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스크바의 여명-821화 (821/1,277)

##  821화

둘만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미 에르네스트는 러시아에서 가능한 최상급의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저력을 전부 동원했으므로 이곳에서 이 이상으로 무언가 더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먼 곳에서 온 세연의 방문은 분명 그 이상이 되어주었다.

{스마트폰 새 거야?}

{응. 요번에 바꿨어. 볼래?}

{고마워.}

음악가 세 명이 앉아서 음악 이야기를 안 하면 할 만한 이야기가 딱히 없을 것 같지만, 사교적인 세연은 금방 요령 좋게 이런저런 주제들을 이끌어내서 대화를 이루어나갔다.

이번엔 세연의 스마트폰이 주제였다. 한눈에 봐도 최신형이라는 게 보인다.

그녀는 은근히 자랑하듯 에르네스트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에르네스트는 이런 소소한 대화에서 여유를 얻는 듯 보였다.

스마트폰을 받아 쥔 그는 이리저리 둘러보기도 하며 흥미를 보였다.

{좋네. 너희 나라에서 만든 거지?}

{응. 이전에 쓰던건 교통카드도 안되고 음악 파일 관리하는것도 불편해서.}

{교통카드? 트로이카 같은 게 너희도 있나 보네?}

{트로이카가 뭐야?}

다른 문화에 사는 두 사람은 각자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게 느끼는 듯했다.

세연과 비슷한 친구로는 한승우가 있긴 했지만, 그는 유학생의 신분으로 이쪽 사회에 가급적 빨리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지라 자기 이야기를 자주 하진 않는 편이었다.

그에 비해 세연은 말이 많고 스스럼없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대중교통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옆에서 깎아 놓은 사과를 먹었다.

이러다간 내가 깎아서 나 혼자 다 먹겠다 싶어서 포크로 하나 찍어 에르네스트에게 건네주었다.

사과를 받아 든 에르네스트는 한 입 베어 물고는 스마트폰을 다시 구경하더니 세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나도 스마트폰 바꿀까 싶네. 여기 누워서 온종일 한 손으로 스마트폰만 만지고 있는데 버벅거리니까 신경 쓰여.}

{그거 오래 쓴 모델이지?}

{한 2년 썼나.}

그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선 흔들거렸다.

그러더니 문득 조용히 있는 내게도 묻고 싶어졌는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아, 타티아나도 비슷할 건데. 넌 괜찮아?}

{…….}

비슷하긴 했다. 나도 2년 넘게 썼으니까.

그동안 고장 한 번 안 나고 불만없이 잘 써왔는데, 최근에 난 그만 떨어뜨려서 액정을 깨뜨리고 말았다.

갑자기 여러 현상들이 겹치면서 날 옥죄어오는 기분이 든다.

밝은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아서 난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말없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뒤집어놓았던 스마트폰을 돌려서 깨진 액정을 보여 주었다.

갈라진 유리는 불길했다.

밝게 재잘거리는 세연 덕에 조금 나아졌던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은 기분이 든다.

괜히 보여 주었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숨기는게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조용히 다시 엎어놓자 세연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그녀의 전화를 받으려다가 떨어뜨렸다고 하진 않고 그냥 얼버무리듯 말했다.

{얼마 전에 깨뜨렸어요. 시간이 없었죠.}

사실은 지금 수리 따위에 의욕이 생기지 않았을 뿐이었다.

대단찮은 일이라는 듯 이야기를 넘기려 하자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에르네스트가 날 불렀다.

“타티아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가 오른손으로 든 스마트폰을 까딱였다.

“파일 하나 받아 볼래?”

“……예?”

“지금 보낼게.”

뭔지 말도 않고 다짜고짜 그는 화면을 조작하며 말했다.

“싫으면 거절해.”

내가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들자 그 화면엔 파일 전송을 수락하겠냐는 창이 떠 있었다.

무엇인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과제일 것이란 직감이 든다.

그러나 이게 무엇이든간에 지금 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전송받고 나서야 다시 그에게 물어보았다.

{뭔가요 이건?}

{곡 하나 써 봤어. 너한테 줄게.}

{…….}

옆에 있는 세연을 의식해서 일부러 영어로 말했는데도 에르네스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나만큼이나 세연도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에르네스트가 평범한 행동을 한 건 아니란 증거였다.

난 가슴 속에 차 있던 먹먹한 기운이 점점 내 폐를 채우고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와중에도 그가 음악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에 기쁜 마음이 있긴 했지만, 그보단 대체 왜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그 스스로를 그리고 나를 몰아세우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내게 강압적으로 반드시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주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생각 할 필요 없이 따랐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고요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불쑥 화가 난다.

그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충분히 휴식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

{스마트폰만 가지고 놀았다니까?}

노는 김에 해 봤다는 듯 그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건 확실했다. 완벽주의자인 그가 그런 걸 내게 보냈을 리 없으니까.

나도 모르게 표정이 차가워진다. 에르네스트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보지 말고. 나도 그냥 심심해서 써 본 거니까.}

{…….}

{나 말고, 곡을 봐 줬으면 좋겠는데.}

{…….}

난 그가 보낸 것을 내려다보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만약 지금 곡을 봐 버린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악가로서의 내가 빨려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필경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욕이 생기겠지.

에르네스트는 분명히 그럴 만한 곡을 보냈을 테니까. 난 그걸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는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난 내가 어떻게 느낄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더욱 고집스럽게 난 고개를 치켜들었다. 변명을 하면서.

{화면이 깨져서 못 봐요.}

{그래도 보면 보일걸.}

에르네스트는 적당히 봐주는 법이 없었다.

{볼 수 있을 거야.}

이젠 더 이상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진 명확했다. 연주회의 진행이겠지.

이전까지 난 그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해 놓긴 했지만 지금 다시 제대로 못 박을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에르네스트. 전…… 연주회와 관련된 모든 걸 취소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래?}

그는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도 하자면 할 수 있을걸. 할 수 있을 거야.

다른 누가 아닌 에르네스트가 건넨 그 말은 곧 확신으로 날 끌어당긴다. 그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난 당장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눌러 참으며 물었다.

{그 연주회에 큰 욕심이라도 있으셨나요?}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절 올려보내려 하는 거예요?

에르네스트에게 정말 절실한 이유가 있다면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에르네스트는 단조롭게 이야기했다.

{있었지. 지금은 의미없지만.}

{그렇다면 왜.}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것 아닌가?}

{그러니까 왜!}

내 참을성은 여기까지였다. 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나도 모르게 터져나왔다.

날카롭게 소리치자 옆에 있던 세연이 깜짝 놀란 듯 움찔거렸다.

그런 연주회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난 잘 모르겠다. 정말로. 의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연주회를 왜 해야 하는지.

{이러지 않아도 되잖아요. 제가 매일 찾아오는 걸로 괜찮았잖아요…….}

집중해서 가라앉히고 있던 떨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난 지금 그의 치료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싶었다.

실제로도 가능한 모든 것을 하고 있기도 했고. 난 내가 여기서 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내게 무언가 청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간 우리가 서로를 봐 왔던 것에 대한 신뢰가 내게로 향한다.

{괜찮다고 납득해 버리면 후회할 것 같아서.}

{……후회?}

{지금까진 아무것도 후회할게 없었거든. 그럼 끝까지 잘 하려 해야지.}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다시 한번 소리치고 싶었다.

후회할 게 없다니? 붕대에 감긴 그 왼손을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난 심장이 뛰고 숨이 막힌다.

다만 그 앞에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사자인 에르네스트가 그렇게 말한다는 게 난 너무 힘겨웠다.

왜냐하면 그 역시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그에게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고 다그칠 수도 없었다.

그 역시 가까스로 버티고 있을 자존심을 그렇게 무시해 버릴 순 없었기에.

난 간신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해할 수 없어요.}

{미안, 나도 잘 설명할 자신이 없네.}

그는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말하면 말할수록 날 강제하게 되리란 걸 직감했다는 듯.

대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는 이야기했다.

{곡은 네게 맡길게. 그러니 마음대로 해. 그게 전부야.}

{…….}

{그 정도는 괜찮지?}

어떻게 이렇게 강할 수 있는 걸까.

난 그가 혹시나 절망할까 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내가 쓸 수 있는 소원과 병실 등으로 심리적 그리고 물리적 속박을 모조리 걸었다.

그의 상태가 만약 더 심각해진다면 그 이후에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그런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곡까지 써냈다. 그 뜻은 분명했다.

지금 속박되어 있는 건 그가 아니었다. 나였지.

그는 그것을 풀어주려는 것이었다.

{…….}

난 굳이 풀려나지 않아도 좋았다. 이 운명에서 죄책감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일 테니.

에르네스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도 괜찮았겠지. 하지만 그는 그것이 곧 후회가 될 것이라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반대로 지금 이 말이 후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다른 하실 말씀은 없나요. 부탁이라든가.}

{없어.}

{…….}

하지만 에르네스트는 단호했다.

난 오늘의 만남이 여기까지라는 걸 직감했다.

다음 대답을 내가 가지고 올 때까지 에르네스트는 이 이상 이야기하려 하지 않을 테지.

나 역시 지금은 더 이야기해 봐야 괴롭기만 할 것 같았다.

{이만 일어날게요. 세연. 조금 더 있다가 오실 건가요?}

{아, 아니? 나도 갈게.}

숨도 안 쉬는 듯 바짝 긴장한 채 옆에 있던 세연이 화들짝 놀라더니 날 따라 일어났다.

난 가방을 챙겨 들고 의자 뒤쪽으로 나왔다. 에르네스트는 침대에 앉은 채로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세연은 날 따라 나오려다가 말고 침대 쪽으로 다가가서 작게 말했다.

{에르네스트.}

{응. 세연.}

{……다음에 또 올게.}

강력하게 무언가를 이어붙이듯, 세연이 말했고 에르네스트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막 병실 문을 열고 나오려는 찰나였다.

{아 맞아. 타티아나.}

에르네스트가 날 불러세웠다.

그냥 이대로 나갈 수 없었던 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할 말이 더 남은 건지 짐작조차 안 간다. 머릿속에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니 에르네스트가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까 내가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었다고 했었는데, 생각났어. 딱 하나 후회되는 것.}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그가 다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한 것에 대해 믿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가 언젠가 그날의 일을 후회하며 나를, 그리고 세상을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목소리를 떨지 않도록 주의하며 물어보았다.

{……무엇인가요?}

{너랑 기념 음반 만들 걸 그랬어.}

에르네스트의 대답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후회로 남은 과거의 선택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게 후회의 전부라니.

난 목이 메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냉정할 정도로 받아들이고 잘못된 건 없다고 말하는 그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고 잘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을 바랐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멍하니 에르네스트를 바라보자 그는 그냥 해 본 말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더니 이어 말했다.

{아무튼 염증 관리가 잘 되어서 모레쯤 수술할 계획이라고 하니까, 다음에 보는 건 그 이후로 하자.}

그는 아무 계획 없이 방황하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계획을 앞에 두고 차분하게 발을 내딛고 있었다.

보다 강인한 자신감으로 그가 이야기했다.

{제대로 회복해서 따라갈게.}

{…….}

이 애의 옆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하고 도움이 되어 주고 싶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렇게 하길 바라지 않는다.

의사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응원과 도움이 어디에 있는진, 잔인하리만큼 분명했다. 그 사실이 난 너무 힘들고 어렵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비틀어 돌리면서 말했다.

{전화할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실 밖으로 나오자 세연이 내 뒤를 따라 나오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타티아나…….}

{……나가죠.}

세연이 없었더라면 아마 여기에서 난 꼼짝도 못 했겠지. 하지만 방금 나눈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있기에 난 움직일 수 있었다.

다시 검색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

빅토르에게 전화를 해서 병문안이 끝났으니 돌아가겠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난 넋이 나간 듯 한참 동안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는 도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연은 아무 말 않고 내 옆에 있어 주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서, 난 그녀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세연.}

{응.}

{제가 연주회를 한다면, 그게 옳을까요?}

비행기로 10시간이나 떨어진 곳에서 온 세연에게 그런 걸 묻는 건 지독하게 비겁한 일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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