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8화
타티아나에게 전화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세연에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에르네스트가 다쳤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졌다.
피아노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온통 그 이야기들뿐이었다.
에르네스트의 부상은 그만큼 엄청난 뉴스였다.
하지만 세연에게 있어서 그 이야기는 뉴스거리에서 그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갔었던 추억을 떠올렸다.
타티아나의 독주회가 목적이었지만 중앙음악학교를 견학하고픈 마음도 있어서 무작정 학교로 찾아갔었고, 거기서 예상치 못하게 에르네스트를 만날 수도 있었다.
그는 처음에 타티아나의 친구로서 온 세연이 팬이라고 밝히자 어색해하기도 했지만, 결국 친구라 말해 주며 웃어 주었었다.
동경하고 있던 연주자에게서 친구란 말을 듣는 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크게 다쳐 회복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느낀 기분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세연은 자신이 느끼는 안타까움보다 그 가까이에 있을 타티아나가 느끼는 것이 훨씬 더 클 것이라 생각했다.
‘그 애가 친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달리 착각할 것도 없을 정도로 타티아나는 친구들에게 지극정성인 타입이었다.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의지하는지 한눈에 봐도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타티아나는 다치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기도 했다.
세연의 팔에 상처가 조금 난 것을 보고도 그녀는 기겁하듯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기분일까.
세연은 그것을 묻는 것조차 겁이 났지만, 지금 연락하지 않는다면 친구라 할 수 없게 됨을 느꼈다.
그래서 충분히 신중하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듣게 된 타티아나의 목소리엔 깊은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일부러 독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것 같지만, 전화 너머로도 그녀의 마음의 상처가 크다는 건 여실히 전해져 왔다.
만약 타티아나가 강하게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면 세연은 굳이 찾아가지 않으려 했다.
연주회를 취소할 상황에 뒷수습이 바쁠 텐데 억지로 찾아가는 건 귀찮게 하는 일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병문안은 추후 에르네스트가 조금 안정되면 그때 어떻게든 시간을 내도 늦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화로 들려오는 낮게 가라앉는 목소리를 들으며 세연은 곧장 모스크바로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를 내버려 두면 혼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에.
공항에 마중 나온 타티아나의 경호원인 빅토르에게 자신이 예약한 호텔이 아니라 타티아나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
빅토르는 세연의 말을 듣고 짐짓 인상을 썼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을 타티아나에게 데려다주는 것이 곧 타티아나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세연은 처음으로 베르체노프 저택을 볼 수 있었다.
말도 못 할 정도의 재벌가라고 이미 들어서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예상했던 것보다 백배는 더 컸다. 저택이 아니라 성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정원과 저택이 그녀를 맞이했다.
응접실로 안내받으면서 살짝 위축이 되기도 했지만, 세연은 지금 제대로 봐야 하는 것이 이 거대한 저택이 아니라 타티아나라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잠시 기다리자 타티아나가 응접실로 나왔다.
{……세연.}
얇은 실내복에 카디건을 걸친 타티아나는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서슬 퍼런 눈빛을 한 그녀는 지금 그 누구라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연은 하나도 겁먹지 않았다.
세연이 마지막으로 본 타티아나는 어두운 무대 위에서 숙제를 내어 주는 피아노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소름 끼칠 정도로 강인했던 그 존재감을 세연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랬던 타티아나가 이렇게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을 뿐인 무언가처럼 흐릿하게 보인다는 것에, 세연은 울어버릴 뻔했다.
천천히 일어나서 다가가니 타티아나는 주춤하며 거부했다.
아예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싫은데.}
타티아나가 바로 정색하며 쳐 내더라도 세연은 다시 달라붙을 생각이었다.
쫓겨나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애를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움찔하던 타티아나는 곧 몸에 힘을 풀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는 걸까. 아마 놓고 나면 잔뜩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무서워졌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타티아나는 물끄러미 세연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무서움이 조금 더 커졌지만, 냉정함을 가장하려고 하는 타티아나의 눈빛에서 그저 차가움만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화를 내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이만 놓아주세요.}
{응…….}
세연은 적어도 자신이 여기 있는 동안은 타티아나가 사라지지 않을 거란 확신을 느끼며 팔을 놓았다.
떨어지고 나니 타티아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뻐하거나 감격스러워하진 않으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갑자기 조금 창피해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신이 타티아나에게 느끼는 걱정 등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그녀가 더 잘 알 테니까. 알고 있기에 태연한 척하는 것이다.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세연이 새삼 이 응접실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타티아나가 흐트러진 카디건을 다시 정돈하며 이야기했다.
{당황스럽네요. 갑자기 이렇게 오실 줄은.}
{전화했었잖아?}
{…….}
당연히 모스크바가 아니라 집으로 곧장 온 것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세연은 일부러 모르쇠로 답했다.
타티아나는 살짝 인상을 쓰더니 세연에게 말하는 대신 응접실 한쪽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빅토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분히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빅토르. □□ 전화□ □□□ □□□□□.”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였지만 대충 뜻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세연을 데리고 오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전화 정도는 해 줬어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이리라.
경호원으로서 타티아나를 위한 일이라 믿고 한 것이겠지만, 빅토르는 길게 변명하지 않고 세연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짧고 명료한 러시아어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
타티아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세연을 앞에 두고 그녀를 데리고 온 경호원과 다투는 건 실례라 생각하는지 금방 그만두었다.
다시 세연을 바라보며 타티아나는 그녀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조금 누그러진 눈빛을 보며 세연이 옅게 웃었다.
{빅토르 씨는 잘못 없어. 깜짝 서프라이즈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성공적이네요.}
{그렇지?}
당황해하는 것 같긴 해도 그럭저럭 좋게 받아 준 것 같아서 기분 좋게 웃다가도, 세연은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울적하게 물어보았다.
{에르네스트는 어때?}
{……치료받는 중이에요.}
{그렇구나. 병문안 오늘 바로 가 볼 수 있을까? 안정해야 하나?}
세연은 막상 에르네스트에겐 연락도 하지 못했다.
정말 나 막무가내구나…….
새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세연은 이번에도 다짜고짜 어느 병원이냐고 물어봐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선 타티아나가 대신 해결해 주었다.
{아마 괜찮을 거예요. 저녁에 함께 가 보시겠어요?}
{저녁?}
{예.}
{음…… 그러자.}
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타티아나가 정말 괜찮은 건지 살폈다.
이곳으로 올 때부터 그런 걱정을 했었다.
타티아나는 마치 휴일인 것처럼 집에서 쉬고 있었다.
중앙음악학교의 모두가 쉬는 건 아닐 텐데, 학교에 가지 못할 정도라면 얼마나 충격이 깊은 것이 상상도 잘 안 간다.
하지만 세연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섰기 때문인걸까, 타티아나는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연은 타티아나에게 왜 이 시간에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아주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점심은 먹었어? ……아! 지금 버릇처럼 먹었다고 하려고 했지?}
{……그렇지 않아요.}
{아무튼, 안 먹었다면 같이 먹는 건 어때?}
좀 뻔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지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세연은 밀어붙였다.
타티아나에겐 그녀가 무언가 깊게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고 이 정도로 밀어붙이는 편이 좋았다.
제안을 받은 타티아나는 쉽게 무시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르륵 옆돌며 말했다.
{알겠어요. 따라오세요.}
반짝거리던 응접실을 빠져나와서, 또다시 기절할 정도로 멋진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타티아나는 잠시 세연에게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 있던 셰프가 그녀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헉. 아가씨?”
“드미트리.”
타티아나는 미안하다는 듯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근래 이 식당에 잘 오지도 않았던 것 같다.
무언가 간단히 먹을 걸 부탁하는지 두 사람은 몇 마디 주고받았다.
멀리서 잘 들리진 않지만 세연은 타티아나가 러시아어로 말하는 음색과 분위기를 좋아했다.
영어로 말할 때보다 더 깊은 고풍스러움과 차분한 느낌이 있었다.
영화의 한 장면을 감상하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타티아나가 다시 돌아왔다.
세연과 마주 보고 앉은 타티아나는 깍지를 낀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언가 생각하던 그녀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물었다.
{오시는 길은 어떠했나요.}
{아침 비행기 타고 10시간 걸렸는데 도착하니 점심때라는 건 늘 이득 보는 기분이 들어. 그래도 피곤함은 그대로이지만.}
벌써 러시아도 몇 번이나 와 봤다. 10시간이나 되는 비행은 고되긴 하지만 세연은 그래도 씩씩하게 대답했다.
타티아나는 약간 걱정이라는 듯 말했다.
{아침에 출발하셨으면 그사이 주무시기도 어려우셨겠네요.}
{잠도 안 오더라고. 기내식도 조금밖에 안 먹었어.}
{……그런가요.}
중얼거리던 그녀의 시선은 다시 손끝으로 향했다.
연주회도 취소가 분명한데 병문안이라도 무조건 하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세연에게 타티아나는 약간 복잡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타티아나가 편하게 여겨 주지 않으리란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세연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불편하다고 해서 피하기만 하는 건 정말 쉽다. 세연은 그 쉬운 함정에 걸리지 않으려 할 뿐이다.
어렵고 까다롭다 하더라도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을 향해 세연은 걸음을 옮긴다.
이곳에 온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
고개를 든 타티아나는 세연의 확연한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고는 결국 그녀를 존중해 주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깍지를 풀고 양손을 펼쳐 놓은 타티아나가 물었다.
{……호텔은 어디로 잡으셨죠?}
{어…… 어디더라.}
제일 싼 곳으로 잡았는데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입국심사를 받을 때도 거주등록이 필요하다길래 간신히 스마트폰으로 찾아서 보여 주었다.
이번에도 다시 찾아서 타티아나에게 보여 주니 그녀는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연락해서 예약 취소하도록 할게요. 방을 내어 드릴 테니 며칠 동안은 그곳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어……?}
{……혹시 관광 일정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다시 도심에…….}
{아니! 내가 미쳤니?}
세연은 급히 손을 휘저으며 부정했다. 관광은 무슨 관광? 그런 걸 할 상황은 절대 아니다.
어차피 연주회를 주 목적으로 끊은 티켓이라서 체류 기간도 짧았고.
아무튼 타티아나가 진짜로 집에 초대해 주자 세연은 되레 당황스러웠다.
이 집에 빈방이라면 백 개도 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바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잠깐만, 잠깐만. 그러면 내가 무작정 쳐들어와서 밥도 얻어먹고 방도 뺏은 것 같이 되어 버리는데?}
{아닌가요?}
{나 그렇게까지 뻔뻔한 사람 아닌데!?}
진짜 타티아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절망한 세연이 울상이 되어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자 타티아나는 미소를 보였다.
여유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이 회색빛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보인 여유였다.
{……알아요. 고마워요.}
자칫하면 무례하다고 여겨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세연이 무리하는 이유를, 타티아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말리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도 받아들이고 있다.
세연은 그녀의 깊은 다정함을 기억하면서 되도록 힘들어하는 일이 적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