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02화 (802/1,277)

##  802화

종종 느끼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만약 모스크바에 사는 친구가 연주회를 보러 오겠다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라면 고민할 것 없이 기뻐할 수 있었을 테다.

마침 티켓도 남았으니 꼭 와서 봐 주면 고맙겠다고 감사를 표했겠지.

하지만 세연은 모스크바에서 6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곳에 산다.

저번 겨울 내 독주회에 세연을 초대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어쩌다가 한 번 있는 일로 그쳐야 했다.

세연의 호기심에 편승하여 나 역시 그녀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 후 세연은 블라디보스토크에도 와서 연주회를 관람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또 연주회에 오겠다 하고 있었다.

세연이 내 음악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안다.

그리고 아주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건 음악가로서 정말 훌륭한 자세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보이는 적극성은 균형을 넘어서서 지나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숨소리가 조금 당혹스러움을 띠더니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 될까?}

애초에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만 보더라도 이 방문을 내가 조금 부담스럽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건 세연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내가 대놓고 난색을 표한다면 그녀도 바로 알아듣고 물러날 테지. 그런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내 자의로 그녀에게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여전히 난 내게 그럴 권리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 자체가 어렵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기도 해서 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부터 풀어나가 볼 생각이다.

{학기 중이지 않나요? 일정이 어려울 거라 생각되는데요.}

- {그렇긴 해. 중간고사 기간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저번 1학기 땐 기말고사에서 애 좀 먹었거든. 부모님이랑 선생님들의 반대가 좀 있었어.}

지난 6월에도 세연은 덜컥 모스크바에 일주일이나 와 있었다. 그녀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예술고가 아닌 일반고였다.

그녀가 포트워스 청소년 콩쿠르 2등이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제멋대로 할 수는 없었다.

학기 중 해외 연주회 관람은 1년에 한 번이면 되었지, 두 번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어른들의 입장에선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지만 세연은 그런 현실적인 문제 같은 건 이미 모두 해결한 뒤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 {하지만 교수님께서 우리 부모님이랑 학교에 대신 허락을 받아 주셨어.}

{교수님이?}

- {응. 네가 에르네스트와 아나스타샤, 그 애들과 같이 연주회를 한다는 걸 아시고는 바로 내게 가 봐도 좋다고 하시더라고.}

교수님이 보증하여 말씀하신다면 아마 뭐든 쉬웠겠지.

그런데 교수님이 연주회 관람이 세연에게 확실히 도움이 되리라 보증하셨다는 말인즉슨, 내 연주에 대해서도 역시 보증하셨단 뜻이었다.

- {중간고사 같은 것보단 네 연주 한 번 보고 오는 게 백 배는 나을 거래.}

세연이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얻어내었는지 알게 된 나는 순수히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이 기쁨마저도 경계해야 할지 약간 혼란스러웠다.

교수님이 그 정도로 내 연주를 높게 평가하실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세연을 학기 중에 또 멀리 보낼 정도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과하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난 두 사제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나에 대한 오해나 잘못된 문제가 있나 걱정되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럼 교수님의 추천이셨나 보네요.}

- {아니?}

{예?}

- {애초에 네 연주회 이야기를 전한 게 난데? 그다음엔 은근히 부추겼지.}

{부, 부추겨요?}

저번엔 교수님에게 숨기고 왔었는데, 이번엔 아예 제일 먼저 교수님을 설득한 모양이다.

해맑게 부추겼다는 말을 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성격 좋음과 수완을 칭찬해야 하나 싶다.

내가 놀란 소리를 내자 세연은 웃으며 말했다.

- {블라디보스토크 이후로 실력도 엄청나게 늘었거든.}

결국 세연이 모두를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실력 덕분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교수님에게 증명해 낸 모양이다.

스스로 엄청나게라고 할 정도면 어느 정도인 걸까. 내가 어렴풋이 가늠하는 와중, 세연은 내게 감사를 표했다.

- {마지막에 내 부탁까지 모두 들어준 네 덕분이야.}

난 그녀가 말하는 순간을 떠올렸다.

저번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마지막 날. 세연은 내게 쇼팽의 독주곡을 연주해 주길 요구했다.

그건 어떠한 기술적인 해법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음색과 해석을 바랐던 요구였다. 그걸 알면서도 난 그녀에게 연주를 해 주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소화해냈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났다.

{그 연주가 도움이 되었나요?}

- {물론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묻고 싶다.

세연에겐 세연만의 음악이 구축되어 있다.

그건 그녀와 교수님 사이에서의 약속이자 정체성이다. 결코 그 사이에 내 존재가 자리잡아선 안 된다.

내가 그녀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피아노 연주자로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저변을 살짝 엿보여 주는 것이나 어려운 레퍼런스 등에 대한 힌트, 혹은 기술적인 노하우의 시연 등이었다.

보편적으로 전해 줄 수 있는 것들. 그런 부분이 만약 세연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다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음색을 너무 닮아가는 것은 안 된다.

죄인된 나는 그런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만 되진 않겠지…….’

물론 세연은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연주자로서 모든 기술과 음악성 등을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무척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누군가를 무작정 따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나아가는 성향을 갖춘 연주자인 것이다.

그걸 알았기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나도 그녀를 믿고 연주를 했던 것이고.

그러니 내가 음악을 조금 들려준다고 해서 세연에게 어떤 영향이 갈까 두려워하는 건 그야말로 자의식과잉이기도 하고 그녀를 피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의 발로이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 하여 그녀를 완전히 믿고 내 음악을 마음대로 뿌려 놓을 순 없었다.

음악은 마치 물처럼 스며들기도 하니까. 되도록 적게 보이는 쪽이 좋다.

어디까지가 걱정이고 어디까지가 핑계인진 나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세연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다.

교수님이 자랑스러워할 제자로 임세연이 성장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제일 바라는 미래에 가까웠다.

“…….”

일단은 세연의 음악을 확인해 봐야겠다.

그녀가 스피커로 내 음악을 듣는 것으론 안 되니 같은 공간에서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 역시 세연의 음악이 어떻게 공기를 울리는지 들어 봐야 판단이 설 것 같았다.

‘이 아이를 더 멀리할지에 대해선…… 그 후에 결정하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자 되레 목소리가 편안하게 나왔다.

생각하던 것들을 더 고르고 걸러내지 않고 그대로 말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멀리서 와 주신다는 데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조금은 걱정이기도 해요. 비용도 많이 들고요.}

-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내가 가고 싶은 거니까.}

{만약 비용 문제를 제가 해결해 드…….}

- {아냐! 그럼 내가 억지를 써서 나 좋은 일만 하는 게 되잖아?}

세연은 부자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얻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난 그 마음도 이해했다.

오로지 연주회를 보고 싶을 뿐인데, 그 목적성이 흐릿해지고 내가 오해라도 한다면 그녀가 그리 바라는 상황은 아닐 테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 세연은 쿨하게 덧붙였다.

- {나 돈 많아. 그러니까 괜찮아.}

난데없는 플렉스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영어로 말해 놓고 나니 그게 어떻게 들리는지 깨달은 세연 역시 나 못지않게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해 댔다.

- {음, 타티아나 네가 이런 말 들으면 웃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

- {왜 말이 없어? 진짜 비웃는 건 아니지?}

실제로 웃고 있긴 했지만 이건 귀여워서였다.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쓸 돈이 많긴 어렵겠지. 아마 세연이 돈이 많다고 한 건 콩쿠르에서 받은 상금 등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온전히 세연의 능력이고 대단한 일이다. 난 진심으로 감탄하며 칭찬해 주었다.

- {그렇지 않아요.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마워…….}

어쩐지 목소리가 조금 시무룩하다.

세연은 아마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한도가 없는 카드를 마음껏 쓰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전부 내 상금과 음반 판매금, 연주회 개런티 등으로 내고 있다.

물론 내 곁에 있는 경호원 등 내게 투자되는 모든 비용들은 어마어마하겠지만…… 연주자로서만 놓고 본다면 나도 음악 활동을 하며 생활한다는 건 같았다.

이번에 받은 티켓도 연주자로서 받은 것이고.

- {그렇다면 티켓은 제가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몇 장 필요하신가요?}

- {응? 나 혼자 갈 건데.}

{알겠어요. 한 장 준비할게요.}

- {벌써 예매했는데?}

{그건 취소하세요. 더 좋은 자리로 드릴 테니.}

세연은 어지간해선 내게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은 것 같았지만 좋은 자리라는 데엔 솔깃한 것 같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밝게 말했다.

- {좋은 자리라면 거절할 수가 없네…….}

{잘 되었네요.}

- {그건 고맙게 받을게.}

그렇게 티켓을 전해 주기로 하고, 그녀는 연주회에 찾아오겠다는 목적도 다 알렸으니 이제 할 이야기는 별로 없었다.

무언가 있다 하더라도 며칠 후에 만날 거라 생각하니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세연은 낮게 웃더니 슬슬 끊을 준비를 했다.

- {아무튼 음, 그럼 며칠 이따가 또 전화할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준비 열심히 해.}

{알았어요.}

- {이만 끊을게. 자야겠어.}

그리고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그녀 쪽에서 먼저 전화가 툭 끊어졌다.

“…….”

난 어둑한 차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이뿐만이 아니라 집에 초대하여 묵게 하면서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도록 하고 싶었다.

어지간한 호텔보단 아마 우리 저택의 손님방이 훨씬 좋을 테니까.

실제로 난 예카테리나를 초대해서 그렇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연은 쉽게 초대하겠다 할 수 없었다.

그건 세연이 특별히 더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 쪽에서 느끼는 민감한 거리감 문제 때문이었다.

가까이 두면 둘수록 사람을 친밀하게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난 혹시나 세연을 가까이에서 대하면서 마치 나와 깊은 연관이 있고, 꼭 내가 무언가 해 주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될까 봐. 그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왜냐하면 내가 해 주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여긴 다음으론 내게 무언가 이루어 보여 주어야 할 사람처럼 대하게 될 테니까.

그런 이기심과 욕심은 어느 순간 폭발하지 않는다.

단계를 거쳐 천천히 나와 세연 사이를 묶어두고 날 점점 더 심한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겠지.

내가 이런 것을 걱정하는 건 세연을 보는 내 기분이 마냥 담백하지만은 않은 까닭이었다.

‘생각을 멈추면 안 돼.’

아무 생각 없이 세연을 대하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더 가까워져 버릴 것 같다.

그녀는 행동력이 무척이나 좋은 편이라서 거리가 이렇게나 먼데도 쉽게 내 근처에 다가와 버리고, 심지어 우린 음악적 이해가 잘 맞는 편이니까, 그건 정말 한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난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되도록 끊을 생각이었다.

이번에 연주회 관람을 위해 찾아오는 일은 나 역시 그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하는 계기로 사용할 뿐이다.

만약 스스로의 개성에 잘 녹여 내었다면 성장을 축하해 주고, 내 영향력이 너무 과하게 느껴진다면 보다 거리를 둔다. 그 가늠을 위해 필요한 만남이다.

“나 정말 나쁜 사람인 것 같아…….”

중얼거리면서 손으로 눈앞을 감쌌다.

지금 세연을 대하는 태도는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난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늘 고민하고 어렵게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도 종종 이게 정말 잘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뭔가 실수하셨습니까? 아가씨.”

혼잣말을 들었는지 빅토르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이 보이진 않지만 가득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힘껏 도와주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가 지금까지 아주 잘못하고 있었던 건 아니란 생각이 조금은 든다.

내가 한 실수는 혼잣말로 그를 걱정시킨 것뿐이다.

기운을 내야지.

최선을 목표로 삼고 노력한다면 아무리 망쳐도 최악이 되진 않을 테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렇습니까?”

빅토르는 더 캐묻지 않고 다시 앞쪽을 바라본다. 난 앞으로도 입을 열 때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주회의 준비가 너무나 잘 되고 있어서 의욕에 차 있었는데, 그 의욕에 기름을 더 부은 기분이었다.

정말 잘 해내야 할 이유는 여러 곳에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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