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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여명-815화 (815/1,277)

##  815화

누군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서러움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그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구세프 선생님이 차라리 날 미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 정도로, 난 연주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이 상황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뛰쳐나가지 않았던 건 내가 느끼는 죄책감이 내 발보다 훨씬 더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무너져 버리지 않았던 건 내가 느끼는 방향성 잃은 분노가 언제나 어디로든 뻗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것을 붙잡기 위해 고개를 들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고.

속이 메슥거리고 머리가 뜨겁다. 난 눈가를 문질러 닦아내고는 간신히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구세프 선생님은 의자를 돌려 창가 쪽으로 향하더니 내게 말했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되나.”

“……그러세요.”

“미안하다.”

애연가이시면서도 언제부터인가 내 앞에선 담배를 잘 피우지 않으시던 선생님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저 작은 잎사귀 뭉치에라도 의존하시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난 그것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담배 연기가 창가로 빠져나간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침묵 속에서 천천히 감정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내가 의존하는 것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 진정되었을 때, 구세프 선생님이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죄책감을 느끼나? 타티아나.”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요.”

약간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꿈틀거린다.

다른 사람 앞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말을, 난 지금 꺼낼 수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제가 대신 다쳤으면 좋겠어요.”

“……다른 녀석이 말했다면 화가 났을 말인데, 네가 하니까 도무지 빈말로 들리질 않는군.”

“빈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종종 난 선생님에게 농담도 하곤 한다.

그렇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할 땐 결코 선을 어기는 법이 없다는 걸 선생님도 알고 계신다.

그만큼 난 진심이었다. 만약 다쳐야 할 사람을 바꿀 수 있다면 일말의 주저도 않고 그리했을 것이다.

난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면서도 언제든지 이 기회를 잘 써서 끝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을 준비해 왔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늘 최선을 다했고, 때문에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남은 이 미련은 도무지 어떻게 해결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 슬픔과 죄책감은 인간적인 것이지. 인간적이고 싶은 네가 지금 무대에 서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괜찮다.”

난 흠칫하며 떨었다.

평범하지 못한 내가 평소에 종종 평범함을 가장한다는 걸 선생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선생님은 딱히 무어라 하지 않으셨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일을 다시 한번 쿡 찔러 짚어 주실 뿐이다.

“그러나 감내와 극복 역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난 반항적인 시선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걸 제가 지금 모른다고 생각하시나요?

난 바보가 아니다. 어쨌거나 나아가야 하는 인간에 대한 독려와 실존의 되새김.

특히 난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몇 년이나 공부하며 그러한 메시지를 읽었고, 너무 많이 읽어서 이젠 질릴 정도였다.

언젠가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아야겠지. 그럴 생각은 분명히 있다. 단지 지금은 아닐 뿐이다.

어떻게 봐도 난 지금 연주자로서 있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정말 내가 생각 없이 있는 줄 알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설득하려고 하신 거라면 실망이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라면 그 인간다움마저 초월하여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티아나.”

“…….”

반박이라도 쏟아낼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인간에 앞서 연주자를 말씀하실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나도 종종 그런 경향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실제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야기하거나 받아들이기엔 너무 무서운 말이었다.

“잔인한 말씀이시네요.”

“그렇지.”

“아까 제가 한 말이 맞네요. 절 사람이라 보지 않으시는 거죠.”

인간이 되지 못한 괴물이나 로봇은 무감각할 수 있겠지.

나도 모르게 시니컬하게 비아냥거리고 말았다.

하지만 구세프 선생님의 시선에 그런 모멸적인 느낌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고 다시 한번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네가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본 이유가 달리 있진 않다.”

“그렇다면 무슨…….”

“내가 할 수 있었으니까. 네게도 가능성이 있다고 봤을 뿐이야.”

난 뻣뻣하게 굳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구세프 선생님도 직접 겪었던 일을 토대로 지금 말씀하고 계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어딘가에서 본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겪고 느낀 것을 토대로 진심 어린 조언을 하려는 것이다.

“…….”

제대로 알려고 들지도 않고 실망하고 비아냥거렸던 스스로가 부끄럽고 화가 났다.

정말 몇 번이나 실수하고 자책하면서도 도무지 나아진 것이 없었다.

이렇게 짧은 생각과 관념으로 대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선생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셨다.

“오래전 내가 음악원 학생이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

“당신 성격에 친구 같은 게 있었다니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진 말고.”

“아, 아니에요.”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정말로 없었다. 깜짝 놀라 내가 손사래를 치자 선생님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추억과 회한에 젖은 목소리는 수십 년 전을 그리고 있었다.

“타고난 체격과 재능으로 피아노를 가지고 놀던 친구였지. 사실 난 그때 세상에 내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으로 상대를 만난 기분이었다.”

어떤 기분인지 알 것만 같아서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추억은 그리 좋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1년쯤 후에, 각자 연주회 일정으로 바쁠 시기에 그 녀석은 권총 강도를 당해 죽었다.”

“…….”

“부고를 접한 다음 날, 난 무대에 섰지.”

수십 년 전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선생님이 하셨던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인간성을 저버리고 괴물이 되어서라도 무대에 서란 뜻이 아니다.

그런 짓으론 아무것도 얻을 수도 이룰 수도 없다. 되레 충분한 인간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또렷한 긍지와 강인함을 담은 목소리로 구세프 선생님이 말했다.

“그 무대에서 내가 무엇이 되었는진…… 상관없는 이야기겠지. 단지, 난 그 무대에 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만약 모든 것을 취소하고 잠적했다면 지금 여기에 있지도 못했겠지.”

단지 무엇이든 이용해라 따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커리어를 우선시하란 말씀은 아닌 것으로 들려요.”

“그래. 이번 무대를 피한 너와 피하지 않은 넌 다른 연주자가 될 것이란 이야기지.”

“…….”

“오늘 정도는 쉬어도 되련만, 넌 학교에 나와서 날 마주하고 있다.

난 네가 피하지 않은 연주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에르네스트 역시 같은 생각이고.”

내가 그동안 보여 온 집착과 절실함. 지금까지 날 지탱하는 책임감과 죄책감. 그

런 것들의 편린을 알아본 구세프 선생님은 내가 선생님 당신과 닮아 있다고, 그만큼 강인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인함은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도 영향을 분명 끼치리란 것까지도 이미 생각하고 계시는 중이었다.

“네가 힘을 내 주어야 그 녀석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내가 이번 연주회를 포기한다면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내년 국제 콩쿠르도 제대로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당연히 그 이후의 활동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내가 무너져 내리면 당연히 에르네스트도 부정적인 생각들을 가지리란 뜻이었다.

그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지금 내가 억지로라도 일어서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이겨내기에, 난 지금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말대꾸를 할 생각은 없지만…… 전 선생님과 달라요.”

“……그래.”

정말 여러 가지 상황이 달랐다.

우선 난 이번 연주회에서 듀엣을 준비하던 중이었으니까, 독주곡을 연주해야 한다면 지금부터 연습할 시간이 겨우 며칠밖에 없었다.

정신적인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억지를 쓴다 해서 얼마나 내가 집중할 수 있을까.

이 정신적인 문제도 구세프 선생님처럼 강인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선생님과 달리, 난 에르네스트에게 직접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가 날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하는 게 진심이라는 걸 의심하진 않지만, 막상 내가 무사히 건반을 만지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가 무의식적으로나마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구세프 선생님의 이야기는 이해했다.

그러나 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무대를 피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에요. 할 수 없을 뿐이에요. 여기, 보시겠어요?”

“뭐냐.”

“……떨림이 멎질 않아요.”

내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심각하게 떨리는 것에 비하면 조금 나았지만, 일단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건 눈으로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구세프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난 혹시나 싶어 덧붙였다.

“다친 건 아니니 걱정하진 마세요.”

“……다치지 않아도 다칠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니 선생님은 담배를 꺼버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먼저 선생님은 사과해 주셨다.

“미안하군. 네 말대로 내가 너무 잔인한 소리를 하긴 했다.”

“아니에요…… 전…….”

“그만.”

“예?”

그런데 내가 말을 하려는 걸 갑자기 끊더니 선생님이 갑자기 책상 너머로 상체를 뻗어 왔다.

깜짝 놀라 꼼짝도 못 하는 사이, 커다란 두 손이 내 어깨를 짚었다.

가늘게 떨리던 떨림이 그 손에 눌려 잦아들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날 내려다본다. 멍하니 올려다보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만해라.”

“…….”

“네 마음에 대해선 이제 알겠다.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괴롭겠지.”

그 말대로였다. 난 에르네스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어 버렸는데 대체 무슨 면목으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대신 강렬하게 치솟기만 하는 이 감정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구세프 선생님은 그걸 이미 안다는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게 고착되어 버리면 안 된다. 알겠나? 타티아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

“알겠다고 대답해라.”

“…….”

때때로 선생님은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반강제적으로 지시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기도 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제야 선생님은 내 어깨에서 손을 놓아주셨다. 그것뿐이었는데도, 내 떨림은 이전보다 한결 나아져 있었다.

오도카니 앉아 있는 날 보던 선생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문 쪽으로 손짓했다.

“아무튼…… 그럼 연주회 등에 대해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으마. 알아서 해라.”

“예. 그리고…….”

“네 손에 대해서 녀석에게 이야기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이미 선생님은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다 알고 계셨다.

대화는 끝났다. 난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무릎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일단 쉬더라도 나가서 쉬어야 했다.

조심스레 뒤돌아 나가려고 하는데, 구세프 선생님이 내 등 뒤로 말했다.

“타티아나. 듣자하니 너도 아나스타샤를 구하려고 했다지.”

내가 돌아보자 선생님은 힘없이 풀어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쉽게 짓는 미소가 아니다. 어렵게, 아주 어렵게 짓는 미소였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난 너도 에르네스트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가 봐라.”

조용히 구세프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난 말없이 레슨실 문을 닫고 나왔다.

선생님에게 무언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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