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0화
세연은 러시아행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학기 중에 그렇게 갔다 온다는 것을 자랑하듯 알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고, 심지어 지금은 더더욱 복잡한 이유들이 얽혀 있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최소한으로 교수님이나 부모님,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들에게만 양해를 구해 놓은 상황이었다.
종혁은 그렇게 세연이 찾은 어른들 중 자신이 빠졌다는 것이 살짝 섭섭한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보단 호기심이 더 강한 듯했다.
- 「그래서 러시아엔 왜 간 건데? 교수님도 말 안 해 주고.」
「그게…….」
이렇게 전화까지 해 준 것이 약간은 감동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종혁과 길게 수다를 떨 상황이 아니었다.
이 좁은 차 안에서 통화하는 것에 대해 타티아나도 빅토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무례가 아닐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래도 세연은 제멋대로 하는 걸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말조심을 할 필요도 있었다.
바로 옆에서 타티아나가 듣고 있다.
그녀가 지금 이 통화를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세연이 조심하지 않는다면 상황을 설명하다가 에르네스트의 이름이나 엠뷸런스 등의 단어가 튀어나와서 타티아나를 신경 쓰이게 할지도 모른다.
지금 병문안을 가는 길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타티아나는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기도 하고. 세연은 가급적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줄게요.」
- 「와, 너 무슨 사업해? 뭔가 있어 보이는데?」
「장난치지 마요. 진짜로. 심각한 일이니까.」
세연이 정색하며 말해도 전화 너머에선 능글맞게 웃는 소리만 들렸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알은체도 잘 안 하면서 무게 잡던 그 인간은 어디로 간 거야?
하지만 지금 장난을 쳐 오는 종혁이 바로 본래 성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연은 한숨을 쉬며 그 이상 타박하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세세하게 다 설명을 들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는지 종혁은 가볍게 대화를 정리했다.
- 「부러워서 그렇다고 하려고 했는데, 뭐든 간에 음악 하러 간 거겠지. 알겠어.」
「응. 맞아요.」
- 「그럼 됐어.」
클래식 강국인 러시아에 피아노 연주자가 가서 할 일은 사실 음악에 관련한 부분으로만 압축해도 굉장히 많다.
세연은 열심히 하고 있다. 그 정도의 결론으로도 종혁은 충분히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는 킥킥거리면서 이어 말했다.
- 「어쨌든, 오면 이야기하자. 네가 저번에 먹고 싶다고 노래 부르던 곳에서 마카롱이랑 이것저것 사 놨으니까.」
「내, 내가 언제요? 그런 적 없는데.」
- 「내가 언제요?」
말도 안 되는 모함에 놀란 세연이 쏘아붙이자 종현은 그런 그녀를 놀리듯 목소리를 따라했다.
진짜 그 무뚝뚝하던 인간은 대체 어디로 간 건데!
어차피 여기서 더 길게 말싸움을 해 봐야 이길 수도 없고, 차 안에서 다른 두 사람에게 민폐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세연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진짜 없는데…….」
- 「아무튼 빨리 오라고.」
「……네.」
- 「그리고 올 때 기념품도 알지? 센스 없이 마트료시카 같은 거 사오면 내가 아니라 네가 후회하게 될…….」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세연은 전화를 툭 끊었다.
듣자듣자하니 진짜 웃긴다.
「이 인간이 어쩐지 친절하다 싶었는데…….」
걱정된다는 듯 전화도 하고, 말하지도 않은 디저트도 사 놓았다길래 뭔가 했더니 결국 기념품 사 오란 이야기였다.
뻔뻔한 것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다.
혼자 투덜거리면서 세연은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그런데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살짝 고개를 돌려 보니, 타티아나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통화 중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창밖을 보고 있었던 건 세연을 배려했던 행동이었다.
갑자기 미안해진 세연이 급히 사과했다.
{아…… 시끄러웠지. 미안해.}
{괜찮아요. 즐겁게 통화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보기 좋았어요.}
그냥 별 내용도 없이 떠들기만 했던 건데.
타티아나가 보기엔 즐거워 보였던 걸까. 세연은 그렇게 보였다는 것에 대해 약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한 대상이 누군지 궁금해졌는지 타티아나가 물어왔다.
{어떤 분이랑 통화하신 건가요?}
{종혁이라는 사람인데…… 내가 이야기했었나 모르겠네?}
{기억나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연과 같은 교수님을 사사하고 있고 다쳤을 땐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던 분.}
{아, 내가 말했었구나.}
진짜 기억력 좋아…….
세연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걸 타티아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타티아나가 말해 주었던 것을 바탕으로 어디까지 이야기했었는지 생각해 보던 세연은 그때 종혁이 다시 피아노 앞으로 복귀했다는 것까지 이야기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병문안을 가는 차 안에서 이야기하기엔 조금 어색한 이야기일 것 같았다.
세연은 일부러 이야기의 방향을 약간 돌렸다.
{아무튼 요즘 좀 친해졌더니 아주 진짜 자기 동생인 것처럼 대하더라고.}
{싫어하시는 것 같진 않아요.}
{싫……다기보단, 뭐라고 해야 할까…….}
친근하게 대해 주는 것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지도 않았다.
그녀는 종혁이 그간 차갑게 대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차가웠었냐는 물음까지 파고든다면, 조금 안쓰러웠다.
그 전부를 지금 말할 수는 없어서 세연은 곤란해했다. 그 낌새를 느낀 타티아나는 더 이상 캐물어 볼 생각은 없다는 듯 말했다.
{같이 피아노 연구도 하시나요?}
{응. 가끔. 그리고 아예 레슨을 해 주기도 해. 그건 교수님도 허락하셨어.}
{특이한 경우네요.}
{그렇지?}
같은 사람을 사사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레슨 등을 하는 건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자칫 안 좋은 버릇만 서로 옮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처음엔 종혁이 세연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대해 달갑잖게 여겼으면서도, 이내 그가 시간을 내어 레슨을 해 줄 생각이 있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기준과 판단을 생각해 보면서 세연은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이지. 내가 처음 봤을 땐 두 사람 항상 분위기가 안 좋았거든. 그…… 자세한 건 이야기 지금 안 할게.}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난감하네.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에르네스트가 완벽하게 다 낫고 나서, 다른 곳에서 둘이 앉아서 긴 시간을 두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세연은 그런 생각으로 대충 이야기를 맺었다.
{아무튼 지금은 다들 분위기 좋아서. 나도 좋아.}
{잘되었네요.}
타티아나는 따뜻한 미소로 세연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세연이 하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들려서 웃는 건 아니었다.
묘한 평안과 감사가 깃든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이어 말했다.
{전 그런 것들이 전부 세연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응? 나?}
{예.}
세연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타티아나는 굳이 이해할 필요 없다는 듯 웃었다.
{이렇게 올곧고 바르니까…… 두 분도 힘을 내실 수 있는 거겠죠.}
{…….}
타티아나가 한 말 자체만 놓고 보자면 같은 또래의 친구에게 할 이야기라 하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하지만 세연은 그 말이 타티아나의 입에서 나오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세연에게 감사해하며 응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이 되어 주려는 생각도 많은 것 같았다.
타티아나가 보이는 복잡한 태도에 대해 세연은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단 기분마저 느꼈다.
{혹시 너도 그런 거야?}
순간적으로 나온 물음이었다.
옅은 미소를 보이고 있던 타티아나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지금까지 신경 거슬리지 않게 잘 해 온 것 같은데 마지막에 실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세연이 실수를 수습할 필요는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마주한 타티아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에 대해 알게 된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이윽고 타티아나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세연은 그 뜻이 더 자세히 설명하란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연이 불식간에 던진 물음이 타티아나란 호수에 파문을 그렸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괜한 이야기를 했나.’
지금은 너무 타티아나의 마음이 약해진 순간을 노리게 된 것 같아서 세연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일단 지금 타티아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에르네스트일 테니까.
세연은 자신의 이야기 같은 건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차량으로 1시간 정도 달려 두 사람은 모스크바 도심에 위치한 병원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도착했네요. 가죠.}
{응.}
내려서 병원을 본 세연은 빌딩이나 다름없이 까마득한 높이의 건물에 깜짝 놀랐다. 이게 전부 병원이라고?
놀라워하는 세연과 달리 타티아나는 가방을 들고는 이미 익숙한 걸음으로 병원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세연은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서 병원 안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대부분은 의사나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타티아나는 자연스럽게 입구의 카운터로 보이는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 앞에서 무언가 하고 있던 사람은 자연스레 제지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다 말고 깜짝 놀랐다.
“오늘 □□□ □□ □□…… 아.”
그는 빠르게 무어라 말하더니 옆쪽으로 손을 펼쳤다. 타티아나가 조용히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별다른 검색이나 제지 없이 그냥 모든 것을 지나쳐 간다.
두 사람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타티아나는 바로 최상층의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 내렸을 때. 세연은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랐다.
뭐야 여기?
「…….」
공항 보안검색대처럼 생긴 시설이 복도에 갖춰져 있었고 그 옆으로도 간호사가 아니라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엄하게 주변을 지키고 서 있었다.
몇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았는데, 세연은 놀라서 기침을 할 뻔했다.
타티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향했다.
여기 병원 맞냐고 다시 물어보지도 못하고 세연은 그 뒤를 따라갔다.
경비원 한 사람이 물었다.
“친구 □□□□□?”
“예.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딱 몇 마디를 하자마자 그 삼엄하던 경계가 바로 흩어졌다.
세연은 타티아나가 러시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란 걸 안다.
하지만 마치 무법자처럼 모든 것을 지나쳐 가는 것을 보니 약간 무섭기까지 했다.
{타티아나…… 에르네스트는 지금 어디 갇혀 있기라도 한 거야?}
{……예?}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자 타티아나가 우뚝 발걸음을 멈추더니 세연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엉뚱한 질문이라는 것 같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경계가 삼엄해서.}
{……아무나 드나들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녀의 말대로 에르네스트의 일은 워낙에 큰 사건이라서 찾아오고 싶어 할 사람도 많을 것 같았다.
이곳은 그런 사람들을 막기에 적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세연은 타티아나가 정도 이상으로 불안해한다고 느꼈다.
{…….}
두 사람은 긴 복도를 걸었다. 복도엔 병실도 몇 개 없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있는 병실에 멈춰선 타티아나는 천천히 문을 노크했다.
“에르네스트. □□□□□.”
“아, □□□.”
들어오란 의미일 대답이 들려오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에 온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넓고 깔끔하게 정리된 공간이 세연을 맞이했다.
한눈에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최고급 VIP 병실이다. 대체 이곳에 머물려면 하루에 얼마나 들까 상상도 안 갈 정도다.
그리고 벽 쪽의 침대엔 에르네스트가 누워 있었다.
크게 다쳤다는 것을 듣고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무대 위에서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는 세연은 목이 멜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도 지금은 쾌유를 바라며 병문안을 온 것이니까, 세연은 태연을 가장하며 멀리서 온 친구를 에르네스트가 반길 수 있도록 웃어 보였다.
{세연? 여긴 어떻게…….}
그녀를 본 에르네스트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 깜짝 놀랐다.
그를 놀라게 해 줄 목적은 완벽하게 성공이었다.
하지만 잠시 혼란스러워했을 뿐, 영민한 에르네스트는 곧바로 세연이 어떻게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빠르게 알아냈다.
{아, 혹시 원래는 연주회 보러 오려고 했었어?}
{엑…… 어떻게 알았어?}
{병문안으로 비행기를 타는 건 좀 지나치잖아? 안 그래?}
분위기가 괜찮으면 병문안만을 목적으로 왔다고 해서 더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세연과 타티아나는 조금 더 가까이 가선 옆에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에르네스트는 몸을 일으켜 앉아서 두 사람과 마주하긴 했지만 침대 위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는 그게 조금 어색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
{다친 건 정말 유감이야. 에르네스트.}
세연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하자 에르네스트는 쓰게 웃었다.
그렇게 뛰어난 역량을 자랑하던 피아니스트가 팔을 크게 다치면 어떤 기분일까.
세연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지금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아닐까.
에르네스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느끼던 세연은 지금이 적당하겠다 싶어서 가방을 열었다.
{맞다. 이거, 지금 줘도 될까?}
{뭔데?}
{쾌유를 바라는 내 선물.}
세연이 가방에서 꺼낸 건 가지런하게 몇 번 접힌 노란 부적이었다.
무슨 종이인지 모르겠다는 듯 에르네스트가 설명해 달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막상 꺼내고 보니 미신을 믿으라 하는 사람 같다. 조금 후회된다.
하지만 세연도 꽃 같은 무난한 병문안 선물을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자신이 아는 작은 희망이 기적이 필요한 에르네스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아빠가 예전에 운동하다 다쳤을 때 받았던 거라는데…… 그때 완벽하게 잘 나으셨거든. 그래서 효험이 있는 것 같아서 가져왔어.}
{……그럼 너희 집에서 중요한 물건인 것 아냐?}
{필요한 사람 손에 있는 게 낫지.}
잘 알지도 못하는 종이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인데, 에르네스트는 세연에게서 부적을 받아 들더니 잠시 앞뒤로 돌려보며 흥미를 가지는 것 같았다.
{펼쳐 봐도 돼?}
{아, 아니. 그건 접힌 모양과 방향도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고…….}
{신기하네. 이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냥 잘 나을 것 같다는 기분만 느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세연은 괜한 소리들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아빠 거라서 좀 그런가? 아, 잠깐만. 이런 부적은 혹시 이단 같은 거야……?}
{뭐? 이단?}
{그…… 정교회 믿는 것 아니야?}
러시아 사람들은 대부분이 정교회 신자였다.
그래도 난데없이 이단 운운하니 놀랐는지 에르네스트는 눈을 깜빡이더니 곧 푸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뭐 그렇긴 한데…… 난 별로 독실하지 않아서 상관없어. 그리고 우리도 부적 같은 의미로 쓰는 물건이 있거든. 이코나라고 불러.}
{이코나?}
에르네스트는 병실 구석에 있는 작은 그림 몇 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예수님이나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그려 놓은 것 같은데, 러시아에서 쓰는 부적은 저런 식인 것 같았다.
그래도 예수님이랑 부적은 뭔가 다른 것 같은데…… 비슷한 걸로 쳐도 되는 걸까? 묘한 기분을 느끼며 세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르네스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알지 못하는 문화권에서 온 물건에 굉장히 유쾌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고마워. 반드시 나을게.}
{응.}
이야기가 끝나자 찬 공기가 맴돌던 병실 온도가 조금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이번엔 타티아나가 물었다.
{과일을 조금 가져왔어요. 드시겠어요?}
에르네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티아나는 과일과 칼을 꺼내선 조용히 깎기 시작했다.
에르네스트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연은 이곳이 병실이 아니었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