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9화
점심 식사 후엔 타티아나가 직접 세연을 안내했다.
그녀에게 내어 주기로 한 방을 정리하는 사이에 저택 안을 구경시켜 주기로 한 것이다.
세연은 혼자서 돌아다니면 백 퍼센트 길을 잃어버렸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밖에서 봐도 굉장했는데 내부는 더 어마어마했다.
만약 관광의 목적으로 모스크바에 왔다 하더라도 다른 곳을 돌아다녀 볼 것 없이 베르체노프 저택만 둘러보더라도 충분할 것 같단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곳은 욕실이고…….}
{……아까 전에도 우리 욕실을 세 번 정도 지나 왔던 것 같은데. 몇 개나 있는 거야?}
{글쎄요.}
타티아나는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지만 세연으로선 머리가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에 고용인들도 수십 명이 넘는 것같이 보였으니 당연히 일반 가정집의 상식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이건 상식을 뛰어넘어도 너무 많이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구경한 타티아나의 방은 그 전체적인 화려함에 비해 조금 평범하게 보였다.
{여기가 제 방이에요.}
구성 자체는 이 저택에 걸맞다. 침대도 화려해 보이고 옷장도 그야말로 웅장했다.
하지만 세연은 어딘가 모르게 이 방이 외롭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이 엄청난 집안의 영애로서 부족함 없이 누리고 살 것이 분명한 타티아나에게 이런 말을 하면 대체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세연은 그녀에게서 언제라도 훌쩍 떠날 것 같단 기분을 느끼곤 했다.
살짝 책상 쪽을 보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그 위엔 거의 책들 뿐이었다.
유일하게 장식이라 할 수 있는 건 작은 액자 몇 개와 새의 모양을 한 목각 정도였다.
방 안을 조금 더 보고 싶었지만, 타티아나를 돌아보자 그녀가 지금 조금 난처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연은 잠깐 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한 걸음 물러서자 타티아나가 이쯤이면 되었을 거라며 세연을 안내했다.
{여길 써도 된다고……?}
{예. 모쪼록.}
2층에 위치한 방은 타티아나의 방보다 더 화려하게 보일 정도였다.
세연이 당황스러워해도 타티아나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안으로 휙 들어서선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샴푸 등 필요한 건 저기에 있고…… 냉장고도 마음대로 쓰셔도 좋아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거나 외출 등을 원하시면 저를 부르시거나 바로 인터폰으로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어…… 응. 그래.}
{식사도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 생각인데…… 오늘 저녁 정도는 아버지와 함께 하셨으면 해요. 세연은 제 손님이지만 아버지도 아셔야 하니까.}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마워요.}
재벌 총수라 할 수 있는 타티아나의 아버지와 만나는 건 조금 긴장되는 일이지만, 세연이 이 저택에 곧장 찾아온 시점에서 이미 그녀는 간을 내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와서 겁먹을 생각은 없었다.
생각보다 흔쾌히 대답한 게 의아했는지 타티아나는 살짝 세연을 살펴보는 것 같았지만, 곧 별 문제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쉬세요. 5시 즈음에 부를게요.}
{응.}
{……세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태도로, 타티아나가 말했다.
{이제야 초대해서 미안해요. 솔직히 지금도…….}
말을 얼버무리는 일이 잘 없는 타티아나가 묘하게 중얼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왜 그래?}
역시 고민하는 표정이다.
세연은 이런 식으로 무작정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 저택에 초대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건 타티아나가 그녀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무언가 복잡한 이유가 얽혀 있었다.
이전부터 타티아나는 세연을 쉽게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거라면 조금 더 매정하게 쳐 내도 될 텐데, 거리를 두면서도 내어 주려는 건 또 한없이 많았다.
지금도, 타티아나는 세연조차 거의 잊은 일을 꺼내들었다.
{팔은 괜찮나요?}
{응?}
무슨 소린가 싶어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곧 세연은 그것이 몇 달 전에 마트에서 팔을 다쳤던 일을 말하는 것이란 걸 깨달았다.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흉터가 남긴 했지만 이젠 교수님도 이 이야기는 하지 않는데.
세연은 바로 팔을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당연하지! 자, 봐 봐.}
{흐릿해졌네요.}
{그냥 긁힌 거라니까? 설마 이걸 아직도 걱정했었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다시 강조하며 이야기해도 타티아나는 유심히 세연의 팔을 바라보다가, 눈만 살짝 들며 말했다.
{전 걱정이 되어요.}
도대체 타티아나가 어떤 마음으로 세연을 대하고 있는 건지, 그녀로선 여전히 조금 혼란스러웠다.
혼자서 생각해 본 바로는 두 사람이 다루는 음악성의 어딘가에 기준이 있다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가까이하려고 해야 하지 않나?
타티아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면서도 너무나 많이 신경을 써 준다.
거기엔 부스러질 것 같은 기대와 불안감 등이 뒤섞여 있었다.
세연은 이미 음악적으로 서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쉬세요.}
하지만 타티아나는 짧게 이야기하고는 세연을 방 안에 남겨 두고 떠났다.
「……그래도 옆에 있으라 해 줬네.」
혼자 남은 세연은 중얼거렸다.
타티아나는 지금 집에 놀러 온 친구를 대하는 기분으로 세연을 대하지 못할 뿐이다.
같이 수다를 떨면서 놀거나 그럴 상황이나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단지 호텔로 돌려보낸 게 아니라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세연은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왜 안심이 되는 거지.」
안도감이 먼저 드는 것에 대해 세연은 약간 혼란스러웠다.
단순히 교통비나 숙박료, 식비 등을 걱정할 일이 없어진 것이라면 행운이라 생각하며 기뻤어야 정상이었다.
타티아나에 대한 감사를 느낀다든가. 그러나 그런 행복한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만약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세연은 적어도 모스크바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티아나는 그 무엇도 잘 모르고 그저 걷고만 있는 것 같았다.
세연은 그렇게 맴도는 타티아나를 간신히 모스크바에서 찾아내었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몰라.」
어쨌든 지금은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세연은 실내화를 벗고 그대로 침대 위로 드러누웠다. 말도 안 될 정도로 폭신한 촉감이 세연을 감쌌다.
묘한 안도감과 그 촉감에 몸을 맡기고 세연은 그대로 잠깐 눈을 감았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땐 그대로 3시간이 지나 있었다.
{세연. 혹시 안에 계신가요.}
{…….}
문밖에서 타티아나가 세연을 불렀다.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가자 그 앞에 선 타티아나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점심에 무작정 만났을 때와는 달리 약간 안정을 찾은 모습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세연도 마주 웃어 보였다.
그녀는 약간 창피함을 느끼며 이야기했다.
{자고 있었어…….}
{여로가 고단하셨나 보네요.}
{이불이 구름 같더라…… 그냥 자 버렸어. 계속.}
방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오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 터, 다른 걸 했다고 할 수도 없어서 세연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타티아나는 작게 웃더니 이야기했다.
{괜찮아요. 저도 잠들었거든요.}
대낮인데 같이 뭔가 하지도 않고 따로 떨어져서 잠을 자고 있었다니…… 약간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두 사람은 비교적 무난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타티아나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세연의 옆머리를 보더니 이야기했다.
{30분쯤 후에 식사를 할까 하는데, 오시겠어요?}
{응. 갈게.}
{특별히 메이크업을 하실 필요는 없지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부탁을 드려 놓을게요.}
{어……? 아니야, 알아서 할 수 있어.}
도움? 무슨 도움?
세연이 한사코 사양하자 타티아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갔고, 세연은 거울 앞에 앉았다.
무대에 오를 때처럼 메이크업을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면서 헝크러진 머리를 정돈할 필요는 있었다. 그 정도는 혼자서도 가능했다.
준비를 마치고 잠시 기다리자 다시 타티아나가 와선 세연을 안내했다.
점심 식사를 했었던 중앙 식당이었다.
“아버지.”
그 테이블 앞엔 두 명의 커다란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이미 한 번 본 곳인데도, 두 사람이 앉아 있자 분위기가 확 달라져 있었다.
타티아나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재벌 총수라는 느낌이었고, 오빠는 재벌 2세가 아니라 영화배우 같은 모습이었다.
타티아나의 가족인 두 사람은 세연을 일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어느 정도 합격이라는 건가?
주춤거리는 세연을 데리고 타티아나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안녕하세요. 임세연이라 합니다.”
그나마 인사말은 러시아어로 유창하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타티아나가 이어 그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세연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타티아나가 꽤나 신경 써서 그녀를 좋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유리라 소개한 타티아나의 아버지가 직접 한 질문도 있었다. 그건 타티아나가 통역해 주었다.
{한국에선 학기 중에도 연주회 견학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시네요.}
{……보통은 잘 안 해 주지. 난 교수님이 특별히 힘써 주신 경우야.}
{그렇군요.}
다시 타티아나가 이야기를 전하고, 그 후로도 사소한 질답이 몇 가지 오갔다.
그사이 타티아나의 오빠인 루슬란이 슬쩍 끼어들어 세연에게 말했다.
{미안. 아버지는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밖에 못 하셔서.}
{아.}
미안하실 건 아니었다. 애초에 세연이 러시아어를 조금 더 열심히 배워 뒀더라면 될 일이었으니까.
다음엔 정말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베르체노프가 가족들끼리의 대화가 오간다.
중간중간 루슬란과 타티아나가 번갈아 가며 말을 걸어 주어서 세연은 소외감 같은 걸 느끼진 않았다.
루슬란이 가볍게 웃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멀리서 와 줘서 고맙다고 하시네. 나도 고마워. 임.}
그 감사는 단순히 타티아나의 친구로서 찾아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요 며칠 타티아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 감사 인사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리에게서 느껴지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고마워한다는 느낌이 분명하게 전해져 왔다.
세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숙여 답했지만, 자신이 억지로나마 이곳에 온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되진 않았다는 것에 내심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정말 맛있었어.}
{다행이네요.}
세연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먹는진 모르겠지만, 저녁 식탁은 그야말로 만찬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어지간한 호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도 꿈도 못 꿀 요리들이었다.
타티아나의 식사량을 생각했는지 양도 적당한 수준이었다. 세연에게도 그 정도가 딱 맞았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자 해가 완전히 떨어졌다. 러시아의 가을은 해가 짧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세연은 타티아나와 마주했다.
{지금 갈 거야?}
{예. 그럴 생각이에요.}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타티아나는 빅토르를 불러 바로 준비시켰다.
길게 준비할 것도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갔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세연도 어제 준비했던 병문안 선물을 챙겨선 밖으로 나왔다. 검은색 벤츠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모르는 세계로 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세연은 차에 올랐다.
거의 소리도 없이 차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병원으로 가는 동안 타티아나는 말이 별로 없었다. 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간 다친 정도였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너무 심한 부상이라서 어떤 말이든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타티아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가로등 불빛이 차례로 그녀의 얼굴 위를 덮으며 지나갔다. 세연은 그런 타티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그 무게도 무거워져서 깨기가 힘들었다. 이대로 말없이 병원에 도착하는 건가 싶을 때였다.
세연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재미있어 보여서 잠깐 바꿔 놓았던 트로트였다.
모스크바를 달리는 벤츠 안에서 터져 나오는 트로트 음악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세연은 창문을 열고 스마트폰을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졌다.
{받으세요.}
클래식 전공 맞느냐고 묻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깜짝 놀란 표정을 하던 타티아나는 나지막이 웃으며 세연에게 손짓할 뿐이었다.
그리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고 되레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연은 그제야 화면을 확인했다. 멀리서 걸려온 전화였다.
애꿎은 신경질을 낼 뻔했던 그녀는 간신히 화를 추스르며 전화를 받았다.
「아, 종혁 오빠.」
「세연아, 너 지금 러시아야??」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세연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종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혁은 2년 내내 세연과 데면데면했지만, 얼마 전 친해진 이후로는 꽤나 신경을 써 주고 있었다.
차로 데려다주거나 심지어 레슨을 해 주기까지. 세연은 정말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원래 레슨실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이지. 미처 생각 못 했다. 세연은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오늘 레슨은 다음으로 미뤄서 한 번에 해 줘요.」
「레슨 맡겨 놨어?」
「이번엔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만들어 놨는데, 궁금하지 않아요?」
「…….」
세연은 이제 슬슬 종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음악에 종혁은 상당히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흥미를 가지고 피아노에 앉길 바라는 건 종혁 쪽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그런 묘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세연은 그것을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약간은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피아노뿐이라 생각하며 양껏 이용하는 중일 뿐이다.
타티아나는 사적인 통화를 하는 세연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옆모습에선 이전엔 없었던 다양한 상념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