이다.
잠깐 사이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선율들 중에서 내 신경에 살짝 걸리는 것도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실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앞서나가고 있어서 그 균형을 맞추려면 나와 에르네스트가 신경 써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해 보니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아나스타샤가 자신의 파트에 욕심을 내더라도 우린 충분히 그녀의 옆을 따라 지킬 수 있었다.
몇 회에 걸친 리허설로 연주곡들의 완성도는 확인했다. 지금부턴 더더욱 날카롭게 만들어 나가면 된다.
“……”
오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연주회가 성공한 것처럼 고양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준비한 연주회가 잘 안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계속 준비는 해야 하니까 머리가 아프고 신경 쓸 것도 많긴 하지만,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가 성공을 향해 제대로 방향을 잡고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결과를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차라리 눈을 감았다 뜨면 연주회 당일 아침이었으면 하다가도, 시간이 주어질수록 점점 더 높은 수준으로 향하는 우리 음악을 보면 단 몇 주라도 시간이 더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연주회가 가까운 게 나을지 먼 게 나을지 생각하다가 그만 혼자서 웃어 버렸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한지 새삼 실감이 든다.
주어진 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난 다만 최선을 다해서 그 시간 안에 끌어낼 수 있는 완전함을 실현할 뿐이다.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에르네스트는 이번 곡으로 확실히 작곡가로서 유명세를 얻을 수 있을까.
“…….”
태블릿 컴퓨터의 화면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살짝 어지러워졌다.
차 안에서 도표나 활자를 너무 많이 읽은 탓이었다.
고개를 드니 진짜로 눈앞이 핑그르르 돈다.
잠깐 눈을 감고는 약간 피곤해져서 가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한 통의 전화가 날 다시 눈뜨게 했다.
혹시 아나스타샤인가 싶었는데, 화면엔 예카테리나의 이름이 떠 있었다. 예상외이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예카테리나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 안녕, 갑자기 전화 괜찮아?
“예, 괜찮아요. 지금 차 안이에요.”
- 차? 지금 거기 몇 신데?
“7시경이에요. 연주회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서요.”
- 오늘도 했나 보네.
조금 커진 목소리로 예카테리나가 말했다.
SNS를 자주 하면서 이젠 아나스타샤와 친하기도 하고, 가끔 나와 연락을 주고받는 예카테리나는 자연스레 나와 에르네스트,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가을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되면 보러 오겠다고 했었는데, 예카테리나는 미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게…… 내가 이번 투어 중 스케줄을 아무리 봐도 그날 모스크바에 돌아가긴 어렵겠더라고. 어쩜 그렇게 딱 날짜가 안 맞는지 몰라.
시간이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우승자로서 전 세계 투어 갈라 콘서트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수상자들과 함께 전 세계 몇 군데나 되는 나라들을 돌며 콘서트를 하는 기획이니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할진 안 봐도 알만했다.
다만 그사이 모스크바에도 몇 번 왔다 갔다 하니까 혹시 시간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었던 건데, 지금 보니 그렇게 상황이 잘 맞아떨어지진 않았던 것 같다.
난 가볍게 웃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예카테리나가 자기 일로 바쁘다는 건 기쁜 일이기도 하니까.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괜찮아요.”
- 네가 괜찮은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안 괜찮아!
“어…… 예?”
그녀가 너무 미안해하거나 하진 않았으면 해서 되도록 가볍게 넘기고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예카테리나 쪽에서 갑자기 역정을 냈다.
나도 모르게 맹한 소리로 되묻자 예카테리나는 빠르게 이야기했다.
- 내가 너랑 다른 애들 실황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번엔 마침 모스크바인데도 못 보다니. 이건 말도 안 돼.
“아하하…… 그, 방송으로도 중계해 준다고 하니까……”
- 실황이 중요한 거라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전부터 예카테리나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무대에서의 내 실황 연주를 청중석에서 듣고 싶어 했었다.
스피커로 듣는 음향으론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을 때도 못 보고, 이번에도 안 되게 생겼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우승자면 피아노 세계에서의 최고 실력자 반열에 들었다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원하는 연주회 하나 마음대로 못 본다는 데에 화가 난 것 같았다.
‘세상일이 쉽지가 않죠. 예카테리나.’
그냥 적당히 달래 줄까 싶었는데 그랬다가 역효과를 부르면 어쩌나 싶어 주저하는 사이, 예카테리나는 금세 알아서 진정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괜히 한 번 그랬던 것 같다.
- 그냥 억지 좀 부려 봤어.
“후후, 그래도 연주회 오고 싶으셨단 건 진심이시죠?”
- 억울해. 장난 아니야 정말.
“고마워요.”
느닷없이 화를 내서 놀라긴 했지만 그만큼 진심인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건 반대로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나 역시 지금 아쉽게 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저야말로 예카테리나의 투어 갈라 콘서트 보고 싶었어요.”
- 콩쿠르 때랑 별반 차이 없는 레퍼토리인데 뭐 하러? 넌 쭉 와서 봐 줬었잖아.
에카테리나는 극구 사양하듯 말했다.
그래도 요 몇 달 동안이라도 예카테리나가 분명 더 발전했을 것을 아는 난 그녀의 최근 연주를 전혀 못 들어 본 게 아쉬웠는데, 예카테리나는 그건 잠시 미뤄둬도 괜찮다는 것 같았다.
- 지금까지도 고마워.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나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많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예카테리나가 이어 말했다.
- 이번엔 시간이 안 맞게 되었지만 다음엔 꼭 맞았으면 좋겠네.
“그러네요.”
- 다른 애들한테도 내가 메시지 할게. 음, 가을 연주회 잘 준비하고…… 잘해. 뭐 너랑 에르네스트라면 분명 잘 할 테지만.
아나스타샤는 퀸텟 멤버에 속하니 일단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에르네스트 쪽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 세 명이 함께 연주해야 하는 곡도 있지만 난 굳이 연주회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중요한 건 예카테리나가 날 응원해 준 것이니까.
난 그 응원을 받고, 내 응원도 예카테리나에게 돌려주었다.
“예카테리나도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실력을 보여주고 오세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우승자로서.”
- 그렇게 말하면 나 부담 생겨…….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웃으며 이야기하자 예카테리나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못살게 굴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난 더더욱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예카테리나는 무대 위에서 정말 강한 사람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어떤 세상에서라든지 예카테리나의 강력한 음악은 통용될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녀를 좋아해 주겠지. 난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서로 짧은 안부와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전화를 끊었다.
서로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함께 하고 있다는 동질감은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
빙그레 웃으며 스마트폰을 보던 나는 문득 예카테리나 외에 다른 올 만한 사람들은 또 누가 있는가 다시 확인해 보았다.
우선 아버지와 루슬란 오빠는 다음 주부터 북해 쪽으로 출장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연주회엔 오지 못하신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혼자서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까운 사람들로 보자면 발렌티나나 리처드, 한승우 등과 라리사, 바르바라 같은 반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연주회에 초대하는 것도 일정과 드레스코드 등을 요구하는 부담이 있기에 먼저 관심을 보이거나 오겠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일부러 앞서 초청하진 않는 편이다.
그리고 이번엔 나뿐만이 아니라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도 연주회의 주역으로 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내가 직접적으로 티켓을 건넨 건 미하일 선생님과 마카로프 프로듀서, 류보비, 아나톨리. 그리고 샬롯 정도였다.
사실 초대할 사람들은 거의 다 초대한 것 같다.
그래도 티켓이 아직 몇 장 남았는데 다시 알렉산드라에게 돌려주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구 더 줄 사람 없나 싶어 주소록을 살펴보았다.
내 개인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는 그사이 꽤 많이 늘어나 있었다.
상트 챔버 오케스트라의 사람들이나 연말 음악회에서 만났던 연주자들, 리빈스크 시립 오케스트라와 퍼시픽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단원들.
대부분이 사적으로 친한 친구라기보단 일적으로 만난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큼 많아졌다는 건 그만큼 내 저변이 넓어져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간적으로도 연주자로서도.
그 이름들을 하나씩 보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던 나는, 중간에 한 이름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임세연의 전화번호는 내 주소록의 그 어떤 카테고리에서 속하지 않는 특별한 번호였다.
같은 피아노 연주자이긴 하지만 동료애 등을 느끼긴 어렵고, 그렇다 하여 친구로 여기고 가까이 대할 수도 없다.
어찌 보면 친구 이상으로 가까울 수도 있는 존재였지만, 난 그만큼 뻔뻔하진 못했다.
‘지금은 자고 있으려나.’
뻔뻔하게 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난 나도 모르게 시간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가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했다.
괜히 그녀와 나누었던 메시지들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신경을 쓰지 않을 거면 그냥 신경 쓰지 말든가.
그렇게 스스로도 모를 감정에 휩쓸려서 세연과의 지난 기억들을 돌이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아까 예카테리나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도 놀랐는데, 이번엔 진짜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것이 있어서 그런지 회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받지 않아 버리면 세연이 혹여나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서, 난 전화벨에 맞추어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화면을 눌렀다.
- 좋은 아침이에요. 타티아나.
“……?”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지금 여긴 저녁 7시다.
그리고 세연은 한밤중일 테고. 어디를 기준으로 아침이라는 걸까.
당황해서 시간을 앞뒤로 재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러시아어가 서툴러서 한 말이라 생각하며 인사를 받았다.
“전화는 오랜만이네요. 러시아어로 대화할까요?”
- 미안…… 영어로 하면 안 될까요?
“좋아요.”
서툰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바뀌니 한결 대화가 낫다. 난 조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전화는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나요?}
- {응. 좋았어. 그쪽은 어때?}
{저도 그래요.}
- {지금 아침 7시 맞지? 학교 가기 전에 전화해서 미안해.}
혹시 러시아어가 서툴었나 했는데 그냥 시간을 헷갈린 모양이다.
{저녁 7시예요.}
- {어……?}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전화를 귀에서 떼고 무언가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난다. 한참 후에야 세연은 투덜거렸다.
- {아, 또 헷갈렸나 봐. 진짜. 저번에 했던 시간이 기억나는데도 맨날 헷갈려.}
{그럴 수도 있죠. 저도 그런걸요.}
-{그럼 아까 전화할 걸 그랬네. 괜히 기다렸어…….}
내 쪽이 새벽인 줄 알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기다린 사이에 꽤 고민이 많았는지 세연의 목소리는 여러모로 편하게만 느껴지진 않았다.
무슨 일인 걸까. 난 괜히 에둘러 말할 것 없이 본론을 묻기로 했다.
{전화는 그런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 {아, 연주회 관련해서.}
세연 역시 곧바로 본론을 꺼내온다.
- {나 네 연주회 보러 가려고 해. 미리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