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10화 (810/1,277)

##  810화

알렉산드라가 주최하는 연주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문화부의 주요 관계자들 외에도 정말 많았다.

아침부터 그녀는 여러 사람들과 전화를 하고 회의를 하고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다.

이 정도 규모로 커질 줄은 몰랐다.

매년 하는 정기 연주회는 이미 수년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어느 정도 사이즈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규격이 정해져 있다시피 하다.

하지만 이번엔 기이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원이 잇따랐다.

덕분에 홍보도 엄청나게 크게 되었고 방송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실황 중계에 대한 광고를 대대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라는 단지 그것이 세 명의 어린 피아니스트와 콰르텟을 향한 기대뿐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타티아나 유리예브나 베르체노바.

그녀가 지닌 배경의 힘은 쉽게 상상도 힘들 정도로 광범위하고 강력했다.

아마 이 대부분의 반응은 그녀 덕분에 이루어지는 것일 것 같다고 판단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타티아나는 오롯한 피아니스트로서 다른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구사하는 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가까이에서 타티아나의 태도와 실력을 본 알렉산드라는 정말 베르체노프라는 이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알렉산드라는 이 연주회에 거는 바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이름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관심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이용할 심산이었다.

주어진 기회를 쓰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때문에 알렉산드라는 수많은 전화와 미팅에도 주저 없이 응했다.

그렇게 큰 기회를 만든 후엔, 타티아나와 에르네스트가 음악을 증명할 순간이 온다.

그때, 어설프게 기웃거리던 사람들이 얼마나 대경실색할지.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알렉산드라는 기운 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

서류 뭉치를 정돈하여 스테이플러로 쿡 찍어, 옆쪽에 정리하면서 알렉산드라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슬슬 점심식사를 할 때였다.

메뉴를 생각하면서 막 일어서려던 때였다.

알렉산드라는 실수로 팔로 책상 위의 컵을 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컵은 산산조각이 나서 깨졌다.

“…….”

짜증이 날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짜증보단 불길함이 유령처럼 확 달려들었다.

바로 치울 생각도 못 하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알렉산드라는 일단 누구에게서 온 전화인지 확인했다.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알레니체프.

바흐 스페셜리스트인 피아니스트이자 중앙음악학교의 교사로, 본래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최근엔 에르네스트의 지도로 더더욱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었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꼭 받아야 하는 전화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울어대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면서도 쉽게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깨진 컵 조각들이 여전히 바닥에 잔뜩 깔려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지.”

중얼거리면서 어쩔 수 없이 알렉산드라는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에선 음울하게 가라앉은 구세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렉산드라 일리예브나. 예전에 전화한 이후로 오랜만이군요.

“그러네요,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에르네스트의 지도 선생이지만 구세프는 제자가 하는 일에 간섭하거나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맨 처음 한 번 통화한 이후로는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니 불안한 것도 당연하다.

알렉산드라는 그 불안을 옆으로 치워 버리면서 억지로 웃었다.

일단 뭐든지 간에 그녀가 지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결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말씀해 주세요.”

- 도움…… 책임자인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긴 한데, 유쾌하게 도울 일은 아니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렉산드라가 되묻자 전화 너머에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 신중하게 고민하는 기색이 들려온다.

그녀의 불안이 점점 더 커져서 다시 한번 물어보기 직전, 구세프가 낮게 이야기했다.

- 에르네스트에게 사고가 생겼습니다.

“……뭐라고요?”

불안이 형태를 가지고 다가오자 갑자기 아득해진다.

사고라니?

연주자들에게 벌어질 수 있는 사건 사고는 너무나 다양해서 종류를 꼽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콘서트 기획자로서 그녀는 이런 일을 너무나 많이 겪어 왔다.

때문에 갑자기 연주회가 무산되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는 걸 알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그녀도 지금은 일의 수습이 아니라 섬뜩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사, 사고라고요? 크게 다친 건 아니죠?”

- 계단에서 굴러서 여기저기 다쳤죠. 그건 괜찮은데…… 왼손에 문제가 조금 심각합니다.

“……맙소사.”

- 골절과 인대 파열이 있는데…… 자세한 건 조금 더 정밀검사를 할 예정입니다.

알렉산드라는 할 말을 잃었다.

에르네스트를 전 음악계의 자산이라 일컫는 사람들은 몇몇 호사가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실력을 가까이에서 몇 번이나 본 알렉산드라 역시 모르는 사이 그의 팬이 되어 있었다.

거의 운명처럼, 당연하게 그가 앞으로도 수십 년간 음악가로서 활동해 주리라 믿었던 알렉산드라는 갑작스러운 사고 소식에 모든 생각이 뚝 멎는 기분을 느꼈다.

수습이고 대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멍하니 듣고 있는 알렉산드라에게 구세프가 모든 것을 확정 짓듯 말했다.

- 에르네스트는 연주회에 보내지 못할 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지금 그녀는 사과 같은 걸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뇨,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정말 괜찮나요? 에르네스트는 이 연주회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정말…….”

두서없이 막 그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알렉산드라는 문득 그 정도는 그녀가 아니라 구세프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리란 생각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회복이 불가능하냐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알렉산드라가 말끝을 흐리자 구세프가 대답했다.

- 아직 잘 모릅니다. 검사를 해 봐야 아는 터라.

음울하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탄하다. 어찌 들으면 무감정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선 세상 그 누구보다 더 무겁고 무서운 무언가가 들끓고 있음을, 알렉산드라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구세프는 지금 참고 있었다.

그가 미쳐 날뛰면 아무도 침착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이를 악물고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끔찍할지 알렉산드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단지 조금이나마 힘이 되도록 위로할 뿐이었다.

“아…… 구세프 바실리예비치. 괜찮을 겁니다. 제가 기도할게요.”

- ……고맙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콘서트 디렉터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음악인으로서, 정말 신이 있다면 대체 왜 이러냐고 따지고 싶었다.

아마 구세프는 신을 죽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슷한 감정을 느낄 사람도 여럿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에르네스트와 친하게 보이던 두 여학생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알렉산드라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다른 두 분도 충격이 클 텐데…… 큰일이네요.”

- 그건 제가 잘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러 더 무뚝뚝하게 있는 구세프는 자기 책임을 다하겠다는 듯 말했다.

에르네스트에겐 사고가 벌어졌지만, 다른 두 사람에겐 문제가 없으니 그대로 무대에 올려야 한다는 투였다.

물론 알렉산드라는 그게 상식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세 명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에게 생긴 불상사다.

그렇다면 콘서트 디렉터의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은 최대한 빨리 걸맞은 실력을 지닌 피아니스트를 섭외해서 대신 무대에 세우는 것이었다.

“…….”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길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선 무대의 서곡으로 연주될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에르네스트가 직접 작곡한 곡이었으므로 다른 레퍼런스 등도 전혀 없이 완전히 새롭게 익혀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다른 피아니스트를 섭외해서 연주하게 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곡이라도 쉬우면 모를까, 난이도도 엄청났으니까.

일단 서곡은 포기하고, 다음 본 무대 프로그램을 생각해 봐도 그리 좋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콰르텟에 문제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타티아나의 모든 곡들은 전부 에르네스트와 얽혀 있었다.

그저 함께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음악성은 정말 특별해 보였다.

다른 피아니스트와 합을 맞춘다 하더라도 그녀가 제대로 된 역량을 낼 수 있을지, 알렉산드라는 확신하지 못했다.

사고 소식은 순식간에 러시아 전역에 퍼질 것이다.

그 상태로 타티아나가 무대에 올랐다가 만약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땐 정말 수습이 아예 불가능해진다.

“…….”

알렉산드라는 스마트폰을 쥔 채로 서성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선 윗선에 알리고 대처하기 전에, 타티아나와 아나스타샤에게 전화를 해서 이 상황에 대해 알리고 책임자로서 어떻게 할 건지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열심히 해 보자는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

콘서트 디렉터라면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여기에 목숨을 건 사람은 그야말로 한두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든 진행시켜야만 그 사람들이 무가치하지 않게 될 수 있었고, 그건 알렉산드라의 책임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렉산드라도 무언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허무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주저앉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가을 햇살은 사무실 구석구석까지 깊게 파고들며 깨진 컵 조각들을 비추었다.

***

지금 몇 시지.

고개를 드니 시침은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본래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난 왜 지금 내 방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걸까.

멍하니 흘러가던 생각은 갑자기 기억을 되살려냈다.

“……!”

난 온몸을 떨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선명한 기억은 눈을 감는다고 해서 안 보이는 게 아니었다.

도저히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균형을 잃은 아나스타샤를 위해 난 손을 뻗었다.

어쩔 수 없이 대신 굴러떨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난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는 날 잡아 올리고는 대신 계단을 굴렀다.

눈 깜빡할 사이에 저 밑까지 떨어진 에르네스트는 인상을 쓰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바닥을 짚자마자 그는 다시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방금 전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 건 아나스타샤였다.

그녀는 수십개나 되는 계단을 거의 두세 걸음 만에 뛰어내리더니 에르네스트를 부축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네 눈엔 이게 괜찮아 보이냐며 농담조로 이야기했지만 그 표정엔 고통이 역력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구급차를 불러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기까지.

난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구급대원들이 오고 나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같이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구급대원은 날 바라보더니 심하게 다친 곳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안 된다며 거절했다.

남겨진 상황을 정리하고 나와 아나스타샤를 수습해 준 건 선생님들이었다.

달리 다친 건 아닌지 물어본 선생님들은 계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난 더듬거리면서 내가 넘어지려 한 걸 에르네스트가 잡아 주었다고 대답했다.

내 말을 듣고 몇몇 선생님들은 마치 대단한 일인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선생님들에게 내가 느낀 분노는 살면서 느낀 감정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렬했다.

“…….”

결국 조퇴하기로 결정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내 옆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난 계속해서 생각하기만 했다.

아나스타샤를 구하는 것으로 난 아무 미련이 없었다.

그럼 그냥 나만 감내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왜 에르네스트가 그런 일을 겪어야 하지?

그는 다쳐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내가 옆에 없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겠지.

“…….”

우울하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끔찍한 기분이 전신을 휩쓸었다.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그냥 아나스타샤를 내버려 뒀어야 했나? 그녀는 운동신경이 좋고 빠르니까 어떻게든 혼자서 알아서 했을까?

하지만 그 순간 난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에르네스트 대신 아나스타샤가 똑같은 일을 당했으리라 확신했다. 거기에 대해선 일말의 의문도 없다.

어설프게 당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간 아마 같이 끌려가서 떨어졌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적어도 그녀를 온전히 계단 위에 서게 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순간의 판단이었지만 그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결국은 에르네스트가 크게 다쳐 버렸다.

몇 시간 동안 빙빙 돌면서 생각이 날 괴롭혔다. 난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책임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거니와,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나제즈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구석에 있는 날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다가와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같이 하며 이야기했다.

“아가씨.”

“…….”

“많이 우셨네요.”

내가 울었던가? 그런 것도 잘 모르겠다.

멀거니 바라보니 나제즈다가 물컵을 내게 내밀었다.

“물 한 잔 마시세요.”

“…….”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냐고 묻지도, 일어서라도 하지도 않는 그녀의 위로가 이 물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손을 뻗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하게 내 손은 경련하고 있었다.

나제즈다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컵을 붙잡은 난 실수로라도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무언가 붙잡을 것이 생기자 떨림이 차츰 줄어들었다.

난 컵을 입에 대는 대신 고개를 들었다.

“나제즈다.”

“예.”

“조금 후에…… 해가 지면…… 빅토르를 불러 주세요.”

왜 그러는지 묻지 않고 나제즈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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