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3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떼고 숨을 가다듬었다.
연주자의 호흡 패턴이나 심박수도 연주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마지막 피날레는 숨을 참고 집중해서 휩쓸어 내리는 쪽이 역시 조금 더 와닿게 표현되는 것 같다.
나는 방금 했던 연주와 몸의 반응을 돌이켜 보면서 머릿속에 정리했다.
나중에 다른 자리에서 내가 같은 곡을 연주했을 때 똑같은 방식으로 내 몸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완전히 잔향이 사라진 후, 고개를 들고 옆을 바라보았다.
미하일 선생님은 옅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나보다 나은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요.”
난 당황해서 손사래부터 쳤다.
이번 연주회 무대에 올릴 곡들에 내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있다고 해도 분명 빈틈은 존재한다.
미하일 선생님께 꾸준히 레슨을 받는 건 내가 미처 혼자서 알 수 없는 그런 빈틈들을 보완하기 위해서였고.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미하일 선생님의 지도에 의문을 가지거나 내가 낫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건 선생님이 늘 합리적이고 가능한 지도를 우선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깔끔한 레슨을 해 주시던 미하일 선생님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실 줄은 몰랐다.
더듬거리면서 손으로 의자를 짚었다가, 눈도 어딜 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우왕좌왕하는 사이 미하일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펼쳤다.
“왜 부정부터 하는 거지? 타티아나. 내가 피아니스트로서 보다 오랜 시간 활동했다고 해서 네 모든 레퍼토리를 전부 연주할 줄 아는 건 아니란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중앙음악학교의 음악교사로서 미하일 선생님은 정말 폭넓은 레퍼토리를 능숙하게 연주하시는 분이지만, 세상 모든 곡을 섭렵하신 건 아니었다.
때문에 선생님의 레슨은 일반적으로 선생님이 잘 아는 레퍼토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번 학기 들어서 난 정말 다양한 시대에 걸친 곡들을 마구 건너뛰며 연습했었는데, 그건 전부 미하일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곡들이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연주회 내부적으로 선곡된 곡들은 선생님이 미처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님은 보면대 위의 악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몇 번 넘기며 말씀하셨다.
“네가 곡을 가지고 왔을 때부터 나도 수업 연구를 시작했으니까…… 우린 같은 기간 동안 곡을 연구했다고 할 수 있겠지.”
선생님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곡을 가지고 가서 레슨을 부탁드리면 하실 수 있는 대답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레슨을 포기하거나, 다른 하나는 같은 기간 내에 학생보다 몇 걸음 앞서 빠르게 곡을 연구해서 힌트를 전수해 주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음악을 다루어 온 음악가들은 새로운 곡을 접해도 빠른 시간 안에 익히고 완성시킨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올린 노하우와 기술은 어느 상황에서나 유효했다.
미하일 선생님은 곡을 살펴보고 내게 필요한 부분을 레슨해 주시는 방법을 택하셨고, 지금까지 이어진 몇 번의 레슨에서 난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르침을 받다 보면 내가 음악가로서 얼마나 시야가 좁고 모자란지 몇 번이나 깨닫게 된다.
그런 내가 선생님보다 낫다는 말을 듣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사이 선생님이 제게 레슨해 주신 부분이 훨씬 많아요.”
하지만 미하일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처음엔 그랬겠지. 내 눈에 보이는 게 조금이나마 더 많았을 테니까. 하지만 넌 그 차이를 흡수해서 순식간에 좁혀 버렸고.”
선생님은 악보에서 읽어낸 보다 많은 정보를 내게 이해하기 쉽도록 전달해 주셨다.
내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고 있으니 차이가 좁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내가 연주의 완성도를 확 끌어 올린 이유를 미하일 선생님은 정확하게 짚어 주셨다.
“에르네스트와 연주를 하면서 몇 번이나 실재화시키며 완성해 버렸지. 이제 내가 따라가긴 어렵겠는데.”
미하일 선생님은 동등한 위치에서 음악을 교류하고 합주를 이어 나갈 파트너가 없다.
레슨을 해 주시더라도 나와 같은 파트를 연주하시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내겐 에르네스트가 있었고 그와 음악을 두어 번 주고받다 보면 서로의 빈틈과 방향성을 찾기 너무나 수월했다.
덕분에 내 음악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미하일 선생님은 이쯤 하면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약간 먹먹한 기분이 들어서 올려다보자 선생님이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이건 현실적인 이야기니까 집중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내가 어리광부리듯 군다는 건 선생님도 잘 아시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집중하자 선생님은 정말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의 중심으로 날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지. 이 곡의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널 맡기든가, 아니면 이젠 네가 에르네스트와 이 곡의 전문가가 되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건…….”
“전자를 택하기엔 시간이 없을 것 같지?”
특정 연주자나 곡의 스페셜리스트라 칭하는 연주자들이 몇 있긴 하지만, 세상 모든 곡에 다 붙어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듀엣 곡이라면 더더욱 찾기 어렵고.
이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우리가 자립하는 수밖에 없다.
“레슨은 여기까지 하자. 다음은 무대에서 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이야기를 마치고 미하일 선생님은 일어나선 전기 포트가 있는 곳으로 향하셨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차를 한 잔씩 더 타선, 내게 건네주셨다.
희미한 향이 감도는 캐모마일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따뜻함이 뻐근하게 굳어 있던 목을 풀어준다.
“…….”
선생님이 이 곡에 한해선 자신보다 낫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하신 터라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서운 기분도 들었지만, 사실 이전에도 선생님은 연주회가 가까워져 오면 레슨을 중단하곤 하셨다.
그다음부턴 내가 해결해야 할 영역이란 뜻이었다.
그건 마냥 두려워하고 거부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선생님이 그만큼 날 믿고 맡기려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내가 할 일은 그 믿음에 충분히 부응하는 것뿐이었다.
차를 마시며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조금 편안해졌다. 미하일 선생님도 찻잔을 흔들거리며 웃었다.
“슬슬 네가 10학년이라는 실감이 나는구나. 하하하. 이제 1년 남은 건가.”
“2년이에요.”
“응?”
“이제 막 학기가 시작했으니까, 1년이 꼬박 남았잖아요? 그리고 11학년까지. 2년이죠.”
“하하, 그렇구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아노를 내려다보시더니 곧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널 처음 이곳에 데리고 왔을 땐…… 3년만 더, 아니, 2년만 더 일찍 데리고 왔으면 어땠을까 여러 번 생각했었단다. 조금 더 어릴 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땐 피아노에 관심이 없었던 때라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나 역시 같았다.
나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가볍게 웃으며 찻잔을 들자 선생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하지만 지금 보니 만약 그랬다면 한참이나 어릴 때 모스크바 음악원에 조기진학을 보냈겠구나.”
“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그 부분에 대해서 넌 흔들림이 없지. 타티아나. 사실 지금 당장에 진학해도 하등 모자람이 없거늘.”
그 부분에 대해서 미하일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방침을 고수하셨지만, 그 속내는 내가 보다 고등 교육기관에 들어가길 바라셨겠지 싶다.
평소에도 선생님은 다른 많은 교육자들을 만나서 다양한 교육을 받길 권하는 분이셨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난 스스로 이곳에 남았다.
“그래서 제가 잘못하고 있나요?”
장난스레 묻자 미하일 선생님은 멈칫하며 날 바라보더니 곧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아니, 고맙구나.”
“후후후. 역시 그렇죠?”
내가 이곳에 남아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면 미하일 선생님은 실망하고 후회하셨겠지.
그 때문이라도 난 더더욱 열심히 스스로를 개선해 나가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잔뜩 배웠다.
아르카디 교수님처럼 고등교육기관에서 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 게 어떻느냐고 하시는 분도 계셨지만, 이곳의 선생님들도 전부 음악대학을 나오시고 최소 수십 년간 음악가로 활동하신 분들이다.
그런 분들에게서 단지 몇 년 배웠다고 다 배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타티아나, 널 보고 있자면…… 난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저야말로요. 전부 제가 선생님 옆에 남아 있는 덕분이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척이나 기쁘구나.”
선생님은 낮게 웃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는 책상 쪽에 걸터앉으셨다.
“앞으로 연주회까진 터치하지 않으마. 레슨에 올 필요 없다.”
“예.”
“구세프에게도 말해 두마. 위클리는 이미 처리된 걸로 알고…… 과제에 관해서도 필요하다면 내게 이야기하거라. 처리해 줄 테니.”
“감사합니다.”
연주회를 하게 되면 학교에서도 여러모로 편의를 봐 주긴 하지만 선생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면 한결 운신의 자유가 넓어진다. 시간을 쓰기에도 용이하고.
짧은 몇 마디면 충분했다.
나와 선생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빙그레 웃어 보였고 그것으로 선생님과의 연주회 준비는 끝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말없이 손을 흔들어 주셨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까지 선생님에게 인정받은 곡이라면 내가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잘못되지 않는다.
그 점을 자각하자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어제 세연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서 나는 정말 후회 없는 연주를 해야겠단 의욕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 미하일 선생님의 마지막 레슨은 그 의욕에 자신감을 덧붙여 주었다.
“…….”
난 잠시 레슨실의 문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선생님에겐 없었던 지금 내 강력한 무기. 에르네스트와의 듀엣 연습이 바로 잡혀 있다. 아마 지금은 이미 혼자 연습 중이겠지.
처음엔 소리를 내며 복도를 차던 발소리는 연습실이 가까워질수록 점차 잦아들었다.
혹시나 에르네스트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서 살금살금 연습실 앞까지 다다랐다.
문득 저번 점심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올리거 리보비치의 신곡을 편곡해서 연주해 보다가 나와 마주치고는 무척 당황했었지.
사실 나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에르네스트는 우리가 지금 집중해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선을 넘지 않으려고 굉장히 노력 중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모른 체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어렵다.
‘그만큼 결과를 내야겠지…….’
어렵고 복잡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흔들려서 내야 할 결과를 망친다면 그만큼 우리 사이는 안 좋아지고 말 테지.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난 지금은 시치미를 뚝 떼고 에르네스트를 대하며 무대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으며 연습실 앞에 섰다. 안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에 없는 걸까?
가볍게 노크를 두어 번 하고 들어서니 에르네스트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려고 해서 자는 것이 아니라는 건 손에 쥔 펜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무언가 하다가 햇살에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
요즘 들어 자주 조네.
작곡이 마무리되어서 이젠 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나 싶었는데, 어찌 그대로인 것 같다.
에르네스트는 자신이 쓸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전부 음악에 쏟아넣고 있었다.
그냥 자게 두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싶다.
피곤할 그가 잠깐 조는 걸 방해하고 싶지도 않았고, 나도 잠시나마 평안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저번에 아침에 그가 조는 걸 봤을 땐 깨우지 않고 사진도 찍어 보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장난을 치면 안 될 것 같다. 그가 일어난 다음 내가 깨우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걸 알면 당황할지도 모른다.
내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더라도 그건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고 싶진 않았다.
난 천천히 다가가선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정말 닿을 듯 말 듯 할 정도로 가볍게 터치했는데도 그는 금방 눈을 떴다.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저 왔어요.”
에르네스트는 날 올려다보더니 곧 졸고 있었던 게 창피한지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의자에 다시 똑바로 앉았다.
난 그가 잠을 깰 수 있도록 약간 떨어져 내가 맡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한참 동안 우린 말없이 그렇게 서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에르네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굳이 사과까지?
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간밤에도 별로 못 주무신 건가요?”
“조금.”
“작곡도 다 마치셨는데. 컨디션 관리하셔야죠.”
“그건 그런데…….”
에르네스트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듯 머리 옆을 꾹 눌렀다.
아무리 신경 쓸 일이 많다 하더라도 그는 작곡가가 아니라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는 만큼 이젠 정말 몸 상태에 신경 써야 할 때였다.
물론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이니 크게 걱정하진 않지만…… 지금은 딱 한마디쯤 해도 될 것 같아서 했다.
그는 반성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날 바라보며 불렀다.
“타티아나.”
“예?”
“우리 듀엣 레퍼토리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설마하니 지금 고민이 그런 거였어요?
하지만 듀엣에 관해선 이번 연주회에 올릴 몇 곡으로 이미 정리가 된 지 오래였다.
그건 미하일 선생님이 자신이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실 정도이기도 했고.
그런데 에르네스트가 말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어제 알렉산드라가 제안했던 것. 그냥 해 볼래?”
“……예?”
이미 하지 않기로 결정지었던 것을 가지고 그가 왜 길게 고민하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