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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13화 (813/1,277)

##  813화

침대에 앉은 채로 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새더라도 음악 연구를 하든지 일반교과 공부를 했다면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이 들진 않았을 텐데, 간밤에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기만 했다.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들은 아직까지도 저들끼리 싸우면서 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친 탓에 머리 회전도 느려진 걸 느끼고 있는데, 부정적인 생각들은 지치지도 않는가 보다.

“…….”

지금부터 뭘 하면 좋지.

평소대로 행동할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식사를 하거나 피아노를 만지거나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기분만이 아니라 신체적 문제로도 드러났다.

손을 들어 보았다.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상태론 칼이든 건반이든 정확하게 컨트롤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다.

병실에 있는 에르네스트를 생각하면, 그가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조만간 괜찮아지도록 해 봐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학교도 잘 모르겠다. 며칠 정도는 그냥 쉬고 싶은 마음도 있다.

“…….”

대충 그렇게 결정하려던 나는 지금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도 모를 한 사람을 떠올렸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난 침대 구석에 던져놓았던 스마트폰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전날 저녁에 아나스타샤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바로 전화를 하기엔 서로 너무 힘든 상황이라서, 혹시 전화해도 되느냐고 메시지만 보냈었는데 거기에 대한 답은 아직까지도 없었다.

그녀의 SNS 역시 침묵 중이었다.

평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는 일이 잘 없는 그녀가 이렇게 길게 아무 답도 하지 않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걱정이 덜컥 들긴 했지만, 괜찮으리라 생각하며 진정했다.

아나스타샤는 다치지 않았다. 마지막에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에르네스트를 부축하고 구급차를 부른 건 그녀였으니까.

아마 잠시 쉬고 싶은 건 마찬가지겠지.

마음 같아선 당장 전화를 걸어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장을 바꿔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 괜찮냐고 묻는다면 난 화가 날 것 같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가씨.”

멍하니 또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태양이 조금 더 내 방 깊은 곳까지 햇살들을 드리웠을 때, 나제즈다가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달라 했더니 그녀는 아침식사로 카샤를 가지고 들어왔다. 난 고개부터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생각 없어요.”

“어제 저녁도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한 입이라도 드세요.”

“…….”

아주 오래전부터 날 봐 왔던 나제즈다가 이렇게 걱정하는 눈빛을 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난 그녀에게 카샤 그릇이 놓은 쟁반을 받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식욕은 그다지 없었지만 숟가락을 들었다.

미세하게 떨리긴 해도 신경 써서 쥐면 못 쥘 것도 아니었다.

난 천천히 카샤를 떠서 입에 넣었다. 드미트리가 신경 써서 만들어 주었다는 느낌이 바로 느껴지는 맛이었다.

가까스로 두어 숟가락 카샤를 떠먹는 걸 확인한 나제즈다는 한결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무기력하게 풀어져 있던 정신에 서서히 책임감이라는 것이 찾아든다.

내가 이렇게 멍하니 있으면 곁에 있는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 뿐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지만 난 항상 괜찮아 보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한다 해서 무엇이 바뀌는 걸까.

결국 에르네스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다시 떠오른다. 나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 무겁고 차가운 감정과 따뜻한 카샤가 속에서 뒤섞이는 것 같다. 체할 것 같다.

“학교는 쉰다고 전해 놓을까요?”

난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오늘 이대로 쉬어 버리면 다시 무기력의 늪으로 빠져들 것 같았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기분으로 덧없이 시간을 보내며 탈진되어 가겠지.

사실 그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지만, 무릎 위에 놓인 카샤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일말의 책임감이 날 붙잡았다.

적어도 학교에 있는 다른 친구들과 미하일 선생님 그리고 구세프 선생님은 직접 찾아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금 표류 중인 내게 주어진 가장 가까운 목적지였다.

“아뇨, 갈게요.”

나제즈다는 굉장히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받치듯 들었다.

힘없이 고개를 들자 그녀가 눈을 마주하며 바라본다.

지금 내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난 턱을 떨쳐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나제즈다는 마지막으로 부탁하듯 말했다.

“그냥 쉬세요.”

“아뇨, 가야겠어요.”

“간밤에 잠도 잘 못 주무셨죠? 눈이 지금 얼마나 빨갛게 충혈되었는지 아세요?”

지금 움직이는 건 분명 몸에 좋은 짓이 아니겠지.

그래도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뒤였다. 선생님들을 만나 뵙고,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고 지금 연락이 닿지 않는 아나스타샤가 학교엔 올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학교에 갈 이유가 있었다.

“오후엔 돌아올게요.”

내가 고집스럽게 이야기하자 결국 나제즈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아이들 사이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

모두가 날 의식하고 있긴 하지만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어색해하고 있었다.

어제 있었던 사건에 대해 다들 정확하게 알진 못해도 내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을 거란 것 정도는 이해하는 것 같다.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에르네스트는 없고 아나스타샤도 없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아마 오늘은 그녀가 학교에 오지 않을 것 같단 직감이 들었다.

내가 자리에 앉고 나서도 친구들은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뒤편에 있는 리처드와 한승우도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딱히 와서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다. 난 차라리 이 어색한 정적이 좋았다.

물론 직접 와서 말을 거는 친구도 있었다.

“타티아나.”

늘 밝고 경쾌한 성격인 발렌티나가 울적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미안함은 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하지만 그게 내 걱정이어선 안 된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화가 난다. 있어선 안 될 삐딱한 생각마저 들었다.

발렌티나는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아니라 에르네스트가, 아니면 아나스타샤가 있길 바라지 않으시나요? 왜 절 걱정하시는 건가요?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정말 끔찍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말들이 감정을 타고 마구 떠오른다.

난 실수로라도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내 표정에서 그 일부러 새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렌티나는 예민하게 그것들을 읽어내고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을 리가 없겠네. 그런데도 학교에 와 주어서 기뻐.”

“…….”

“혹시 아나스타샤랑 연락돼?”

사고에 연관된 사람은 세 명. 그중 학교에 나온 건 나 하나.

만약 나까지 나오지 않았더라면 발렌티나가 얼마나 걱정했을지 눈에 선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안 돼요.”

“전화해 봤어?”

“메시지만…….”

“그렇구나. 난 전화해 봤는데 안 받더라고. 혹시 어디 다쳤나 싶은데 그건 아닌 것 같고…….”

발렌티나의 전화도 안 받을 정도라면 정말 그 누구의 연락이라도 전부 피하는 모양이다. 집에 있는 걸까.

아나스타샤의 집에 찾아가 보기라도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간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힘내라고? 정말 우스운 말이다. 정작 나조차도 지금 허망함만 느끼고 있는데.

텅 빈 이야기를 우리끼리 해 봐야 무의미했다. 서로 더 악영향만 끼칠 뿐.

그 허망함은 발렌티나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했다. 갈수록 그녀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진다.

난 이쯤에서 대화는 그만하고 혼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발렌티나는 조금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서 뒷걸음질 치면 내가 혼자가 된다는 걸 느끼고,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움직임이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내 옆에서 작게 이야기했다.

“사고라고 했지?”

“……예.”

“세 명이서 같이 있다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발렌티나가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힘든 내색을 보일 순 없었다.

난 차라리 발렌티나가 내 탓을 하고 증오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내가 힘겨워하면 착한 그녀는 쉽게 분노를 표출하지 못할 테니까.

때문에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천천히 이야기했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겠지. 그런데 하나만 부탁해도 돼?”

“……부탁이요?”

“응.”

무슨 부탁인지 듣지도 않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날 증오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 있었지만, 부탁이라면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내가 무엇이든 거절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부탁은 예상했던 것과 완전 다른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 애가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이유가…… 죄책감을 느낄 만한 일에 엮인 것이라면 말이야, 그래도 그 애를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눈을 크게 뜨고 발렌티나를 바라보았다.

발렌티나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어렴풋이나마 우리 관계에 대해 꿰뚫어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발렌티나는 훨씬 더 분명하게 모든 것을 알고, 그럼에도 다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그게 서로 간에 악의에 의한 일이 아니라 그저 사고일 뿐이라면, 앞으로 괜찮아질 것이라는 위로를 보내온다.

난 목이 메어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 없어요.”

“응. 고마워.”

“……고마워하지 마세요.”

지금 내가 아나스타샤에게 느끼는 감정은 걱정뿐이다. 시간이 흐르더라도 내가 그녀를 증오하게 되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어제 에르네스트가 어떤 기분으로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했는지, 약간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상황이 나아진 건 하나도 없지만.

“…….”

발렌티나의 부탁을 받아들였음에도 울적하게 고개를 떨구자 그녀는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

“에르네스트는 봤어?”

“예, 어제.”

“그랬구나…… 나도 나중에 병문안 가 봐야겠네.”

그녀 역시 에르네스트의 상태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당연했다. 발렌티나는 잠시 내 곁에 앉아 있다가, 교실 밖으로 나갔다.

끝까지 그녀는 내 앞에서 좋은 모습만을 보였다.

혹여나 내가 힘들어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겠지만, 그런 모습에 난 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내 이기심의 문제였다.

저렇게 착한 아이를 친구로 두고도, 난 이기적으로 증오를 받길 원했다.

그게 발렌티나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는 생각도 않고.

“…….”

내 방에 혼자 있기로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면, 적어도 내 부정적인 감정들을 남에게 강요하진 않아야 했다.

난 그 부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일어섰다.

밖에 바로 발렌티나가 있다면 좋겠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진 솔직히 전혀 생각해 둔 것이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되도록 안심시켜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복도엔 이미 발렌티나가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잠시 두리번거리던 난 일단 조금 걷기로 했다.

그러다가 계단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어 움찔하며 멈춰 섰는데, 그 위에서 누군지 모를 남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들려왔다.

“뭐, 걔는 거의 끝난 것 아냐?”

“그렇다고 봐야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차가움은 떨리는 내 목을 건너 머리까지 향했다. 마치 찬물을 그대로 머리 위에 부은 것처럼 전신이 떨려 왔다.

그러나 온몸이 차가운 지금, 내 머리는 격렬한 뜨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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