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14화 (814/1,277)

##  814화

운동이라곤 평생 해 본 적 없는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계단을 어떻게 밟고 올라가는지도 모르겠다. 저절로 발이 위쪽으로 향하는 기분이다.

거의 발소리도 내지 않고 나는 두 남학생 앞으로 다다랐다.

내가 코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남학생 중 한 명이 날 발견하고는 창백하게 질렸다.

앞뒤 잴 것 없이 난 그의 넥타이를 콱 붙잡았다.

“잠…….”

“방금 무어라 하셨나요.”

힘으로 따지자면 상대가 안 될 텐데도 내게 넥타이를 잡힌 남학생은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딸려왔다.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다.

난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지? 피아노과는 아니야. 오다가다 몇 번 본 것 같긴 한데. 그게 몇 층이었지? 목관악기 쪽인가?

나도 모르게 내 머리는 빠르게 신상 파악에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내가 쓸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수단들 역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위험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걸 감지했는지 그 옆에 있던 다른 남학생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잠깐만, 진정해.”

“무슨 대화를 하시고 계셨는지 물었어요.”

“그…… 그냥 돌아다니는 소문일 뿐이야.”

난 신경을 곤두세우며 눈만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남학생이 움찔했다.

짧게 물었다.

“소문?”

“그래. 어제 다쳤던 네 친구…… 심각하다고 들어서…… 아, 그게 우리 의견은 아니고! 당연히 회복하길 바라지!”

“…….”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진 알겠다.

이미 에르네스트의 일은 언론 등을 통해 전국에 퍼진지 오래였다.

아마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 중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

우리 학교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구급차가 나가는 순간부터 온갖 소문들이 다 돌았을 거란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아까 교실에선 어색해하며 모두 조용히 있었지만, 사실 난 오늘 아침 밖으로 나오면서부터 어느 정도 주변이 수군거리더라도 참아 넘길 각오 정도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연주자로서 생명이 다 끝난 것 아니냐는 둥 그의 미래를 확정지어 버리는 것처럼 말하는 건 내 신경을 너무나 많이 건드렸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해 봐야 소용없었다. 난 진득한 적의를 담아 그를 매섭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 앞에선 당연히 그렇게 말하시겠죠.”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라고! 내가 미쳤다고 같은 학교 다니는 애가 잘못되길 바라겠어? 응?”

“…….”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은 전교에 단 한 명도 없어. 진짜로!”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정말 억울함이 담긴 그 목소리에, 조금씩 이성이 되돌아왔다.

분노로 가득 찬 머리는 아직도 저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보자면, 정말로 악의적인 이유로 사고를 당한 학교 학생의 운명을 조롱하려던 건 아닐 것 같았다.

이 두 사람 역시 같은 교복을 입고 음악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인데, 그 운명이 자신들에게 향하지 않으리란 확신을 가지고 있진 않을 테니까.

돌아다니는 소문을 듣고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걸까. 정확히는 모르겠다, 알 생각도 없고.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서 더 끝장을 보려 해 봐야 그건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했다.

잔뜩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으면서 저절로 손에 힘도 풀어졌다.

양손을 들고 내게 넥타이를 잡혀 있던 남학생이 조심스레 말했다.

“이것 좀…… 놔줄래?”

“…….”

난 손을 풀지 않고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는 날 뿌리칠 생각도 않고 그대로 양손을 들고 있었다.

마치 총이라도 겨누어진 사람의 태도였다. 하지만 그의 눈에 불만은 전혀 없었다. 그저 미안해하는 감정만이 가득했다.

반성하고 있다면 딱히 변명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만 그냥 보낼 순 없어서 경고했다.

“말씀 조심해 주셨으면 해요.”

“……알았어. 정말 미안해. 네가 들을 줄은 몰랐어.”

“제가 안 듣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소리에는 힘이 있다. 그건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좋은 의도로 퍼져 나간다면 상관없겠지만, 혹시 모를 악의를 담아 저주가 된다면. 난 그 모두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저주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나는 에르네스트의 옆에서 결국 그를 다치게 만든 나 자신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주, 그리고 계단. 옆을 보니 계단들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난 여전히 다른 학생의 넥타이를 쥔 채였다. 이 상황 자체가 불안했다. 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앞이 아찔해지기 직전에 손을 놓았다. 그는 흐트러진 넥타이를 몇 번 바로잡았다.

난 갑자기 몸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아졌음을 깨닫고는 뒤로 더 물러섰다.

가까이에 있으면 내가 무언가 하지 않더라도 이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길함.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내 목을 조여 오는, 새카맣고 지독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깨를 떨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그 둘은 정말 미안하다는 듯 다시 한번 사과해 왔다.

“미안해. 진짜로.”

“……가세요.”

눈앞에서 일단 사람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날카롭게 이야기하자 두 사람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난 누군가 잘못되지 않고 무사히 계단을 다 내려가서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깊게 심호흡했다.

평소에 가끔 공황이 오긴 했어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말 컨트롤이 잘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진 굳이 따져 볼 것도 없었지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떨리는 손으로 심장 부근을 누르면서 진정하려고 애썼다. 한참이나 후에야 점차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 좋은 녀석들이군.”

“……구세프 선생님?”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구세프 선생님이 삐딱하게 선 채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천천히 남은 계단을 올라 선생님 앞에 섰다.

원래 오늘 학교에 온 이유 중 하나는 구세프 선생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겐 준비되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방금 이야기하신 게 무슨 뜻인지, 난 조용히 물어보았다.

“듣고 계셨나요?”

“그래.”

“……듣고만 계셨나요?”

두 번째 질문은 약간 힐난의 투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어떻게 족칠지 생각 중이었다.”

“예……?”

“울면서 빌 때까지 혼쭐을 내 줄 터였지. 그런데 네가 와서 멀쩡히 도망갔구나.”

“음…… 죄송합니다?”

“뭐냐 그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있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세프 선생님이 분노하시는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난 안 그래도 지금 선생님이 슬프고 힘들 거라는 걸 안다.

겉보기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계시지만, 그 커다란 몸집이 오늘따라 조금 작아 보인다.

오랜 기간 선생님을 봐 왔던 난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도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더니, 짧게 턱짓하며 말했다.

“됐고, 따라와라.”

“저 곧 수업이…….”

“그럼 그냥 가서 수업 듣든가.”

“…….”

냉정하고 퉁명스럽게 들리지만, 그건 내게 향하는 배려이기도 했다. 지금 마주하기 싫다면 안 그래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단지 피할 생각이었다면 난 오늘 학교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으로선 내게 하실 말씀이 많으실지도 모르겠다.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닐지도. 내게 그리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자포자기적인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난 교실에서 발렌티나와 나누었던 대화로 느낀 바 있었다.

난 어두운 감정을 또다시 선생님에게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

구세프 선생님은 날 데리고 레슨실로 향했다.

몇 년 전엔 이곳에서 몇 시간이고 레슨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했다가도 구세프 선생님에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고마운 분에게 난 무엇을 돌려드린 걸까.

“차 마시겠지?”

“…….”

난 긍정도 부정도 않고 선생님이 가리키는 대로 가서 앉았다. 잠시 후 내 앞에 찻잔이 놓였다.

“자.”

가만히 바라보니 선생님이 어서 마시라는 듯 손짓했다.

천천히 한 모금 마시자 차가웠던 온몸에 열기가 돌았다.

“타티아나.”

내가 고개를 들자 구세프 선생님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내 집중을 끌어가려는 듯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 치며 말했다.

“어제 녀석이 치료를 받고 날 보자마자 무엇부터 물었을 것 같나?”

잘 모르겠다. 자신의 상태? 하지만 그건 선생님이 아니라 의사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다.

고개를 가로젓자 선생님이 말했다.

“넌 괜찮으냐고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이 없음은 분명 봤을 텐데도 그렇게 묻더군.”

또다시 목이 메기 시작했다.

바보 같으니.

최소한 다치고 난 다음엔 스스로를 돌보란 말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연주자로서의 자신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난 울적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어제 저에게도 보자마자 그랬어요.”

“어제 찾아갔었나?”

“예.”

“네가 괜찮은 걸 확인해서 안심했겠군.”

“……다행이라고 했어요. 전 화를 냈고.”

화만 난 것이 아니라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폭발해서 정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그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자제력이 필요했던 일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내 말만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래.”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뭘?”

“다행이라고.”

이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말이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다.

너무 나쁘고 잔인한 물음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선생님은 가만히 날 바라보다가 한마디 하셨을 뿐이었다.

“그 녀석이 결정한 일이니까. 난 할 말 없다.”

정말 거기에 대해선 이미 다 끝난 이야기라는 듯, 선생님은 손을 가로로 휙 그으며 말했다.

“생각할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판단한 일이라고 했었지. 그런 어떠한 계산도 있지 않은 결정은 존중해 줄 수밖에.”

나 역시 생각 없이 아나스타샤를 계단에서 구하려 했기에 그 말이 옳다는 걸 안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도저히 옳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말이 잘 안 나오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말했다.

“계산을 했어야죠…….”

“그래, 계산을 했어야지. 그랬다면 최소한 조금이라도 팔을 덜 다치게 굴렀을 테니까.”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어제 이야기 나눴으니까. 나나 그 녀석이나 같은 생각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에르네스트는 전치 12주의 큰 부상으로 앞으로 연주자 생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구세프 선생님이 더 잘 아실 테고, 지금 가장 심각해야 할 사람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저 담담하게 말씀하실 뿐이었다.

물론 태연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 표정 이면엔 아주 어두운 무언가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건 내가 미처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원하고 무서운 무언가였다.

단지 선생님 역시 소리에 힘이 있다는 걸 믿으실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걸 아시는 것이다.

난 선생님의 이 침착함을 깨뜨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느꼈다.

적어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신다. 거기에 최선을 다해 응할 필요가 있었다. 나도, 에르네스트도.

목을 축인 구세프 선생님은 다시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마음이 편치 않겠지. 타티아나.”

“…….”

“하지만 연주회가 며칠 남지 않았음을 생각해라.”

“……예?”

그 침착함에 부응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에게 지금 무대에 서란 말씀이신가요?”

“가능하다면.”

대체…… 대체 왜,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제 에르네스트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음을 떠올렸다. 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해요. 어제 에르네스트에게도 말했어요. 전 못한다고.”

“그랬나.”

“할 수 없는 게 당연…… 제가 그렇게 인간 같지도 않게 보이시나요?”

천천히 말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치솟아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피아노에 그저 미쳐 있는 무슨 괴물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가능하다면 하라고 했을 뿐이지.”

“그 말씀이 전 끔찍하게 들려요. 절 그렇게…….”

무릎 위에 놓인 양손이 파르르 떨린다.

저렇게 되어 버린 에르네스트를 두고 무대에 오르라고요? 그의 몫까지 제가 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해 봤다. 당연히. 하지만 그런 건 정말 초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 같이 사람으로서도 불안정한 무언가가 할 일이 아니다.

말을 다 맺지 못하고 난 울먹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

구세프 선생님은 조용히 날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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