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11화 (811/1,277)

##  811화

멍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에르네스트는 문득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부목과 붕대로 고정된 팔은 살짝만 움직이려 해 봐도 통증이 느껴졌다.

팔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타박상이 생겨서 진통제와 이런저런 약들을 먹었는데도, 팔 쪽엔 효과가 전혀 없는 것 같다.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문제없이 움직이던 팔이 꼼짝없이 묶여 있는 것을 보니 답답하다.

사실 그보다 더 안 좋은 예감이 자꾸만 파고들어오지만, 에르네스트는 일부러 그런 생각들을 떨쳐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진 아직 모른다.

엑스레이를 비롯한 온갖 촬영한 세네 번은 한 것 같은데, 의사는 아직 팔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때문에 어른들이 찾아왔을 때도 에르네스트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타티아나나 아나스타샤의 이름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부주의하게 계단에서 굴렀다고 했을 뿐이었다.

언젠가 드러날 일이겠지만, 그래도 에르네스트는 혹여나 그 둘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랐다.

“…….”

어둡게 찾아드는 불안감과 그럼에도 의연하고 싶은 자존심 등이 삐딱하게 기대어 서면서 에르네스트를 지탱했다.

그는 이따금 왼팔을 바라보던 것도 그만두고 아예 멀리 있는 창문만 바라보았다.

아예 정신을 놓아 버리면 생각 할 필요도 없으니 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실 문이 열리며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섰다. 에르네스트를 담당하는 의사였다.

그는 에르네스트의 상태를 일견에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이 안 좋아졌군요. 역시 면회를 모두 거절했어야 했는데.”

“제가 하는 일이 좀 많아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네요.”

“…….”

겨우 열여섯 살짜리가 할 소린 아니었나.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에르네스트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구세프와 교장 등 여러 사람들이 찾아왔다.

의사는 에르네스트의 안정을 위해 첫날부터 면회는 전부 금지시키고 싶어 했지만, 에르네스트는 다른 건 몰라도 일과 관련된 이야기는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절할 정도로 아픈 것도 아니었고.

구세프는 물론이고 뒤이어 찾아온 알렉산드라와 연주회 관계자들까지. 에르네스트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대신할 연주자를 구해서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에르네스트는 구세프와 의견을 함께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알렉산드라가 묘하게 반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연주회 취소를 종용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그렇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콘서트 디렉터로서 이 연주회에 걸고 있는 것이 가장 많을 알렉산드라가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에르네스트는 잘 이해가 안 갔지만, 이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강행하지 않을 이유 또한 그녀에게 있는 것 같아서 에르네스트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젠 그의 손을 떠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이다음은 알렉산드라와, 다른 두 친구가 알아서 하겠지.

“…….”

에르네스트가 침묵하자 의사는 차트를 확인해 보더니 다시 상태를 검진하듯 바라보고는 슬쩍 뒤돌아섰다.

“아무튼…… 이젠 면회 시간이 끝났으니 편히 쉬십시오.”

무언가 설명해 주리라 생각했던 의사가 그냥 가려는 것 같자 에르네스트는 불쑥 짜증이 났다.

촬영만 실컷 하고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도 안 해 주면 그냥 불안해하다가 죽으라는 건가?

되도록 짜증을 비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에르네스트가 물었다.

“제 상태는 어떤가요?”

“……그건 어머님께 설명드렸습니다.”

“당사자인 제게도 설명해 주셔야죠.”

“…….”

보호자에게 대신 설명한 것으로 책임을 다 하면 의사도 편하겠지.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무작정 긍정적인 소리만 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전문가의 제대로 된 설명을 듣고 싶었다.

그런 에르네스트의 표정을 본 의사의 표정도 조금 바뀌었다.

너무 충격을 받지 않게 하고 싶었는지 되도록 디테일한 이야기는 피하려 했지만, 지금 에르네스트에겐 준비가 이미 되어 있음을 깨달은 얼굴이었다.

의사가 넌지시 물었다.

“스스로 느끼기엔 어떠신지?”

“반깁스 해서 별것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느껴지는 건 꽤 심한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흠.”

마지막으로 잠시 침음을 흘리며 고민하던 의사는 차트를 다시 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제 소견으로는 심한 편입니다. 전치 12주입니다.”

전치 기간을 따지는 기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에르네스트는 숫자를 듣고도 현실감을 잘 느끼지 못했다.

그 반응을 살핀 의사가 설명을 덧붙였다.

“골절은 큰 문제 없을 텐데…… 팔꿈치 인대의 파열이 불안정한 상태라서, 조금 지켜본 다음에 수술도 필요하겠습니다.”

“조금 지켜본다는 건…… 그냥 나을 수도 있는 건가요?”

“……수술은 해야 할 겁니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는데 의사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에르네스트는 작게 심호흡했다. 문제가 심각하단 건 알겠다. 그럼 왜 지금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

“그럼 지금 빨리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수술을 할 컨디션이 아닙니다. 지금은 염증과 부기를 가라앉혀야 합니다.”

“……그렇군요.”

“그 후에 가동 범위를 최대한 만들고 수술을 할 예정입니다. 팔꿈치 인대 수술은 고난도의 수술이라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완치했을 때 문제없이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가동 범위와 고유 수용감각, 안정성, 근력 등이 돌아오게 할 수 있으려면 정확한 시기에 정확한 수술을 해야겠죠.”

의사는 그가 잘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에르네스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들어도 잘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그건 제 일이니까.”

사실 에르네스트는 의사의 말을 완벽히 알아들을 순 없어도,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심각하다는 걸.

조금 다쳤다면 아마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조건 등을 이야기하진 않았을 터다.

하지만 의사는 그런 부분들까지 회복시켜야 한다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흐릿했던 현실감이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왼팔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갑자기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에르네스트는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에르네스트 스테파노비치께서 생각하실 일은, 그 수술 이후의 재활입니다. 같은 수술을 받아도 예후가 달라지는 데엔 재활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요.”

“……오래 걸립니까?”

“오래 걸릴수록 좋습니다.”

의사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재활은 1년 이상 생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전치 12주에 1년 재활? 내년 콩쿠르는 당연히 모두 포기해야 할 상황이고, 그 후로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평소 계획 등을 짜는 것이 굉장히 빠른 에르네스트였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장 올해와 내년 전부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 내후년을 생각하려 하니 생각이 돌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에르네스트가 침묵하자 의사가 빠르게 덧붙였다.

“이렇게 회복한 연주자들을 전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러니 복귀하시는 걸 목표로 열심히 해 봅시다. 치료계획을 잘 따라 주시고 재활도 성실히 해 주신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쉬시길.”

의사가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에르네스트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침대를 내리쳤다.

하지만 푹신한 침대를 내리쳐 봐야 그 반동만 몸에 전해져서 왼팔의 고통만 상기될 뿐이었다.

“후…….”

12주?

그는 몇 년 전, 운동하다가 다친 선배가 전치 4주 진단을 받았던 적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4주짜리 부상만으로도 그 선배는 긴 슬럼프에 빠져 쉽게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솔직히 그 당시엔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조심해야겠단 경각심 정도를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본인의 일이 되니 숨이 턱 막힌다. 그것도 치료 기간이 3배나 되는 심각한 부상으로.

“…….”

이를 악물고 앞을 노려보던 에르네스트는 어둡게 물드는 생각을 내려놓기 위해 옆에 있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메시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바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어른들은 아까 병문안 겸 찾아왔고, 안정을 취한 다음에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들은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리고 에르네스트는 인터넷에 접속하고, 첫 페이지에 뜨는 뉴스에 자신의 얼굴이 박혀 있는 걸 보곤 숨을 들이쉬었다.

“빠르네.”

벌써 난리였다.

자세한 이유까진 기자들도 파악하지 못했는지 사고는 에르네스트가 그냥 학교 계단에서 구른 것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부상의 심각함과 연주회 취소, 콩쿠르 참가 불가 등의 예상 등을 차례로 주르륵 떠들어 댔다.

그 맨 마지막엔 피아니스트로서의 생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언급되어 있었다.

이 기자도 마음대로 떠들었다간 분노한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을 걸 생각은 한 모양이다.

“…….”

연주자 생활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치 운명처럼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이렇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수술도 재활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마치고도 은퇴한 연주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는 잘 안다.

피아노를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에르네스트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음악가로서의 생활은 이어진다. 그는 작곡가로서도 한 발을 내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행이라 생각할 순 없었다.

병실은 조용했다. 우울함과 불안함이 벽 곳곳에 달라붙어 있다가 미끄러지며 그에게 다가온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그 검은 기분에 잠식되어 갔다.

그때, 다시 병실 문이 열렸다.

에르네스트는 의사가 되돌아왔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선생님.”

“…….”

문은 열렸지만 의사는 바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에르네스트가 이어 말했다.

“혹시 수면제 없습니까? 그냥 자고 싶은데.”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진 모르겠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정말로 지금 잠들지 않으면 점점 더 기분이 안 좋아질 것 같은 직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오늘은 돌아갈게요.”

“!?”

불안정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에르네스트가 급히 말했다.

“잠깐만, 타티아나!”

막 물러서려던 발소리가 우뚝 멈춰 섰다.

에르네스트는 다시 말했다.

“가지 마.”

그러자 이윽고 병실 안쪽으로 타티아나가 천천히 들어섰다.

“…….”

한없이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는 타티아나는 안으로 몇 걸음 들어와서 에르네스트를 보고도 그 불안을 거두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원래 연주자로서의 안전 등에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터졌으니 불안해할 거라 이미 예상할 수 있긴 했다.

멀쩡히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인 걸 보고 나면 조금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왼팔의 반깁스는 어떻게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수면제까지 요구한 것 때문인지 타티아나는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르네스트는 구해진 사람이 구하다 다친 사람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든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헛소리라 치부해 왔지만, 지금만큼은 진짜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타티아나가 천천히 말했다.

“주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찮아.”

“미안해요. 일부러 면회 시간이 지난 후에 찾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막아선 사람들이 있을 텐데 어떻게 뚫고 왔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녀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을 테니까.

하지만 어쨌든 간에, 에르네스트는 타티아나가 불안해하고 있긴 하지만 멀쩡히 서서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혼자 걷다가 넘어져서 무가치하게 다치는 사람도 많다. 그에 비하면 그는 후회할 일 없이 제대로 몸을 쓴 것이었다.

비록 상태가 엉망이긴 하지만, 자신이 우울해하면 저 애가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에 그는 약간이나마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넌 어때? 괜찮아?”

“……저요?”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멀거니 되묻던 타티아나는 곧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에르네스트 덕분에.”

“다행이네.”

“다행이라고요?”

하지만 미안함이 가득하던 얼굴엔 순간적으로 불쑥 울분이 들어섰다.

타티아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더니 이를 악물고 짜내듯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이…….”

그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타티아나는 울먹였다. 지금까지 꾹 눌러 참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죄책감을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에르네스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타티아나를 진정시킬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그녀는 더 크게 화를 낼 사람이다. 에르네스트는 이미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심각하다고도 괜찮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에르네스트가 어쩔 줄 모르고 있자, 타티아나는 곧 그가 곤란해한다는 걸 깨닫고는 휙 뒤돌더니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우리 둘 다 참 난감한 상황이네.

에르네스트는 그녀가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스스로 조금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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